목차
1. 환관의 정의
2.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환관
3. 환관에 대한 연구
4. 환관의 기원
5. 환관이 만들어지는 과정
6. 환관의 성격적, 외형적 특징들
7. 환관의 필요성 및 존재 이유
8. 환관의 수와 후궁과의 상관관계
9. 환관의 교육
10. 환관의 직무와 24아문
11. 역사 속 환관의 활약상
12. 환관의 권력독점과 이의 폐혜
13. 중국에서의 환관과 황권과의 관계
14. 나오며
15. 참고자료
2.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환관
3. 환관에 대한 연구
4. 환관의 기원
5. 환관이 만들어지는 과정
6. 환관의 성격적, 외형적 특징들
7. 환관의 필요성 및 존재 이유
8. 환관의 수와 후궁과의 상관관계
9. 환관의 교육
10. 환관의 직무와 24아문
11. 역사 속 환관의 활약상
12. 환관의 권력독점과 이의 폐혜
13. 중국에서의 환관과 황권과의 관계
14. 나오며
15. 참고자료
본문내용
주하는 무수한 환관들은 제왕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작하였고, 연출하고 운영해 왔던 것이다. 환관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직은 12감의 우두머리인 태감이며, 이는 정4품의 관직으로써 외성과 비교하면 각 성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빈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결국에는 방랑자, 무뢰한, 범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높은 지위에 이를 수 있는 것이었다.
11. 역사 속 환관의 활약상
이제부터는 환관이 구체적으로 활약했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살펴보기로 하자.
어느 시화에서나 비슷한 경향으로 국가 초기의 시대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교양도 풍부해지고, 총명해지는데 비하여 유연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 마음이 약해져 마침내 현실을 등지게 된다. 중국 고대에 있어서 원제이후의 시대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선제는 항해중인 선박의 키는 선장 자신이 움직여야 한다는 철칙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 그 키를 부하에게 맡겨 놀고 선장은 백일몽을 꾸면서 현실에서 벗어나도 좋지 않겠는가? 선제의 아들 원제가 받아들인 백일몽은 유가였다. 그는 당시의 역학의 대개를 따랐으며, 자기 자신을 무시해 버리고 유학의 대가를 초청해 정부의 수뇌로 임명했다. 이는 유가 관료의 의견이 옳다고 판정되어 그것을 실행에 옮길 단계가 되면 측근 세력이 방해가 되어 중도에 그만 두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 무제나 선제 같은 경우 실행해야 할 의견은 자기 마음 속에 명기해 놓고, 방해자가 유능한 학자였다면 망설임 필요 없이 즉각 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국은 어떤가? 여기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이 태동하고 있었다.
선제이후에도 변함없이 유능한 환관으로 활약하던 홍공, 석현은 중서령으로 정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환관이었던 그들은 외척세력과 연계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원제는 여전히 그들에게 정무의 일체를 맡기고 있었다. 이제 새롭게 태동된 것이라는 것은 혼자 있을 때의 허약한 환관이 조직을 결성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당우라는 즉 동지라는 이름으로 단결하였다. 한편, 외척에 있어서도 곽광의 횡포이후로 불문율이 되었던 외척에 관한 제도가 다시금 적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외척은 자동적으로 화촉의 대열에 끼일 수 있으며, 나아가 대장군으로서 군정을 장악함으로써 자유롭게 궁정을 출입할 수 있었다. 이 위험한 막강한 두 측근세력은 서로 결탁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닌 정의파, 또는 순이론파였던 유가 관료의 이론적 견해 때문이었다. 유가 관료들은 유학의 가르침인 聖王의 정치가 실현되는 것을 지금 방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좌우 양쪽의 측근세력이라 하였고, 완고한 명분을 내세워 이들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공격의 내용은 지난날의 제도에 맞추어, 죄인 출신의 환관은 중서에서 추방시켜야 한다든지 황후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지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이론에 궁핍한 외척과 환관들은 당연한 결과로 서로 공동 전선을 펴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측근세력에게 역학이란 것은 어쩐지 기분 나쁜 것이었는데, 유가 관료들은 지나치게 역학을 내세우기 때문에, 마침내 이름있는 유가 관료들은 감옥에 쳐 넣었다. 또 한번은 역으로 측근세력에게 유가들이 협력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왕망이란 자는 하늘에서 왕망을 황제로 삼는다는 글이 써있는 돌이 떨어졌다든지 여러가지 상서로운 점이 나타났다는 등, 여기에 걸 맞는 예언들이 전국에서 상소되었고, 왕망의 공덕을 칭송하는 시가가 3만 통이나 쌓였다고 소문을 터뜨려서 유흠이 날조한 <<주례>>의 세계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아주 그럴듯한 선양극을 꾸며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한나라의 왕실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이 등후를 비평할 때면 <<서경>>에서 ‘암탉이 울면 그 집안은 망한다’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조금은 가혹한 비평이지만 역사는 그 글귀 그대로 진행되었다.
안제의 親政이 시작되었으면서, 환관 江京, 李閏등은 황후대부가 되었으며, 황후 염씨의 일족은 모두 화족의 열에 들어갔다. 그들은 유모 王聖모자와 결탁하여 내외를 선동하면서 천하가 온통 자기 것인 양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환관들은 황제를 대신하여 성묘를 가게되면, 지방관이나 백성은 마구 괴롭혔으며, 또 관청의 물품을 부정으로 유출하여 자신의 호화스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청류파의 우두머리였던 재상 양진은 그들의 요구에도 절대로 응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그들의 부정을 지적하여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는데, 마침내는 그들로의 반격을 받아 면직되고 말았다. 그는 고향에 내려가는 도중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는데 이때 우두머리를 잃은 환관15명은 이에 항의하여 궁정성문 앞에서 연좌 농성을 감행하였는데 환관들은 칙어를 내새워 이들을 해산시켰다. 이런 유형의 실력행사는 여지껏 한번도 없었는데 이제 이들은 황태자를 폐위시킬 음모를 꾸몄다. 한편 안제는 여행길에서 급사를 하였다. 이 때 황후와 환관 강경, 이윤 등이 상의하여 황제의 죽음을 비밀리하고 허수아비황제를 만들려고 계획했다. 그리고 지신들 내부의 이질세력들을 숙청하던 시기에 허수아비 황제가 죽고 말았다. 이 때 孫程이라는 용감한 환관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안제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던 폐태자와, 또 페태자를 보위하고 있던 환관의 처지를 동정하여, 자신과 뜻이 같은 사람 19명을 규합하여 그들과 함께 총궐기를 맹세했다. 지진이 일어났던 11월의 어느 날 밤을 기하여 그들은 금문을 수비하던 강경을 위시한 환관 수뇌부를 단숨에 베어버리고 환관울 통솔하던 이윤에게로 다가와 그를 협박하여 마침내 폐태자를 다시금 제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12. 환관의 권력독점과 이의 폐혜
중국사에서 황제의 권력은 막강했다. 明代(명대)에 와서 그 권력은 더욱 비대해졌으며, 그 부산물론 환관의 간헐적 득세가 초래됐다. 그러나 환관 위충현의 등장 등의 요인으로, 3백년 역사의 명왕조는 하루아침에 멸망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위충현은 1568년 河北(하북)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李進忠(이진충)이었다. 도박으로 인한
11. 역사 속 환관의 활약상
이제부터는 환관이 구체적으로 활약했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살펴보기로 하자.
어느 시화에서나 비슷한 경향으로 국가 초기의 시대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교양도 풍부해지고, 총명해지는데 비하여 유연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 마음이 약해져 마침내 현실을 등지게 된다. 중국 고대에 있어서 원제이후의 시대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선제는 항해중인 선박의 키는 선장 자신이 움직여야 한다는 철칙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 그 키를 부하에게 맡겨 놀고 선장은 백일몽을 꾸면서 현실에서 벗어나도 좋지 않겠는가? 선제의 아들 원제가 받아들인 백일몽은 유가였다. 그는 당시의 역학의 대개를 따랐으며, 자기 자신을 무시해 버리고 유학의 대가를 초청해 정부의 수뇌로 임명했다. 이는 유가 관료의 의견이 옳다고 판정되어 그것을 실행에 옮길 단계가 되면 측근 세력이 방해가 되어 중도에 그만 두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 무제나 선제 같은 경우 실행해야 할 의견은 자기 마음 속에 명기해 놓고, 방해자가 유능한 학자였다면 망설임 필요 없이 즉각 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국은 어떤가? 여기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이 태동하고 있었다.
선제이후에도 변함없이 유능한 환관으로 활약하던 홍공, 석현은 중서령으로 정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환관이었던 그들은 외척세력과 연계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원제는 여전히 그들에게 정무의 일체를 맡기고 있었다. 이제 새롭게 태동된 것이라는 것은 혼자 있을 때의 허약한 환관이 조직을 결성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당우라는 즉 동지라는 이름으로 단결하였다. 한편, 외척에 있어서도 곽광의 횡포이후로 불문율이 되었던 외척에 관한 제도가 다시금 적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외척은 자동적으로 화촉의 대열에 끼일 수 있으며, 나아가 대장군으로서 군정을 장악함으로써 자유롭게 궁정을 출입할 수 있었다. 이 위험한 막강한 두 측근세력은 서로 결탁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닌 정의파, 또는 순이론파였던 유가 관료의 이론적 견해 때문이었다. 유가 관료들은 유학의 가르침인 聖王의 정치가 실현되는 것을 지금 방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좌우 양쪽의 측근세력이라 하였고, 완고한 명분을 내세워 이들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공격의 내용은 지난날의 제도에 맞추어, 죄인 출신의 환관은 중서에서 추방시켜야 한다든지 황후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지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이론에 궁핍한 외척과 환관들은 당연한 결과로 서로 공동 전선을 펴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측근세력에게 역학이란 것은 어쩐지 기분 나쁜 것이었는데, 유가 관료들은 지나치게 역학을 내세우기 때문에, 마침내 이름있는 유가 관료들은 감옥에 쳐 넣었다. 또 한번은 역으로 측근세력에게 유가들이 협력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왕망이란 자는 하늘에서 왕망을 황제로 삼는다는 글이 써있는 돌이 떨어졌다든지 여러가지 상서로운 점이 나타났다는 등, 여기에 걸 맞는 예언들이 전국에서 상소되었고, 왕망의 공덕을 칭송하는 시가가 3만 통이나 쌓였다고 소문을 터뜨려서 유흠이 날조한 <<주례>>의 세계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아주 그럴듯한 선양극을 꾸며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한나라의 왕실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이 등후를 비평할 때면 <<서경>>에서 ‘암탉이 울면 그 집안은 망한다’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조금은 가혹한 비평이지만 역사는 그 글귀 그대로 진행되었다.
안제의 親政이 시작되었으면서, 환관 江京, 李閏등은 황후대부가 되었으며, 황후 염씨의 일족은 모두 화족의 열에 들어갔다. 그들은 유모 王聖모자와 결탁하여 내외를 선동하면서 천하가 온통 자기 것인 양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환관들은 황제를 대신하여 성묘를 가게되면, 지방관이나 백성은 마구 괴롭혔으며, 또 관청의 물품을 부정으로 유출하여 자신의 호화스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청류파의 우두머리였던 재상 양진은 그들의 요구에도 절대로 응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그들의 부정을 지적하여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는데, 마침내는 그들로의 반격을 받아 면직되고 말았다. 그는 고향에 내려가는 도중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는데 이때 우두머리를 잃은 환관15명은 이에 항의하여 궁정성문 앞에서 연좌 농성을 감행하였는데 환관들은 칙어를 내새워 이들을 해산시켰다. 이런 유형의 실력행사는 여지껏 한번도 없었는데 이제 이들은 황태자를 폐위시킬 음모를 꾸몄다. 한편 안제는 여행길에서 급사를 하였다. 이 때 황후와 환관 강경, 이윤 등이 상의하여 황제의 죽음을 비밀리하고 허수아비황제를 만들려고 계획했다. 그리고 지신들 내부의 이질세력들을 숙청하던 시기에 허수아비 황제가 죽고 말았다. 이 때 孫程이라는 용감한 환관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안제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던 폐태자와, 또 페태자를 보위하고 있던 환관의 처지를 동정하여, 자신과 뜻이 같은 사람 19명을 규합하여 그들과 함께 총궐기를 맹세했다. 지진이 일어났던 11월의 어느 날 밤을 기하여 그들은 금문을 수비하던 강경을 위시한 환관 수뇌부를 단숨에 베어버리고 환관울 통솔하던 이윤에게로 다가와 그를 협박하여 마침내 폐태자를 다시금 제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12. 환관의 권력독점과 이의 폐혜
중국사에서 황제의 권력은 막강했다. 明代(명대)에 와서 그 권력은 더욱 비대해졌으며, 그 부산물론 환관의 간헐적 득세가 초래됐다. 그러나 환관 위충현의 등장 등의 요인으로, 3백년 역사의 명왕조는 하루아침에 멸망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위충현은 1568년 河北(하북)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李進忠(이진충)이었다. 도박으로 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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