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론」의 특색으로는 첫째 「장원양우상론」은 무미건조한 일반적 교의해설서와는 달리 쉽게 표현하여 흥미 있게 읽히는 것은 본의로 하였던 것이다 둘째 「장원양우상론」내용에 구체적인 인용례가 풍부한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셋째 윌리엄 밀른이 이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소천 하였기 때문에 그 나머지는 나중에 후임 선교사에 의하여 보충된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넷째 「장원양우상론」의 내용은 온건하고 급진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섯째 「장원양우상론」의 역어 중에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는 한계를 갖고 있던 것이다.
「향훈오십이칙」은 밀른이 농촌 등에 존재하는 중국인 신도에 대하여 설교용 자료로서 저술한 것이다. 이 책의 초판은 1842년 말라카에서 간행된 70엽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향훈오십이칙」은 선서명의. 서문. 교훈일이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문에 해당하는 교훈의 부문은 51엽이다 모두의 선서명의는 성서중의 중요한 어구에 대하여 간단한 해설을 한 것이다. 이 선서명의에 이어서 서문이 있는데 “지방의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본서 집필의 의도에 대하여 상당히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향훈오십이칙」은 주로 농촌 지방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교회에 출석할 수 없는 사람들과 목회자가 없는 교회 등에 대하여 복음 이해의 강화 자료로서 저술된 것인데, 매주 한 주제씩 연간 52 주제를 내용으로 할 예정의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밀른의 급서로 제1권 12訓의 간행으로 끝나버린 미완의 선교문서이다.
넷째, 중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최초의 중문 정기 간행물로서 주목받는 「찰세속매월통기전」(察世俗每月統紀傳)을 밀른이 간행한 점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찰세속매월통기전」은 1815년 8월 5일 창간되었다. 원래 밀른은 신문과 선교잡지의 중간형태의 중문 정기간행물의 발간을 지향하였다. 따라서 밀른은 이 정기간행물에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이름 대신에 ‘만세만처만인(萬世萬處萬人)’을 고찰함으로써 객관적인 진리를 구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여 「찰세속매월통기전」이란 이름을 붙였다.
「찰세속매월통기전」의 내용은 신리(神理),인도(人道).국속(國俗).천문(天文).지리(地理)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리란 기독교의 교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잡지에 게재된 총 244편의 문장 중에서 신리를 선전한 문장은 총 206편으로서 총수의 84.5%를 차지하였고 그 항수도 85%를 넘었다. 인도란 윤리도덕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그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였다. 국속이란 각국의 풍속을 일컫는 말이다. 이와 관련된 문장은 4편이었는데 종교적인 내용을 가미하였다. 천문과 지리는 과학지식이란 포관적인 개념으로 정리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천문학에 관한 것이 많았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시대적인 제약으로 말미암아 다음과 같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용어 사용에 있어서 극히 신중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의 조야는 모두 기독교를 이단으로 간주하였고 말라카의 중국인 중에서도 전통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아 기독교의 전파를 매우 혐오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충효절의인애(忠孝節義仁愛)사상을 담은 문장을 게재하였다. 「찰세속매월통기전」의 문장에는 항상 중국 문화 특히 소설의 표현 수법이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찰세속매월통기전」은 독자의 반응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창간 이후 처음 1년 반 동안 즉 1817년까지 말라카 선교기지의 유일한 새로운 출판물이었고 이후 정간될 때까지 말라카 선교기지 및 갠지스 강 이동 선교회의 가장 중요한 출판물이었던 「찰세속매월통기전」은 다음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었다. 첫째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중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 개척기에 있어서 문서 선교를 촉진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중서문화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셋째「찰세속매월통기전」은 기독교의 교의를 선양함과 동시에 유(儒).석(釋).도(道)와의 차별성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넷째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서양의 문장 부호인 쉼표와 마침표를 최초로 사용함으로써 중국어가 문어문에서 백화문으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적극적인 의의를 지녔다.
다섯째 윌리엄 밀른은 중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역사에서 교육선교의 개척자로서 업적을 남긴 점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세운 영화서원은 1818년 11월 11일 중서 학문을 서로 교육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전파함을 종지로 하여 말라카에 설립되었다. 이 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영화서원은 신학원 내지 선교사 예비학교를 지향하며 설립되었다. 그러나 영화서원은 이후 많은 변화를 거치다가 1843년 홍콩으로 옮기고 영화신학원으로 개명한 후 13년간 유지되다가 1856년에 폐원하였다. 이 때 영화서원의 일반 교육은 홍콩대학에 이양되었고 의료사업은 홍콩대학 의학부가 맡게 되었으며 중국어 장서는 홍콩 청사 내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금일에 이르고 있다.
모리슨과 밀른은 정기 간행물의 선교적, 교육적 목적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영화인쇄소를 설립하였다. 영화 인쇄소의 주요한 기능은 동남아시아 전 지역 특히 그 화교에 대한 보급에 적합한 방언으로 기본 자료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영화 인쇄소에서는 영문 중문 및 말레이문의 간행물과 중문 성경을 출판함으로써 선교 사업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영화서원에 대한 평가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양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 신학원 내지 선교사 예비학교라는 종교적.선교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때 영화서원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반면에 교육적 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때에는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종래에는 전자가 대체로 주류를 형성한 듯하다. 그 이유는 영화서원의 건립 목적인 선교사의 양성과 선교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영화서원은 기대한 만큼이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영화서원이 교육적. 문화적 측면에서 수행한 역할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향훈오십이칙」은 밀른이 농촌 등에 존재하는 중국인 신도에 대하여 설교용 자료로서 저술한 것이다. 이 책의 초판은 1842년 말라카에서 간행된 70엽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향훈오십이칙」은 선서명의. 서문. 교훈일이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문에 해당하는 교훈의 부문은 51엽이다 모두의 선서명의는 성서중의 중요한 어구에 대하여 간단한 해설을 한 것이다. 이 선서명의에 이어서 서문이 있는데 “지방의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본서 집필의 의도에 대하여 상당히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향훈오십이칙」은 주로 농촌 지방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교회에 출석할 수 없는 사람들과 목회자가 없는 교회 등에 대하여 복음 이해의 강화 자료로서 저술된 것인데, 매주 한 주제씩 연간 52 주제를 내용으로 할 예정의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밀른의 급서로 제1권 12訓의 간행으로 끝나버린 미완의 선교문서이다.
넷째, 중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최초의 중문 정기 간행물로서 주목받는 「찰세속매월통기전」(察世俗每月統紀傳)을 밀른이 간행한 점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찰세속매월통기전」은 1815년 8월 5일 창간되었다. 원래 밀른은 신문과 선교잡지의 중간형태의 중문 정기간행물의 발간을 지향하였다. 따라서 밀른은 이 정기간행물에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이름 대신에 ‘만세만처만인(萬世萬處萬人)’을 고찰함으로써 객관적인 진리를 구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여 「찰세속매월통기전」이란 이름을 붙였다.
「찰세속매월통기전」의 내용은 신리(神理),인도(人道).국속(國俗).천문(天文).지리(地理)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리란 기독교의 교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잡지에 게재된 총 244편의 문장 중에서 신리를 선전한 문장은 총 206편으로서 총수의 84.5%를 차지하였고 그 항수도 85%를 넘었다. 인도란 윤리도덕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그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였다. 국속이란 각국의 풍속을 일컫는 말이다. 이와 관련된 문장은 4편이었는데 종교적인 내용을 가미하였다. 천문과 지리는 과학지식이란 포관적인 개념으로 정리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천문학에 관한 것이 많았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시대적인 제약으로 말미암아 다음과 같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용어 사용에 있어서 극히 신중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의 조야는 모두 기독교를 이단으로 간주하였고 말라카의 중국인 중에서도 전통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아 기독교의 전파를 매우 혐오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충효절의인애(忠孝節義仁愛)사상을 담은 문장을 게재하였다. 「찰세속매월통기전」의 문장에는 항상 중국 문화 특히 소설의 표현 수법이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찰세속매월통기전」은 독자의 반응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창간 이후 처음 1년 반 동안 즉 1817년까지 말라카 선교기지의 유일한 새로운 출판물이었고 이후 정간될 때까지 말라카 선교기지 및 갠지스 강 이동 선교회의 가장 중요한 출판물이었던 「찰세속매월통기전」은 다음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었다. 첫째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중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 개척기에 있어서 문서 선교를 촉진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중서문화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셋째「찰세속매월통기전」은 기독교의 교의를 선양함과 동시에 유(儒).석(釋).도(道)와의 차별성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넷째 「찰세속매월통기전」은 서양의 문장 부호인 쉼표와 마침표를 최초로 사용함으로써 중국어가 문어문에서 백화문으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적극적인 의의를 지녔다.
다섯째 윌리엄 밀른은 중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역사에서 교육선교의 개척자로서 업적을 남긴 점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세운 영화서원은 1818년 11월 11일 중서 학문을 서로 교육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전파함을 종지로 하여 말라카에 설립되었다. 이 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영화서원은 신학원 내지 선교사 예비학교를 지향하며 설립되었다. 그러나 영화서원은 이후 많은 변화를 거치다가 1843년 홍콩으로 옮기고 영화신학원으로 개명한 후 13년간 유지되다가 1856년에 폐원하였다. 이 때 영화서원의 일반 교육은 홍콩대학에 이양되었고 의료사업은 홍콩대학 의학부가 맡게 되었으며 중국어 장서는 홍콩 청사 내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금일에 이르고 있다.
모리슨과 밀른은 정기 간행물의 선교적, 교육적 목적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영화인쇄소를 설립하였다. 영화 인쇄소의 주요한 기능은 동남아시아 전 지역 특히 그 화교에 대한 보급에 적합한 방언으로 기본 자료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영화 인쇄소에서는 영문 중문 및 말레이문의 간행물과 중문 성경을 출판함으로써 선교 사업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영화서원에 대한 평가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양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 신학원 내지 선교사 예비학교라는 종교적.선교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때 영화서원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반면에 교육적 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맞출 때에는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종래에는 전자가 대체로 주류를 형성한 듯하다. 그 이유는 영화서원의 건립 목적인 선교사의 양성과 선교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영화서원은 기대한 만큼이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영화서원이 교육적. 문화적 측면에서 수행한 역할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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