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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입니다. 자랑은 아마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사악하고 가장 교활한 것일 겁니다. 그것은 많은 외모를 취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이 점을 인식하는 한 모든 것은 오케이입니다. 자랑-설교든 다른 무엇이든 하려는 성향을 제지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주일 밤에 몇몇 위대한 성도들의 전기를 읽는 것입니다. 설교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너무 지적인 것을 경계하십시오. 나는 지적인 방면, 다소 특별한 재능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맨 첫 번째 것으로 놓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그렇게 적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이 처음에 와야 하는 어떤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매우 다르다고 하는 것을 더 일찍 깨달으십시오. 그들은 독서와 연구와 조정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업가나 직업인이거나 손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니 너무 지적이려고 하는 것을 삼가십시오. 물론 너무 지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해도 안되겠지요. 어쨌든 너무 감상적이거나 정서적인 것을 삼가야 한다고 충고를 들을 만한 분들이 있습니다, 첫째 타입은 이 요소에 결핍되어 있고 너무 지적인 데 치우칩니다. 그러나 너무 감정적이고 감상적인 설교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미한 권면 때문에 경고 받을 필요가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반면에 전혀 권면을 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명석한 지적인 논술과 강해를 해냅니다.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문제는 설교내용과 설교행위 안에 논증(論證)의 위치입니다. 논증적인 요소는 분명히 중요하고 그것은 아주 확실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듣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것입니다. 나는 단지 너무 논증적이려고 들지 말라고만 경고를 합니다. 다시 이것은 더욱더 지적인 유형의 사람들에게 위험합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과소(過小)하게 논증적이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훌륭하게 된 사람들의 평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코 부정적”이어서는 안 된다고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부정적이지 말고 언제나 긍정적이시라.” 그 말은 기만적입니다. 순전히 기만적이고 위선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논증적인 요소를 천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설교에도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인들에게 경고해야 하고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에 있어서 이런 일의 균형은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너희가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다 나와 함께”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변명함만이 아닙니다. 자기 혼자 정한 믿음의 변명자가 되지 마십시오. 언제나 “변명함과 확정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전달방법에 주의하십시오. 설교단에 뛰어서 올라가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습니다. 설교단에 올라서게 될 때 미소를 머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설교단에 서서 애써 웃어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압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말로 그의 회중들에게 인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에 오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다시 얼굴을 대하게 되서 기쁩니다.” 만일 그가 계속해서 한마디 농담을 던지고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면 그건 더욱더 악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보다 제발 목사다운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얼마나 가공할 일입니까?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 나쁜 버릇을 발전시킵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똑같은 소리를 내어서 목사다운 부자연스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역겨웁게 합니다. 거짓되이 경건하는 척하는 것은 더욱 나쁩니다. 그것은 얼마나 간증한 것입니까!
또 수다스러움을 피하십시오. 소위 그저 편한 대로 얘기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을 이런 일들과 관련해서 볼 때 얼마나 무가치합니까! 다시 연극적이지 마십시오. 제스처를 생각해 내서 그것을 뽐내지 마십시오, 연극배우와 같은 것을 삼가야 합니다. 그런즉 무엇이 철칙입니까? 자유스러우십시오. 자신을 잊으십시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존전이라는 것을 의식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됨으로써 여러분 자신을 완전히 잊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올바른 상태입니다. 그것만이 평안의 장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은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자아는 설교자의 가장 큰 적입니다. 사회에 있는 어떤 다른 인물보다도 더욱더 큰 적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처리하는 오직 하나의 길을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의 영광에 붙잡히고 그것에 도취됨으로써 자신을 모두 잊는 것입니다.
제14장 결심의 요청
그러나 보다 특별하게 일조의 “오르가니스트 폭주”(Organist tyranny)라는 아주 현실적인 위험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오르가니스트가 분위기를 상당히 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수단을 가지고 찬송이 불려지는 속도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 효과는 그가 너무 빨리 불렀느냐, 너무 천천히 불렀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골칫거리 오르가니스트 때문에 그의 목회에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진리보다 음악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가 그리스도인인지를 확실하게 하고서 반주자를 임명하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만일 성가대가 있으면 성가대원들도 그렇게 임명해야 합니다. 첫번째 조건은 목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태도, 진리에 대한 사랑, 진리를 노래하는 데 대한 기쁨이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오르가니스트 폭주나 말썽부리는 성가대원들의 폭주를 피하는 길입니다.
이 예배의 여러 국면-예배당 건축양식, 예배의식, 성가, 음악 등-에 기울이는 관심 정도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 강조 점을 많이 두면 둘수록, 영적으로는 보다 빈약해지기 쉽다는 것을 아주 일반적인 법칙으로 설정할 수 있음을 보여드립니다. 그렇게 되면 영성과 영적 이해와 영적 욕구가 더욱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문제를 더 제기하려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생활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어 폭군이 된 어떤 나쁜 습관을 깨뜨려 부셔야 합니다. “어째서 음악의 필요성을 이처럼 강조하게 되었는가? 어
자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매우 다르다고 하는 것을 더 일찍 깨달으십시오. 그들은 독서와 연구와 조정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업가나 직업인이거나 손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니 너무 지적이려고 하는 것을 삼가십시오. 물론 너무 지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해도 안되겠지요. 어쨌든 너무 감상적이거나 정서적인 것을 삼가야 한다고 충고를 들을 만한 분들이 있습니다, 첫째 타입은 이 요소에 결핍되어 있고 너무 지적인 데 치우칩니다. 그러나 너무 감정적이고 감상적인 설교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미한 권면 때문에 경고 받을 필요가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반면에 전혀 권면을 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명석한 지적인 논술과 강해를 해냅니다.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문제는 설교내용과 설교행위 안에 논증(論證)의 위치입니다. 논증적인 요소는 분명히 중요하고 그것은 아주 확실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듣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것입니다. 나는 단지 너무 논증적이려고 들지 말라고만 경고를 합니다. 다시 이것은 더욱더 지적인 유형의 사람들에게 위험합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과소(過小)하게 논증적이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훌륭하게 된 사람들의 평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코 부정적”이어서는 안 된다고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부정적이지 말고 언제나 긍정적이시라.” 그 말은 기만적입니다. 순전히 기만적이고 위선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논증적인 요소를 천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설교에도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인들에게 경고해야 하고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에 있어서 이런 일의 균형은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너희가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다 나와 함께”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변명함만이 아닙니다. 자기 혼자 정한 믿음의 변명자가 되지 마십시오. 언제나 “변명함과 확정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전달방법에 주의하십시오. 설교단에 뛰어서 올라가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습니다. 설교단에 올라서게 될 때 미소를 머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설교단에 서서 애써 웃어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압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말로 그의 회중들에게 인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에 오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다시 얼굴을 대하게 되서 기쁩니다.” 만일 그가 계속해서 한마디 농담을 던지고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면 그건 더욱더 악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보다 제발 목사다운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얼마나 가공할 일입니까?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 나쁜 버릇을 발전시킵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똑같은 소리를 내어서 목사다운 부자연스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역겨웁게 합니다. 거짓되이 경건하는 척하는 것은 더욱 나쁩니다. 그것은 얼마나 간증한 것입니까!
또 수다스러움을 피하십시오. 소위 그저 편한 대로 얘기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을 이런 일들과 관련해서 볼 때 얼마나 무가치합니까! 다시 연극적이지 마십시오. 제스처를 생각해 내서 그것을 뽐내지 마십시오, 연극배우와 같은 것을 삼가야 합니다. 그런즉 무엇이 철칙입니까? 자유스러우십시오. 자신을 잊으십시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존전이라는 것을 의식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됨으로써 여러분 자신을 완전히 잊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올바른 상태입니다. 그것만이 평안의 장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은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자아는 설교자의 가장 큰 적입니다. 사회에 있는 어떤 다른 인물보다도 더욱더 큰 적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처리하는 오직 하나의 길을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의 영광에 붙잡히고 그것에 도취됨으로써 자신을 모두 잊는 것입니다.
제14장 결심의 요청
그러나 보다 특별하게 일조의 “오르가니스트 폭주”(Organist tyranny)라는 아주 현실적인 위험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오르가니스트가 분위기를 상당히 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수단을 가지고 찬송이 불려지는 속도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 효과는 그가 너무 빨리 불렀느냐, 너무 천천히 불렀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골칫거리 오르가니스트 때문에 그의 목회에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진리보다 음악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가 그리스도인인지를 확실하게 하고서 반주자를 임명하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만일 성가대가 있으면 성가대원들도 그렇게 임명해야 합니다. 첫번째 조건은 목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태도, 진리에 대한 사랑, 진리를 노래하는 데 대한 기쁨이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오르가니스트 폭주나 말썽부리는 성가대원들의 폭주를 피하는 길입니다.
이 예배의 여러 국면-예배당 건축양식, 예배의식, 성가, 음악 등-에 기울이는 관심 정도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 강조 점을 많이 두면 둘수록, 영적으로는 보다 빈약해지기 쉽다는 것을 아주 일반적인 법칙으로 설정할 수 있음을 보여드립니다. 그렇게 되면 영성과 영적 이해와 영적 욕구가 더욱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문제를 더 제기하려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생활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어 폭군이 된 어떤 나쁜 습관을 깨뜨려 부셔야 합니다. “어째서 음악의 필요성을 이처럼 강조하게 되었는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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