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검시제도를 현대적검시제도에 입각하여 설명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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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검시제도를 현대적검시제도에 입각하여 설명하시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서론 >

< 본론 >
1. 조선시대의 검시제도.
1) 조선시대의 수사
2) 검시제도의 뒷받침하는 서적
3) 검시제도의 활용
4) 조선시대 검시제도의 특징
2.현재 검시제도
1) 행정해부와 사법해부
2) 우리나라 검시제도의 현재모습

< 결론 >

♧ 참고문헌 및 사이트 ♧

본문내용

여 조사를 벌이게 된다. 먼저 시체가 놓여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그 장소의 사방 규격, 시체가 놓여진 방향 등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장소에 대한 관찰이 끝나면 시체의 옷 가지를 하나씩 벗기면서 시체의 상태를 기록하였다. 사체를 관찰하기 어려운 장소라면 사방이 트이고 밝은 곳으로 옮겨 조사하기도 했다. 이 기록은 얼마나 자세하던지 19세기 사람들의 복장 상태를 모두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최종적으로 알몸이 된 시신의 상태를 기록한 것이 ‘시장’인데 검안에 부록하거나 따로 묶어 보고하였다. 살인사건의 원인을 밝혀내는데 무엇보다도 검시가 중요했기 때문에 범인과 실인(살인의 실제원인)을 확정하기 위해 조사자의 정확한 지식과 철저한 검시 과정이 요구되었다.
2) 검시제도의 뒷받침하는 서적
조선시대에서는 검시제도 중에서 유교적 사상에 입각하여 부검제도 보다는 검안제도가 발달하였다. 사건을 조사하다가 정말 부검이 필요시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부검을 실시하였는데, 조선시대의 법의학을 부검제도보다 검안제도에 중점적으로 서술하도록 한다.
조선시대 부검법의학을 자세한 기술한 책은 『증수무원록언해』, 정약용의『흠흠신서』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살인사건 수사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범인의 자백과 시체의 상처가 증거로 제시되어야 했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심문 방법이 동원되었으나 상처를 규명해내기 위해서는 상처에 대한 지식들, 나아가 상처를 감추거나 위장하는 갖가지 방법들을 파헤칠 수 있는 과학적 기법이 별도로 필요했다. 『신주무원록』은 바로 이것이 가능하도록 검시를 통한 사인규명 등을 정리해놓은 책이다. 과학수사가 고위 관리의 기본이었던 조선에서 『신주무원록』은 관리들이 필독하는 수사지침서였다.
『신주무원록』의 원본은 원래 중국 원나라의 왕여가 저술한 『무원록(無寃錄)』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조선은 자체적으로 시대와 사회상황에 맞게 업그레이드된 개정판을 내었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1438년에 간행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은 그 첫 번째 성과로서 중국판 무원록의 난해하고 우리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을 쉽게 해석을 덧붙여 조선판으로 새롭게 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왜란과 호란으로 사회기강이 무너져 범죄수법이 다양해지자 1784년 구택규가 우리 현실에 맞게 논리적으로 거의 새로 써서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발간하였고, 그의 아들이 다시 『증수무원록대전』과 『증수무원록언해』를 함께 출간하였다. 이것은 정약용의 3대 역작 중의 하나인 『흠흠신서』로 이어진다.
『흠흠신서』는 사체부검을 위한 책으로써 사체부검에 필요한 도구들은 무엇이 있는지도 설명하고있다. 의문의 사체에 대해서는 범인을 밝히기 위해서 형조판서의 승인아래 사체 부검이 행해졌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정약용 사후에 이것은 대량으로 인쇄되어 많은 목민관들에게 기본 지침서로써 활용이 되었다. 과학적인 내용 등을 담고 있어서 지금의 사체부검결과와 다를 바 없는 정확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3) 검시제도의 활용
『살인한 흉기를 날이 오라야 분변키 어렵거든 모롬이 숫블노 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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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9.10.20
  • 저작시기2009.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7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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