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관련 인물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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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도서관 관련 인물 탐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가. 대한민국, 그리고 도서관
1) 세종대왕 (世宗大王, 1397~1450)
2) 정조 [正祖, 1752 ~ 1800]
3) 이인표 [李寅杓, 1922.3.5 ~ 2002.1.3]
4) 허균 [許筠, 1569 ~ 1618]
5) 임종국 [林鍾國, 1929 ~ 1989]
나. 다른나라의 인물
1) 헬렌켈러 [Helen Adams Keller, 1880년 ~1968]
2)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 ~ 1826]
3) 코시모메디치[CosimodiGiovannide'Medici, 1389.9.27~1464.8.1]
4) 앤드루카네기 [Andrew Carnegie,1835년 ~ 1919년]
5) 멜빌듀이 [Melvil Dewey, 1851 ~ 1931]
다. 부록
1) 히말라야에 도서관을 설립한 존 우드 [John Wood 1963~]

3.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1.서론1
2.본론2
가. 대한민국, 그리고 도서관2
1) 세종대왕 (世宗大王, 1397~1450)2
2) 정조 [正祖, 1752 ~ 1800]3
3) 이인표 [李寅杓, 1922.3.5 ~ 2002.1.3]5
4) 허균 [許筠, 1569 ~ 1618] 7
5) 임종국 [林鍾國, 1929 ~ 1989]8
나. 다른나라의 인물10
1) 헬렌켈러 [Helen Adams Keller, 1880년 ~1968]10
2)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 ~ 1826] 11
3) 코시모메디치[CosimodiGiovannide\'Medici, 1389.9.27~1464.8.1]12
4) 앤드루카네기 [Andrew Carnegie,1835년 ~ 1919년]14
5) 멜빌듀이 [Melvil Dewey, 1851 ~ 1931] 16
다. 부록17
1) 히말라야에 도서관을 설립한 존 우드 [John Wood 1963~]17
3.결론19
참고문헌 20
1.서론
최초의 미디어였던 석문이 만들어지고, 점토판으로 된 최초의 도서관이 탄생하면서, 우리 인류에게 도서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이전 중세까지만 해도 도서관은 지금처럼 이용위주의 도서관이 아닌 보관위주의 도서관 이였다. 지금처럼 필요한 정보를 찾아주는 도서관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정보도 잘 찾지 못하는 그저 단순한 책 보관 창고였던 것이다. 하지만 중세이후, 종이의 세계화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힘 입어 서적이 대중화된 후, 도서관의 역할은 보관위주의 도서관에서 이용위주의 도서관으로 바뀌게 된다. 그 때부터가 진정한 근대도서관의 특성을 지닌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의 영향도 많이 받았지만, 그 시대 시대에 도서관의 역할을 제대로 파악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 그러한 인물들에 대해 심도 있게 알아보고, 그들로 하여금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찾기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시작될 인물에 대한 조사는 집현전을 만들어 우리나라 도서관의 계보를 이었던 세종대왕, 소외계층의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 도서관을 만든 이인표, 철강산업을 통해 얻은 엄청난 부를 도서관을 만들기위해 모두 기증한 철강왕 카네기 등 도서관을 만든 인물들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며, 도서관을 통해 친일의 역사를 뒤쫓은 역사가 임종국, 도서관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십진분류표를 만들어 도서관 업무에 효율성을 안겨준 멜빌듀이 등 의 인물도 탐구 할 것이다.
2.본론
대한민국, 그리고 도서관
세종대왕 (世宗大王, 1397~1450)
1397년 당시 정안대군이던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0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고, 1413년 16살에 충녕대군이 되었다. 세종은 몸이 약하여 무예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책읽기를 좋아하여 어린 나이부터 밤낮으로 책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허약한 몸은 생각지 않고 무리하게 책을 읽다가 병을 앓는 적이 많았는데, 어느 때는 도가 지나쳐 병석에서도 책을 읽는 때가 있었으므로 이를 걱정한 태종이 신하들에게 명하여 세종이 소유한 모든 책을 몰수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책을 압수당하여 허탈해하다가 병풍 뒤에 두었던 책을 찾아내어 다시 책읽기에 몰두하며 밤을 지새웠다 한다. 태종은 이에 세종의 책읽기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달아 모든 책을 다시 돌려주었고, 세종은 그 이후 더욱 책읽기에 열중하며 밤낮을 지새웠다.
이런 세종은 1418년 즉위하자마자 경연을 열어 관료들의 학문적 소양을 기르는 등 누구보다 문치주의를 앞세워 나라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1420년 인재들을 길러 새로운 유교국가의 틀을 다지기 위해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였다. 이 집현전은 도서관 기능과 연구 기능, 정책 고문 기능 등 크게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연구 기관으로서 첫째로 갖추어야 할 것이 도서관 기능이었기에 세종은 보문각(普文閣), 수문각(修文閣) 등으로 나뉘어 있던 도서관 기능을 집현전으로 일원화하였으며, 장서를 늘리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서 책을 사들이고, 서적을 바치는 자에게는 그 희망에 따라 포백(布帛)이나 관직을 주어 포상을 했다. 또한 세종은 성절사(聖節使)의 종사관에게 국내에 입수되지 않은 책을 자세히 조사해 오도록 지시하였고, 국내에 입수되지 않은 책들은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로 하여금 책을 사오게 하였다. 심지어 절판된 책 중 필요한 것은 명나라 황제에게 사신을 통해 편지로 부탁하여 서적을 받아오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세종의 정책으로 집현전 도서관에는 많은 책들이 모여 기존의 시설로는 이를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1429년(세종 11년)에는 궁성 서문 안에 집현전 건물을 새로 짓
고, 그 북쪽에 서고인 장서각(藏書閣)을 세워 벽마다 서가를 설치하고 경사자집(經史子集) 경사자집 : 동양 도서분류법의 하나로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의 준말이며, 동양의 전통적인 사부분류법(四部分類法)을 뜻함
4부 분류체계에 의하여 도서를 분류하고 보관했다.
당시 집현전 도서관은 일반에게 공개되지는 않고, 왕을 비롯한 왕족, 관료들에 한해서만 이용할 수 있었다. 책은 집현전 안에서만 볼 수 있었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외부 대출도 허용되었다. 경연에 책을 내갈 때에는 오매부(烏梅符), 동궁(東宮)에 책을 내갈 때는 황양부(黃楊符)라는 도서대출증이 있어야 했다. 각 관청에서는 부득이하게 책을 빌려가려면 임금에게 아뢴 다음 사
  • 가격2,500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09.11.01
  • 저작시기2009.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8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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