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Ⅱ. 수정파의 해석
5. 프랑스 혁명의 신화
제6장 프랑스 혁명의 사회적 해석
7. 프랑스 혁명 : 3부회의 소집으로부터 열월 9일까지
1. 구체제의 사회와 절대군주제
2. 신분들의 반란
3. 1789년 여름의 세 혁명
4. 행복한 한 해
5. 혁명의 일탈
6. 혁명적 낭만주의
7. 곤궁의 시절
8. 맺음말
5. 프랑스 혁명의 신화
제6장 프랑스 혁명의 사회적 해석
7. 프랑스 혁명 : 3부회의 소집으로부터 열월 9일까지
1. 구체제의 사회와 절대군주제
2. 신분들의 반란
3. 1789년 여름의 세 혁명
4. 행복한 한 해
5. 혁명의 일탈
6. 혁명적 낭만주의
7. 곤궁의 시절
8. 맺음말
본문내용
색조가 부여되었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7. 곤궁의 시절
혁명의 그 어떤 시기도 1793년 6월 2일부터 1794년 봄에 이르는 시기만큼 그렇게 커다란, 서로 모순되는 열정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공포정치가 산악파 정치가들에 의해 자유롭게 행해진,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데는 1793년 여름 동안의 그들의 태도를 보아야 한다. 반혁명의 위협은 국경에서뿐만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연방주의자들’의 봉기는 혁명 진영을 적대적인 두 집단으로 분열시킬 위험을 내포하였다. 그렇지만 6월 2일 이후로 관용의 분위기가 우세하였다. 해방의 임무에 충실한 부르주아지는 강제력에 호소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것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공포정치의 여러 조치들은 거리의 주민들에 의해 그들에게 강요되었다.
1793년에 특유했던 것은 공포정치에의 긴박한 요구라기보다는 위기의 높은 강도였다. 그것이 민중이 요구를 자극했으며 위협을 느낌 부르주아지에게 공포정치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리용은 왕당파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툴롱은 영국인의 손에 떨어졌으며, 콩테와 발랑시엔느 그리고 마인츠는 프러시아 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방데 반란군이 소뮈르, 낭트, 샤티옹-쉬르-세브르, 비이에 등지에서 승리했는가 하면 군중은 식량의 위기로 말미암아 흥분하고 있었다. 혁명 부르주아지는 고립되고 갈피를 목잡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공공안전을 위한 독재에 호소토록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세기적인 발명품인 의회주의라는 주요한 정치적 전리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민공회의 통제를 받는 독재가 나타났다.
‘로베스피에르주의, 그것이 곧 민주주의다.’ 1796년 2월에 쓰여진 바뵈프의 이 문구는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와 ‘민중적’ 민주주의, 대의제 정부와 직접 민주주의, 자코뱅주의와 상-퀄로트주의 등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까지 자코뱅 역사서술의 지침이 되었다. 정치적 민주주의 시기를 연 것은 8월 10일 혁명이었다. 보통선거제, 공공교육제, 공공부조제라는 세 차원에서 국민공회는 참으로 19세기를 예시하였다. 비록 선언이 노동과 부조 그리고 교육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소유권에다가 로베스피에르가 4월 24일에 제안한 초안에 나타나는 제약을 전혀 가하지 않았다. 즉 한때는 상-퀄로트와의 동맹을 조장하는 것이 중요하였다면 이제는 유산자 부르주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지롱드 파의 선전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산악파의 힘은 창조적인 상상력이나 다가올 민주주의에 대한 명확한 개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행동의 효율성과 전술의 능란함에 있었던 것이다.
이미 20 여 년 전에 게랭은 부르주아 혁명의 태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싹트고 있음을 상-퀄로트와 혁명정부와의 충돌에서 발견했다고 믿었다. 상-퀄로트를 전투적인 행위에 rif합시켰던 것은 곧 생필품의 공정가격제를 위한 투쟁이었다. 즉 그들이 꿈꾸던 이상사회는 소유권이 보편화되면서도 개인적인 필요에 맞게 제한되는 그런 사회로서, 그것은 곧 자본주의적인 집중에 대한 거부를 뜻하였다. 그런 이상과 거부는 지나간 ‘황금시대’에 입각하는 전통적인 유토피아와 관계된 반동적인 것이었다.
반동적인 사회적 이상읗 가졌던 구민(區民)들은 정치적으로 혁명에서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었다. 하지만 투사들은 항상 소수에 불과하였고 그들이 각 구에 자신들의 의사를 강요하는 방법은 기이하게도 2세기 이전에 파리의 카톨릭 동맹원들에 의해 사용되던 그것과 유사하였다. 사람들은 소수임을 자각하면 더욱 ‘동의’를 확인하고 싶어하고 끝내는 불가능한 설득이 가능한 강제로 전이되는 법이다. 혁명적 정신상태의 배경에는 lsnd의 ‘감정’을 항상 불태웠던 평등과 처벌의지라는 두 가지 열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혁명정부의 유산은 어떤 다른 점에서 즉 국가의 조직에서라기보다는 현대 프랑스의 사회, 정치, 심리적 구조의 몇 가지 독창적인 특징에서 찾아야 한다.
특히 혁명적 전통에 대해 적대적인 인사들 사이에서 매우 뿌리깊은 신화에 따르면 자코뱅 파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구조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따라서 1793년의 현실은 황제주의가 아니라 의회주의였다. 지롱드 파는 어설픈 책동가들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반대세력일 때보다 집권기에 더욱 비상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다수파는 취약하였고 내일의 적대세력들에게 손을 내밀고 투기나 외국의 위협으로 관심을 돌렸던 것이다. 이렇게 산악파의 국민공회의 탄생은 의회에 대한 조정수법과 그 탄생을 같이 하였다.
동시에 농민사회의 여러 특징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793년 7월 17일의 법령은 영주적 부과조를 무상으로 폐지함으로써 농촌의 소유권을 마지막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켰다.
8. 맺음말
1792년 8월10일의 사건 이후 혁명은 전쟁과 파리 군중의 압력으로 말미아아 18세기의 지성과 부로 닦여진 대로를 이탈하였다. 엉성한 몇 가지 공식을 뛰어넘어 누적된 굴욕의 힘과 민중적 시각의 실체를 드러낸 평등주의적 열정이 또다시 표면에 나타난 것이다. 이리하여 신분과 특권으로 구성된 구체제사회에 대한 전도된 상(像)이 제시되었다. 상-퀄로트가 요구하는 세계는 계서제, 비범함, 재산과 재능의 위신 등이 존재하지 않는, 특권계급이라는 가증스러운 단어가 상기하는 모든 것이 사라져야 할 그런 세계였다.
1789년의 이상으로부터 모든 일탈과 왜곡의 원천인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떤 인물, 어떤 집단도 전쟁 앞에서 확고한 입장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당통은 기실 타협에 불과한 해결을 추구한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그 어떤 전망도 제시하지 않은 이유로 또한 목숨을 잃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은 공포정치를 물려줌으로써 일단의 거부의 몸짓을 유발하였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징발을 혐오하였고 부르주아지들은 생의 감미로움을 열망하였다. 민중은 더 이상 그들의 징집병이 비극적인 자의 행렬에 끼여들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열월에 행해진 거래는 미래에 대한 도박이었다. 과연 승리가 평화를 가능케 할 것인가? 그러나 당시대인들은 그런 딜레마를 이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환상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7. 곤궁의 시절
혁명의 그 어떤 시기도 1793년 6월 2일부터 1794년 봄에 이르는 시기만큼 그렇게 커다란, 서로 모순되는 열정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공포정치가 산악파 정치가들에 의해 자유롭게 행해진,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데는 1793년 여름 동안의 그들의 태도를 보아야 한다. 반혁명의 위협은 국경에서뿐만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연방주의자들’의 봉기는 혁명 진영을 적대적인 두 집단으로 분열시킬 위험을 내포하였다. 그렇지만 6월 2일 이후로 관용의 분위기가 우세하였다. 해방의 임무에 충실한 부르주아지는 강제력에 호소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것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공포정치의 여러 조치들은 거리의 주민들에 의해 그들에게 강요되었다.
1793년에 특유했던 것은 공포정치에의 긴박한 요구라기보다는 위기의 높은 강도였다. 그것이 민중이 요구를 자극했으며 위협을 느낌 부르주아지에게 공포정치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리용은 왕당파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툴롱은 영국인의 손에 떨어졌으며, 콩테와 발랑시엔느 그리고 마인츠는 프러시아 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방데 반란군이 소뮈르, 낭트, 샤티옹-쉬르-세브르, 비이에 등지에서 승리했는가 하면 군중은 식량의 위기로 말미암아 흥분하고 있었다. 혁명 부르주아지는 고립되고 갈피를 목잡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공공안전을 위한 독재에 호소토록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세기적인 발명품인 의회주의라는 주요한 정치적 전리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민공회의 통제를 받는 독재가 나타났다.
‘로베스피에르주의, 그것이 곧 민주주의다.’ 1796년 2월에 쓰여진 바뵈프의 이 문구는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와 ‘민중적’ 민주주의, 대의제 정부와 직접 민주주의, 자코뱅주의와 상-퀄로트주의 등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까지 자코뱅 역사서술의 지침이 되었다. 정치적 민주주의 시기를 연 것은 8월 10일 혁명이었다. 보통선거제, 공공교육제, 공공부조제라는 세 차원에서 국민공회는 참으로 19세기를 예시하였다. 비록 선언이 노동과 부조 그리고 교육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소유권에다가 로베스피에르가 4월 24일에 제안한 초안에 나타나는 제약을 전혀 가하지 않았다. 즉 한때는 상-퀄로트와의 동맹을 조장하는 것이 중요하였다면 이제는 유산자 부르주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지롱드 파의 선전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산악파의 힘은 창조적인 상상력이나 다가올 민주주의에 대한 명확한 개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행동의 효율성과 전술의 능란함에 있었던 것이다.
이미 20 여 년 전에 게랭은 부르주아 혁명의 태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싹트고 있음을 상-퀄로트와 혁명정부와의 충돌에서 발견했다고 믿었다. 상-퀄로트를 전투적인 행위에 rif합시켰던 것은 곧 생필품의 공정가격제를 위한 투쟁이었다. 즉 그들이 꿈꾸던 이상사회는 소유권이 보편화되면서도 개인적인 필요에 맞게 제한되는 그런 사회로서, 그것은 곧 자본주의적인 집중에 대한 거부를 뜻하였다. 그런 이상과 거부는 지나간 ‘황금시대’에 입각하는 전통적인 유토피아와 관계된 반동적인 것이었다.
반동적인 사회적 이상읗 가졌던 구민(區民)들은 정치적으로 혁명에서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었다. 하지만 투사들은 항상 소수에 불과하였고 그들이 각 구에 자신들의 의사를 강요하는 방법은 기이하게도 2세기 이전에 파리의 카톨릭 동맹원들에 의해 사용되던 그것과 유사하였다. 사람들은 소수임을 자각하면 더욱 ‘동의’를 확인하고 싶어하고 끝내는 불가능한 설득이 가능한 강제로 전이되는 법이다. 혁명적 정신상태의 배경에는 lsnd의 ‘감정’을 항상 불태웠던 평등과 처벌의지라는 두 가지 열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혁명정부의 유산은 어떤 다른 점에서 즉 국가의 조직에서라기보다는 현대 프랑스의 사회, 정치, 심리적 구조의 몇 가지 독창적인 특징에서 찾아야 한다.
특히 혁명적 전통에 대해 적대적인 인사들 사이에서 매우 뿌리깊은 신화에 따르면 자코뱅 파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구조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따라서 1793년의 현실은 황제주의가 아니라 의회주의였다. 지롱드 파는 어설픈 책동가들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반대세력일 때보다 집권기에 더욱 비상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다수파는 취약하였고 내일의 적대세력들에게 손을 내밀고 투기나 외국의 위협으로 관심을 돌렸던 것이다. 이렇게 산악파의 국민공회의 탄생은 의회에 대한 조정수법과 그 탄생을 같이 하였다.
동시에 농민사회의 여러 특징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793년 7월 17일의 법령은 영주적 부과조를 무상으로 폐지함으로써 농촌의 소유권을 마지막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켰다.
8. 맺음말
1792년 8월10일의 사건 이후 혁명은 전쟁과 파리 군중의 압력으로 말미아아 18세기의 지성과 부로 닦여진 대로를 이탈하였다. 엉성한 몇 가지 공식을 뛰어넘어 누적된 굴욕의 힘과 민중적 시각의 실체를 드러낸 평등주의적 열정이 또다시 표면에 나타난 것이다. 이리하여 신분과 특권으로 구성된 구체제사회에 대한 전도된 상(像)이 제시되었다. 상-퀄로트가 요구하는 세계는 계서제, 비범함, 재산과 재능의 위신 등이 존재하지 않는, 특권계급이라는 가증스러운 단어가 상기하는 모든 것이 사라져야 할 그런 세계였다.
1789년의 이상으로부터 모든 일탈과 왜곡의 원천인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떤 인물, 어떤 집단도 전쟁 앞에서 확고한 입장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당통은 기실 타협에 불과한 해결을 추구한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그 어떤 전망도 제시하지 않은 이유로 또한 목숨을 잃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은 공포정치를 물려줌으로써 일단의 거부의 몸짓을 유발하였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징발을 혐오하였고 부르주아지들은 생의 감미로움을 열망하였다. 민중은 더 이상 그들의 징집병이 비극적인 자의 행렬에 끼여들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열월에 행해진 거래는 미래에 대한 도박이었다. 과연 승리가 평화를 가능케 할 것인가? 그러나 당시대인들은 그런 딜레마를 이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환상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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