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며
1. 유럽 통합의 개괄적 과정
본론
영국의 이해를 통해 본 유럽 통합
1. 유럽과 영국
2.방관자로서의 영국
1)노동당과 복지 국가 건설
2)보수당의 유럽 물타기 전략
3.거절당한 영국
1)보수당과 공동체가입
2)노동당과 유럽문제
4.제동자로서 영국
1)보수당 장기 집권과 유럽통합
2)노동당의 재기와 유럽통합
독일과 프랑스의 민족갈등을 통해 본 유럽 통합
1. 유럽 연합 이전 근대 국가 형성과정에 따른 프랑스, 독일의 관계
2. 유럽연합으로의 진전과 프랑스, 독일간의 관계
1)초창기 유럽방위공동체 결성 움직임 관련
ㄱ. 프랑스와 유럽방위공동체(EDC), 유럽지역주의
ㄴ. 독일과 유럽정치협력(EPC)
2)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에 관련한 주도국의 입장 반영
맺음말
1. 유럽 통합의 개괄적 과정
본론
영국의 이해를 통해 본 유럽 통합
1. 유럽과 영국
2.방관자로서의 영국
1)노동당과 복지 국가 건설
2)보수당의 유럽 물타기 전략
3.거절당한 영국
1)보수당과 공동체가입
2)노동당과 유럽문제
4.제동자로서 영국
1)보수당 장기 집권과 유럽통합
2)노동당의 재기와 유럽통합
독일과 프랑스의 민족갈등을 통해 본 유럽 통합
1. 유럽 연합 이전 근대 국가 형성과정에 따른 프랑스, 독일의 관계
2. 유럽연합으로의 진전과 프랑스, 독일간의 관계
1)초창기 유럽방위공동체 결성 움직임 관련
ㄱ. 프랑스와 유럽방위공동체(EDC), 유럽지역주의
ㄴ. 독일과 유럽정치협력(EPC)
2)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에 관련한 주도국의 입장 반영
맺음말
본문내용
또 다른 원인으로는 드골의 영향아래 유럽은 이미 주권을 침해하는 초국적 기구로 기능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는 드골주의와 연관이 되어있다. 프랑스의 대통령을 지낸 드골(재임기간: 1959.01~1969.01)은 프랑스를 국제 사회에서의 입지를 굳혀 타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주체적인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군비를 자결에 기반을 둔 \'비동맹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드골주의는 유럽공동체의 성격을 초국가적인 성격에서 벗어나게끔 하였다.
윌슨은 야당의 리더로서 1971년 10월 보수당정부의 유럽공동체 가입 안에 대해 국민투표에 부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공동체 가입에 대해 반대투표지침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1974년 2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영국의 공동체 가입에 대해 비판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영국의 공동체 예산에 대한 기여가 너무 과다하게 책정되었고 선거 국면에서는 세계경제 위기로 인한 물가상승이나 사회적 분쟁 등이 모두 공동체 가입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다른 한편 노동당의 좌파가 주장하길 유럽공동체는 의회의 통제, 즉 민주적인 통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비민주적 기구라며 탈퇴론에 의견을 모았다. 또한 이들은 영국의 생산원가가 너무 높아 경쟁력이 부족하며 노동이 자유롭게 이동하면 영국노동자의 권익이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하여 경제사회정책의 자율성을 포기하면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해진다는 논리를 폈다. 윌슨 노동당정부는 가입조건의 재협상을 요구하였지만 애초 주장하였던 근본적인 조약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1975년 6월 5일 국민투표를 통해 영국의 공동체 참여 여부를 물었는데 64.5%의 투표율에 투표자의 67.2%가 대폭적으로 찬성하는 결과를 얻었다.
유럽에 참여를 거부하였던 영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 거의 20여 년을 공동체 가입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반대로 문이 닫혀있었고 다음으로 영국 국내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이견이 분분하여 국민 투표라는 비상수단까지 동원해야 하였다. 그러나 영국 역시 늦은 것은 사실이지만 상당부분 정치세력의 유럽화가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1970년대 후반 영국의 주요 정당은 모두 유럽공동체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영국은 유럽공동체에 동참함으로써 영국의 국익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진흥할 수 있다는 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4.제동자로서 영국
영국과 유럽의 복잡한 관계는 보수당에서 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장기집권 기간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다.
1)보수당 장기 집권과 유럽통합
대처 수상의 집권은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를 향한 거대한 정책적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대처 수상은 유럽공동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일례로 영국은 유럽통합이 영국의 복지 국가 축소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려하였다.
유럽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대처수상의 영국이 유럽단일의정서 SEA(Single European Act) :이조약이 발효됨으로서 유럽안의 상품, 서비스의 수출입과 노동시장이 상호간 완전히 개방됨
에 동의하게 되는데 이유는 유럽 통합이 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 단일 시장의 형성은 상품과 서비스는 물론 생산 요소인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계획이었던 만큼 영국에서 실현한 시장 경제 중심의 사회를 유럽 단위에서 실현할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대처에 이어 수상에 오른 메이저 영국 정부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대해 경제통화연합과 1989년 사회 헌장을 거부할 수 있다는 조건을 인정받고서야 유럽 공동체에 동참하였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영국 보수당 정부는 대영 제국의 세계적 영예를 상징하는 파운드화를 포기할 수 없었고 경제사회정책에 있어 영국의 의회 주권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보수당은 1997년에 이어 2001년과 2005년 선거에서 연거푸 집권에서 실패하였다. 메이저와 스미스, 그리고 하워드 모두 너무나 반 유럽적인 국수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1998년 설립된 연합 왕국 독립당은 국수주의적 극우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극단적인 정치세력은 영국이 즉각 유럽 연합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2)노동당의 재기와 유럽통합
1997년 집권에 성공한 블레어의 노동당은 유럽문제에 있어 보다 현실적인 노선을 채택하였다. 예를 들어 유럽 경제 통화 연합, 즉 단일 화폐에 블레어 정부는 영국이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영국이 지속적으로 단일 화폐를 거부한다면 유럽의 금융 중심이 런던에서 대륙 쪽으로 서서히 이동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영국인들은 여전히 파운드를 포기하는데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며 자국경제정책이 브뤼셀이나 프랑크푸르트(유럽중앙은행)에서 결정된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에 비해서 훨씬 친 유럽적으로 보다 현실적인 외교 노선을 걸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전통적인 정책에 따라 연방적인 유럽의 형성에 반대하는 입장이며, 유럽의 심화보다는 유럽의 확대를 더욱 선호하였다.
영국은 유럽공동체에 가입한지 30년 이상이 흘렀지만 여전히 유럽과 민족의 상호관계를 상당히 모순적이고 상충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영국의 특징은 양대 정당 내에 유럽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 경쟁 및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당은 1990년대 후반부터 집권당으로 보다 유연하고 현실적인 유럽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가변적인 국민 정서나 정치, 문화적 요인을 무시할 수 없는 어려운 입장에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민족갈등을 통해 본 유럽 통합
1. 유럽 연합 이전 근대 국가 형성과정에 따른 프랑스, 독일의 관계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독일 두 국가는 국가 형성 이전 시기부터 오랜 반목을 거듭해 왔다. 기원전부터 라인 강을 경계로 하여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온 갈리아 족과 게르만 족의 구별을 통해 민족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게르만 족의 이동에 따른 직, 간접적인 문화 유입이 있었지만,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 사후 베르
윌슨은 야당의 리더로서 1971년 10월 보수당정부의 유럽공동체 가입 안에 대해 국민투표에 부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공동체 가입에 대해 반대투표지침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1974년 2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영국의 공동체 가입에 대해 비판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영국의 공동체 예산에 대한 기여가 너무 과다하게 책정되었고 선거 국면에서는 세계경제 위기로 인한 물가상승이나 사회적 분쟁 등이 모두 공동체 가입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다른 한편 노동당의 좌파가 주장하길 유럽공동체는 의회의 통제, 즉 민주적인 통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비민주적 기구라며 탈퇴론에 의견을 모았다. 또한 이들은 영국의 생산원가가 너무 높아 경쟁력이 부족하며 노동이 자유롭게 이동하면 영국노동자의 권익이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하여 경제사회정책의 자율성을 포기하면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해진다는 논리를 폈다. 윌슨 노동당정부는 가입조건의 재협상을 요구하였지만 애초 주장하였던 근본적인 조약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1975년 6월 5일 국민투표를 통해 영국의 공동체 참여 여부를 물었는데 64.5%의 투표율에 투표자의 67.2%가 대폭적으로 찬성하는 결과를 얻었다.
유럽에 참여를 거부하였던 영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 거의 20여 년을 공동체 가입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반대로 문이 닫혀있었고 다음으로 영국 국내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이견이 분분하여 국민 투표라는 비상수단까지 동원해야 하였다. 그러나 영국 역시 늦은 것은 사실이지만 상당부분 정치세력의 유럽화가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1970년대 후반 영국의 주요 정당은 모두 유럽공동체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영국은 유럽공동체에 동참함으로써 영국의 국익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진흥할 수 있다는 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4.제동자로서 영국
영국과 유럽의 복잡한 관계는 보수당에서 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장기집권 기간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다.
1)보수당 장기 집권과 유럽통합
대처 수상의 집권은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를 향한 거대한 정책적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대처 수상은 유럽공동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일례로 영국은 유럽통합이 영국의 복지 국가 축소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우려하였다.
유럽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대처수상의 영국이 유럽단일의정서 SEA(Single European Act) :이조약이 발효됨으로서 유럽안의 상품, 서비스의 수출입과 노동시장이 상호간 완전히 개방됨
에 동의하게 되는데 이유는 유럽 통합이 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 단일 시장의 형성은 상품과 서비스는 물론 생산 요소인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계획이었던 만큼 영국에서 실현한 시장 경제 중심의 사회를 유럽 단위에서 실현할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대처에 이어 수상에 오른 메이저 영국 정부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대해 경제통화연합과 1989년 사회 헌장을 거부할 수 있다는 조건을 인정받고서야 유럽 공동체에 동참하였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영국 보수당 정부는 대영 제국의 세계적 영예를 상징하는 파운드화를 포기할 수 없었고 경제사회정책에 있어 영국의 의회 주권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보수당은 1997년에 이어 2001년과 2005년 선거에서 연거푸 집권에서 실패하였다. 메이저와 스미스, 그리고 하워드 모두 너무나 반 유럽적인 국수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1998년 설립된 연합 왕국 독립당은 국수주의적 극우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극단적인 정치세력은 영국이 즉각 유럽 연합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2)노동당의 재기와 유럽통합
1997년 집권에 성공한 블레어의 노동당은 유럽문제에 있어 보다 현실적인 노선을 채택하였다. 예를 들어 유럽 경제 통화 연합, 즉 단일 화폐에 블레어 정부는 영국이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영국이 지속적으로 단일 화폐를 거부한다면 유럽의 금융 중심이 런던에서 대륙 쪽으로 서서히 이동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영국인들은 여전히 파운드를 포기하는데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며 자국경제정책이 브뤼셀이나 프랑크푸르트(유럽중앙은행)에서 결정된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에 비해서 훨씬 친 유럽적으로 보다 현실적인 외교 노선을 걸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전통적인 정책에 따라 연방적인 유럽의 형성에 반대하는 입장이며, 유럽의 심화보다는 유럽의 확대를 더욱 선호하였다.
영국은 유럽공동체에 가입한지 30년 이상이 흘렀지만 여전히 유럽과 민족의 상호관계를 상당히 모순적이고 상충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영국의 특징은 양대 정당 내에 유럽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 경쟁 및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당은 1990년대 후반부터 집권당으로 보다 유연하고 현실적인 유럽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가변적인 국민 정서나 정치, 문화적 요인을 무시할 수 없는 어려운 입장에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민족갈등을 통해 본 유럽 통합
1. 유럽 연합 이전 근대 국가 형성과정에 따른 프랑스, 독일의 관계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독일 두 국가는 국가 형성 이전 시기부터 오랜 반목을 거듭해 왔다. 기원전부터 라인 강을 경계로 하여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온 갈리아 족과 게르만 족의 구별을 통해 민족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게르만 족의 이동에 따른 직, 간접적인 문화 유입이 있었지만,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 사후 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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