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로마
●역사적 배경
●역사
●사회
●정치
●문화
●기술
●역사적 배경
●역사
●사회
●정치
●문화
●기술
본문내용
도 즐겼다. 로마에는 핸드볼과 비슷한 구기 종목도 있었다. 주사위 놀이, 보드 게임, 도박도 매우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여성들은 이런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저녁 잔치에서 음악, 춤, 시 낭송과 같은 오락을 즐겼다. 평민들은 클럽이나 모임에서 비슷한 잔치를 열기도 했는데, 보통 오락을 즐기는 저녁 식사란 후원을 받아 선술집에서 여는 모임을 뜻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장난감을 가지고 혹은 목마 넘기를 하며 놀았다
검투는 인기있는 오락이었다. 검투사는 죽거나 혹은 여러가지 시나리오에 따라 갖가지 무기를 들고 "첫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검투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는데, 황제의 손짓으로 경기의 결과를 마무리지었다. 영화에 나오는 모습과 달리, 여러 전문가들은 검투사를 죽이라는 손 동작은 "엄지손가락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 손짓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르지만, 어떤 전문가는 승자 쪽으로 주먹을 들어올렸다가 엄지 손가락을 위로 올려서 패자의 죽음을 명령했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지 않고 주먹을 들어올리면 살려주라는 뜻이었다고 보고 있다. 동물을 보여주는 것도 인기 있었는데, 외국의 동물을 데려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투수사와 싸움을 시키기도 하였다. 죄수나 검투사를 무장하거나 맨몸으로 경기장에 놓고 동물을 풀기도 하였다.
대경기장(circus maximus)도 로마에서 인기있는 장소였는데, 주로 경마나 전차 경주를 벌이는 곳이며, 경기장에 물을 채워 가상 해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는 그 밖에도 여러가지 행사가 많았다. 이 경기장은 38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므로, 로마 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이곳에 왔을 것이다. 대경기장의 경주로 한가운데에는 각각 일곱 개의 커다란 달걀과 일곱 개의 돌고래가 있는 신전이 둘 있었는데, 선수가 한 바퀴 돌때마다 일곱 중 하나씩 없애서 횟수를 표시했다. 스포츠 말고도 대경기장은 시장과 도박판이기도 했다. 황제 등 정부 고위인사도 대경기장 경기를 관람했는데, 경기장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고위 인사, 기사, 그 밖에 경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의 예약석에 앉았다. 황제가 특정 팀을 좋아하는 것도 부적절한 일로 여겨졌다. 대경기장은 기원전 600년에 생겼으며, 천년이 넘도록 이어지다 기원후 549년에 마지막 경마 경기가 치뤄진 후 문을 닫았다.
●기술
고대 로마는 인상적인 기술적 업적을 남겼으나, 그 성과는 중세 시대에 잊혀지고 말았다. 로마의 여러 실용적인 기술 혁신은 이전의 그리스의 것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의 공학 기술은 군사 관련 기술과 더불어 로마의 우수한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야이며, 도로, 교량, 수도관, 목욕탕, 극장, 경기장을 건설하는데 기여했다. 콜로세움, 퐁 뒤 가르, 판테온 등 여러 유적이 아직도 로마의 공학과 문화의 증거로 남아있다.
로마는 특히 건축으로 유명하였다. 로마 건축은 그리스 건축과 더불어 고전 건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로마 건축은 그리스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로마는 그리스의 엄밀하고 정격적인 설계와 비례를 차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둥과 주두의 배열 방식(오더)인 복합식(composite order)과 토스카나식(Tuscan order) 그리고 에트루리아의 아치에서 배워온 돔 외에는 공화정 말기까지 별다른 건축적 성과가 없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서 콘크리트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콘크리트는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발명되었다. 이것은 화산회로 만든 강력한 시멘트로, 대리석을 밀어내고 로마의 주요 건축 자재가 되었으며, 여러 건축 방식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기원전 1세기에 비트루비우스가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완벽한 건축 저작인 건축론을 썼다.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는 기원전 40년경 시리아(혹은 이집트)에서 발명된 취관(glassblowing)를 이용하게 되었다. 모자이크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리스 원정 당시 견본을 가져오면서 전래되었다.
콘크리트 덕분에 튼튼한 포장도로인 로마 도로를 깔 수 있게 되었는데, 상당수 로마 도로는 로마가 멸망한지 천 년 뒤에도 계속 쓰였다. 광대하고 효율적인 제국 전역의 도로망은 로마의 패권과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로마 도로는 전체적으로 5만 마일에 달하였고, 변방의 도로는 군사공병 기술자가 축조하였는데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비트루비우스 저서 12권 1장에 있는 공법을 보면, 맨 아래 기초로 큰 돌층과 부스러기층을 번갈아 깔고, 그 위에 모래층을 펴고, 맨 위에는 다각형 큰 돌의 상부를 갈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덮는 것이라고 한다. 원래 로마 도로는 로마 군단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건설한 도로였다. 그러나 이 대로는 로마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교역의 중심지인 로마의 위상을 굳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로마 정부는 역참 제도를 운영하여, 도로 일정한 간격마다 여행자들이 쉴 곳을 제공했으며 필요한 지역에 다리를 건설하여 24시간에 800km를 이동할 수 있는 파발 체제를 마련했다
로마는 수많은 수도관을 건설하여 도시와 산업 지역, 농경지에 물을 공급했다. 로마 시에는 총 길이가 350km에 달하는 11개의 수도관이 있었다. 수도관은 대부분 지하에 매설되어 있었으며, 아치 수도교는 매우 적었다. 때로는 50m 높이 차가 있는 수도관이 연결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사이펀으로 물을 끌어올렸다. 로마인은 위생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위생과 사교 목적의 공공 목욕탕(termae)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여러 가옥에는 수세식 변기와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 대하수도(cloaca maxima)가 있어 늪지를 배수하고 티베리스 강으로 폐수를 처리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상하수도의 납으로 된 수도관 때문에 납 중독이 퍼져 출산율이 저하되고 로마 사회가 쇠퇴하면서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추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납 함유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수도관은 폐쇄되지 않아 계속 물이 흘러 각 가정과 공공 시설의 배수구로 빠져나갔으며, 수도 꼭지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검투는 인기있는 오락이었다. 검투사는 죽거나 혹은 여러가지 시나리오에 따라 갖가지 무기를 들고 "첫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검투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는데, 황제의 손짓으로 경기의 결과를 마무리지었다. 영화에 나오는 모습과 달리, 여러 전문가들은 검투사를 죽이라는 손 동작은 "엄지손가락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 손짓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르지만, 어떤 전문가는 승자 쪽으로 주먹을 들어올렸다가 엄지 손가락을 위로 올려서 패자의 죽음을 명령했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지 않고 주먹을 들어올리면 살려주라는 뜻이었다고 보고 있다. 동물을 보여주는 것도 인기 있었는데, 외국의 동물을 데려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투수사와 싸움을 시키기도 하였다. 죄수나 검투사를 무장하거나 맨몸으로 경기장에 놓고 동물을 풀기도 하였다.
대경기장(circus maximus)도 로마에서 인기있는 장소였는데, 주로 경마나 전차 경주를 벌이는 곳이며, 경기장에 물을 채워 가상 해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는 그 밖에도 여러가지 행사가 많았다. 이 경기장은 38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므로, 로마 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이곳에 왔을 것이다. 대경기장의 경주로 한가운데에는 각각 일곱 개의 커다란 달걀과 일곱 개의 돌고래가 있는 신전이 둘 있었는데, 선수가 한 바퀴 돌때마다 일곱 중 하나씩 없애서 횟수를 표시했다. 스포츠 말고도 대경기장은 시장과 도박판이기도 했다. 황제 등 정부 고위인사도 대경기장 경기를 관람했는데, 경기장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고위 인사, 기사, 그 밖에 경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의 예약석에 앉았다. 황제가 특정 팀을 좋아하는 것도 부적절한 일로 여겨졌다. 대경기장은 기원전 600년에 생겼으며, 천년이 넘도록 이어지다 기원후 549년에 마지막 경마 경기가 치뤄진 후 문을 닫았다.
●기술
고대 로마는 인상적인 기술적 업적을 남겼으나, 그 성과는 중세 시대에 잊혀지고 말았다. 로마의 여러 실용적인 기술 혁신은 이전의 그리스의 것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의 공학 기술은 군사 관련 기술과 더불어 로마의 우수한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야이며, 도로, 교량, 수도관, 목욕탕, 극장, 경기장을 건설하는데 기여했다. 콜로세움, 퐁 뒤 가르, 판테온 등 여러 유적이 아직도 로마의 공학과 문화의 증거로 남아있다.
로마는 특히 건축으로 유명하였다. 로마 건축은 그리스 건축과 더불어 고전 건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로마 건축은 그리스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로마는 그리스의 엄밀하고 정격적인 설계와 비례를 차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둥과 주두의 배열 방식(오더)인 복합식(composite order)과 토스카나식(Tuscan order) 그리고 에트루리아의 아치에서 배워온 돔 외에는 공화정 말기까지 별다른 건축적 성과가 없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서 콘크리트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콘크리트는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발명되었다. 이것은 화산회로 만든 강력한 시멘트로, 대리석을 밀어내고 로마의 주요 건축 자재가 되었으며, 여러 건축 방식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기원전 1세기에 비트루비우스가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완벽한 건축 저작인 건축론을 썼다.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는 기원전 40년경 시리아(혹은 이집트)에서 발명된 취관(glassblowing)를 이용하게 되었다. 모자이크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리스 원정 당시 견본을 가져오면서 전래되었다.
콘크리트 덕분에 튼튼한 포장도로인 로마 도로를 깔 수 있게 되었는데, 상당수 로마 도로는 로마가 멸망한지 천 년 뒤에도 계속 쓰였다. 광대하고 효율적인 제국 전역의 도로망은 로마의 패권과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로마 도로는 전체적으로 5만 마일에 달하였고, 변방의 도로는 군사공병 기술자가 축조하였는데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비트루비우스 저서 12권 1장에 있는 공법을 보면, 맨 아래 기초로 큰 돌층과 부스러기층을 번갈아 깔고, 그 위에 모래층을 펴고, 맨 위에는 다각형 큰 돌의 상부를 갈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덮는 것이라고 한다. 원래 로마 도로는 로마 군단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건설한 도로였다. 그러나 이 대로는 로마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교역의 중심지인 로마의 위상을 굳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로마 정부는 역참 제도를 운영하여, 도로 일정한 간격마다 여행자들이 쉴 곳을 제공했으며 필요한 지역에 다리를 건설하여 24시간에 800km를 이동할 수 있는 파발 체제를 마련했다
로마는 수많은 수도관을 건설하여 도시와 산업 지역, 농경지에 물을 공급했다. 로마 시에는 총 길이가 350km에 달하는 11개의 수도관이 있었다. 수도관은 대부분 지하에 매설되어 있었으며, 아치 수도교는 매우 적었다. 때로는 50m 높이 차가 있는 수도관이 연결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사이펀으로 물을 끌어올렸다. 로마인은 위생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위생과 사교 목적의 공공 목욕탕(termae)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여러 가옥에는 수세식 변기와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 대하수도(cloaca maxima)가 있어 늪지를 배수하고 티베리스 강으로 폐수를 처리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상하수도의 납으로 된 수도관 때문에 납 중독이 퍼져 출산율이 저하되고 로마 사회가 쇠퇴하면서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추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납 함유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수도관은 폐쇄되지 않아 계속 물이 흘러 각 가정과 공공 시설의 배수구로 빠져나갔으며, 수도 꼭지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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