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조선일보,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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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하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일제하 민영신문의 등장
1. 조선일보
2. 동아일보

Ⅲ. 일제하의 언론통제와 신문 기사 압수
1. 조선일보
2. 동아일보

Ⅳ. 민족지 논쟁의 민영신문

Ⅴ. 일제하 민영신문에 대한 평가

Ⅵ. 결 론

본문내용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자유, 지적 발달에 이어 세 번째는 정치 발전을 들 수 있다. 신문이 제4부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신문이 정부의 예속이나 선전 도구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하게 되었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이라는 민간인이 발행했지만 전적으로 정부의 보조에 의존했기 때문에 전술한 정파지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이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불편부당을 내세우고 정부와 관리들을 비판하자 정부는 독립신문에 부여했던 보조금과 각종 특혜를 철회했다. 일제하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지주 출신의 김성수, 방응모에 의해 재정을 안정시켰지만, 그 자본은 일제의 수탈적 식민지 개발정책에 조응하여 확보한 것이기 때문에 일제하의 정치력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네 번째 상황 변인은 경제 발전이다. 신문은 모든 매체 가운데서 소비자 측면에서는 가장 비싼 편에 속한다. 신문 구독료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구독할 만한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독립신문이 나올 당시만 해도 문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이 모두 신문을 사볼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매스 신문 시대라고 할 수 있는 2~3만 부는 넘어선 상황이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상업주의적 보도 형식의 읽을거리를 기사로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신문의 발행부수가 많아짐에 따라 규모의 경제에 의해 신문 가격이 적정 수준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다섯 번째 상황 변인은 사회 발전이다. 사회 발전은 도시화를 의미한다. 정치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다니엘 러너에 의하면, 신문 발달의 선행 변인으로 문자 해득률과 도시화를 든다. 한국의 도시화 비율은 1920년 도시 인구 3.4%에 불과했고 1940년대에 가서야 10%를 넘어섰다. 신문은 도시화->문자 해득률->신문 구독->정치, 경제 발전에서 다시 도시화로 이어지는 데에 한 역할을 담당한다. 일제하의 경제 개발은 이러한 신문의 발달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역시 이러한 득을 보았을 것이다. 일제 초기 때에는 민중들의 호응을 위해 애국지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경영진들의 의도는 아니었다. 신문사 실무진들의 강력한 항일투쟁의 모습이 기사로 나타난 것이다. 오히려 경영진들은 신문사 유지를 위해서 이러한 기자들을 해고하는 일도 많이 있었다.
신문 발달에 필요한 여섯 번째 상황 변인은 기술 발달이다. 일제하에서도 개화기 때와 마찬가지로 신문을 인쇄하기 위한 기술은 일본에서 들여다 쓰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이 일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타협적인 모습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광무신문지법에 의해 민영신문을 출간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도권 하에서 타협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그러한 제한적 모습의 우파 민족주의 민족지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Ⅵ. 결 론
역사나 언론사의 연구에서 과거에 일어난 사실만을 가지로 현재의 시점에서 결과만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검토하여 왜 그런 행위(보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이완용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하여 그의 배신행위를 들추어내어 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왜 그가 그렇게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라도 제2, 제3의 이완용 같은 인물이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채 개인이나 결과만을 가지고 나무라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나 언론사 연구의 올바른 방법은 당시 상황을 분석하여 그것을 현재 바로잡고 미래에는 그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정진석은 역사의 연구란 궂은일이건 좋은 일이건 일단 그 실상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에 이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제하의 민족 언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항일로만 일관할 수 없었던 만큼 부끄러운 친일 행위가 있었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부끄러운 과거라도 이를 정확히 밝혀야 하겠지만 이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있어서는 민족 언론의 존립 자체가 친일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민족 언론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려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일제하에서 보수 민영신문도 엘리트주의와 평화주의를 고집했는데 이것은 일제의 가혹한 통제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총독부에서는 문화정치를 한다고 선전했지만 그것은 극히 제한된 속에서 민족분열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사회운동세력, 반제 항일운동 세력에 대한 정보파악과 단속 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수준의 것이었다. 일제하의 강압정치 하에서 주식회사 체제의 상업주의 언론이 민중주의와 폭력주의를 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또한 동아일보의 김성수와 조선일보의 방응모의 자본은 일제의 수탈적 식민지 개발정책에 조응하여 확보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논지에는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항일적인 기자들을 강제해고하고, 그들의 지난날의 고통을 오늘 자신들의 영광으로 돌리는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보면 마음이 씁쓸해질 때가 있다.
【 참고문헌 】
김민환. (2005). 한국 언론사 개정2판. 나남.
최민지. (1984). 일제하 민족언론사론. 일월서각.
이상철. (1999). 신문의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이상철. (1992). 언론발달사. 일지사
리용필. (1993). 조선신문100년사. 사계절.
조선일보사. (2004). 조선일보 역사 단숨에 읽기 1920~. 커뮤니케이션북스.
정진석. (1998).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 LG상남언론재단.
최준. (1982). 한국 신문사. 일조각
-참고 사이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002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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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0.01.21
  • 저작시기2009.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76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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