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徐居正의 생애와 그의 역사인식
3.《東國通鑑》의 편찬
1)《東國通鑑》의 편찬과정
2)《東國通鑑》의 편찬 배경
3)《東國通鑑》의 내용연구
4)《東國通鑑》의 서술체계와 史論
4.《東國通鑑》의 史學史的 意義
5. 맺음말
2. 徐居正의 생애와 그의 역사인식
3.《東國通鑑》의 편찬
1)《東國通鑑》의 편찬과정
2)《東國通鑑》의 편찬 배경
3)《東國通鑑》의 내용연구
4)《東國通鑑》의 서술체계와 史論
4.《東國通鑑》의 史學史的 意義
5. 맺음말
본문내용
이다. 徐居正도 史論을 썼으며 다른 史官도 이를 쓴 것으로 보인다. 찬자 자신들이 쓴 史論의 성격은 춘추대의론에 입각하여 명교를 존중하고, 절의를 숭상하고, '亂臣賊子'를 성토하고 奸諛를 筆誅 남의 허물이나 죄를 글로 써서 꾸짖음.
하고자 하는 것이 주지를 이루고 있다.
기존의 사서에서도 위와 같은 취지의 史論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史論이 전보다 한층 경직된 褒貶이 가해지고 있다는 데 차이점이 발견된다. 첫째, 名敎를 존중하는 사론으로 중국에 지성으로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했거나 사대를 소흘히 한 행적은 철저히 비판되고 있다. 둘째, 綱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이른다.
의 윤리를 잘 지킨 인간상으로 기자, 김보당, 조위총, 박제상, 김흠운, 계백, 경순왕자, 한유한 등이 칭송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공리를 배격하고 인의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다. 불교 도교 민간신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은 기왕에도 있었으나, 고려 太祖의 숭불정책에 대해서는 별반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太祖의 八關會 실시, 신라의 三寶에 대한 물음, ‘訓要十條’ 등이 모두 비난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箕子朝鮮과 그 후계자인 마한, 그리고 신라의 역사적 위치를 높이고, 檀君朝鮮 고구려백제발해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추고 있다.
4.《東國通鑑》의 史學史的 意義
《東國通鑑》은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세력과 정계에 갓 진출한 신진 사람이 어느 정도는 정치적 균형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추구하였던 成宗시대 중엽에 완성된 최초의 官撰通史이다. 이런《東國通鑑》의 意義를 살펴보자면 첫째, 國初 이래 활발하게 진행되던 역사의 官撰 사업이 일단락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훈구파와 사림파가 최초로 합작 서술한 역사서이자, 훈구파의 마지막 역사서이며 사림파 최초의 역사서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훈구파와 사림파가 만족할 수 없는 사서였다. 셋째, 檀君朝鮮 이래 고려 말까지 通史로서 체계화한 사서라는 점이다.
《東國通鑑》은 조선초기의 역사의식을 담고 있고 조선초기의 발달된 역사정리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원문처럼 사용되면서 조선 초기 사학사의 핵심이라는 큰 意義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맺음말
지금까지《東國通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는데 이로 인해《東國通鑑》의 가치성과 그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徐居正은《東國通鑑》을 편찬하면서 ‘治興과 亂亡은 지나간 것에서 거울을 삼을 것이니, 거짓으로 미화하지 말고 악한 일을 감추지 말며, 美惡을 장래에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는 곧 사실 그대로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는 것이다. 徐居正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東國通鑑》을 서술했다. 비록《東國通鑑》이 사대적 이라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당시의 상황이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東國通鑑》의 사대적 이라는 단점은 우리들의 주체적 역사의식으로 절충하면서 사학사적 고찰을 통해《東國通鑑》의 내용에 접근해 간다면 충분히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정구복,〈東國通鑑의 史學史的 考察〉,《韓國史硏究21집 22집》, 韓國史硏究會, 1978.
한영우,〈東國通鑑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 (上), (下)〉,《韓國學報》15집 16집, 一志社, 1979.
전덕재,〈동국세년가東國通鑑〉,《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창작과비평사, 1994.
정두희,〈朝鮮前期의 歷史認識〉,《韓國史學史의 硏究》, 을유문화사, 1985.
《한국사26권-조선초기의 문화Ⅰ》, 국사편찬위원회, 1995
《국역東國通鑑》,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
하고자 하는 것이 주지를 이루고 있다.
기존의 사서에서도 위와 같은 취지의 史論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史論이 전보다 한층 경직된 褒貶이 가해지고 있다는 데 차이점이 발견된다. 첫째, 名敎를 존중하는 사론으로 중국에 지성으로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했거나 사대를 소흘히 한 행적은 철저히 비판되고 있다. 둘째, 綱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이른다.
의 윤리를 잘 지킨 인간상으로 기자, 김보당, 조위총, 박제상, 김흠운, 계백, 경순왕자, 한유한 등이 칭송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공리를 배격하고 인의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다. 불교 도교 민간신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은 기왕에도 있었으나, 고려 太祖의 숭불정책에 대해서는 별반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太祖의 八關會 실시, 신라의 三寶에 대한 물음, ‘訓要十條’ 등이 모두 비난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箕子朝鮮과 그 후계자인 마한, 그리고 신라의 역사적 위치를 높이고, 檀君朝鮮 고구려백제발해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추고 있다.
4.《東國通鑑》의 史學史的 意義
《東國通鑑》은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세력과 정계에 갓 진출한 신진 사람이 어느 정도는 정치적 균형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추구하였던 成宗시대 중엽에 완성된 최초의 官撰通史이다. 이런《東國通鑑》의 意義를 살펴보자면 첫째, 國初 이래 활발하게 진행되던 역사의 官撰 사업이 일단락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훈구파와 사림파가 최초로 합작 서술한 역사서이자, 훈구파의 마지막 역사서이며 사림파 최초의 역사서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훈구파와 사림파가 만족할 수 없는 사서였다. 셋째, 檀君朝鮮 이래 고려 말까지 通史로서 체계화한 사서라는 점이다.
《東國通鑑》은 조선초기의 역사의식을 담고 있고 조선초기의 발달된 역사정리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원문처럼 사용되면서 조선 초기 사학사의 핵심이라는 큰 意義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맺음말
지금까지《東國通鑑》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는데 이로 인해《東國通鑑》의 가치성과 그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徐居正은《東國通鑑》을 편찬하면서 ‘治興과 亂亡은 지나간 것에서 거울을 삼을 것이니, 거짓으로 미화하지 말고 악한 일을 감추지 말며, 美惡을 장래에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는 곧 사실 그대로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는 것이다. 徐居正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東國通鑑》을 서술했다. 비록《東國通鑑》이 사대적 이라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당시의 상황이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東國通鑑》의 사대적 이라는 단점은 우리들의 주체적 역사의식으로 절충하면서 사학사적 고찰을 통해《東國通鑑》의 내용에 접근해 간다면 충분히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정구복,〈東國通鑑의 史學史的 考察〉,《韓國史硏究21집 22집》, 韓國史硏究會, 1978.
한영우,〈東國通鑑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 (上), (下)〉,《韓國學報》15집 16집, 一志社, 1979.
전덕재,〈동국세년가東國通鑑〉,《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창작과비평사, 1994.
정두희,〈朝鮮前期의 歷史認識〉,《韓國史學史의 硏究》, 을유문화사, 1985.
《한국사26권-조선초기의 문화Ⅰ》, 국사편찬위원회, 1995
《국역東國通鑑》,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