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저자 사마천
2. 사마천의 사학사상
(1) 역사 변혁관
(2) 소박유물론
(3) 인민에의 동정, 역사에 대한 인민의 작용 인정
(4) 봉건전제의 잔학 난폭한 흑막을 폭로함
3. 사기열전의 특성
(1) 고대사학의 확립
(2) 객관적 사료
(3) 기전체
4. 사기열전의 구성
(1) 본기
(2) 세가
(3) 열전
(4) 표
(5) 서
5. 작품 내용요약 및 분석
6. 중국역사의 진정한 통일
7. 사기열전과 한서의 비교
8. 사기열전의 영향과 의의
(1) 사기열전의 현대적 영향
(2) 사기열전의 의의
9. 결론
2. 사마천의 사학사상
(1) 역사 변혁관
(2) 소박유물론
(3) 인민에의 동정, 역사에 대한 인민의 작용 인정
(4) 봉건전제의 잔학 난폭한 흑막을 폭로함
3. 사기열전의 특성
(1) 고대사학의 확립
(2) 객관적 사료
(3) 기전체
4. 사기열전의 구성
(1) 본기
(2) 세가
(3) 열전
(4) 표
(5) 서
5. 작품 내용요약 및 분석
6. 중국역사의 진정한 통일
7. 사기열전과 한서의 비교
8. 사기열전의 영향과 의의
(1) 사기열전의 현대적 영향
(2) 사기열전의 의의
9. 결론
본문내용
정을 소개하고 있다. 전영은 항우의 논공행상에서 반발하여 독립하여 제왕이 되었으나 항우에게 패해 죽는다. 전횡은 전영의 동생으로 전영의 아들 전광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재상이 되어 국사를 도맡았다. 후에 싸움에 져 섬으로 도망갔으나 한나라 왕의 부름을 받고 치욕스럽게 느껴 목을 찌르고 자살했다.
樊역膝灌列傳 한나라 개국공신이며 장수인 번쾌, 역상, 하우영, 관영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영웅이 되었다
張丞相列傳 漢나라 명재상인 張蒼과, 강직한 성격으로 죽음도 불사하고 황제에게 직간을 잘하여 蕭何,曺參도 두려워 할 정도의 재상 周昌을 다뤘다. 그러나 황제도 아량을 보임으로서 군신간의 보이지 않는 신뢰를 엿볼 수 있다. 그 외 任敖申屠嘉 등 재상을 지낸 인물들을 기록했다.
麗生陸賈列傳 客편으로, 한고조의 모사 역생 이기(食其)과 육고(陸賈), 초나라의 모신 주건(朱建)의 사적을 담고 있다. 역이기는 패왕 항우를 설득시킬 정도의 담력과 지력의 소유자다.
傅革斤괴成列傳 한고조의 측근 장수 세사람의 전기이다. 부관(傅寬)은 齊를 평정하여 陽陵侯에 봉해졌고, 信武侯 근흡과 괴성후 주설도 높은 관직에 올랐다.
劉敬叔孫通列傳 한나라 건국초기에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劉敬은 長安천도를 진언한 인물이고, 叔孫通은 秦나라 학자로 항우를 따랐다가 유방에게 투항한 인물로 예법을 관장하여 유방으로 하여금 황제의 고귀함을 깨우쳐준 인물이다. 시세와 형세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을 황제에게 알리는 고도의 처세술로 유방의 신임을 얻었다.
季布欒布列傳 계포는 항우의 사람으로 유방이 현상금까지 걸었으나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나 고조가 벼슬까지 내렸다.
후에 명성을 얻어 \"황금 백근을 얻는 것보다 계포 말 한마다 듣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난포는 팽월과 친구지간으로 팽월이 사형당했을 때 황명을 무릅쓰고 그의 시체를 거둔 의협심을 사마천이 기렸다.
袁앙晁錯列傳 원앙은 지나치게 간언을 잘하고 강직하여 주위에 많은 적을 만들어 결국 죽음을 당했으니 太强卽折(너무 강하면 부러진다)의 본보기가 된 인물이다 조조는 상앙의 형법학을 배워 기지가 있고 총명스러웠으나, 원앙과 견원지간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원앙을 죽이려다 오히려 원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권모에 앞장 서지마라, 재앙을 입게 된다\"는 말은 바로 이 두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張釋之馮唐列傳 장택지와 장탕은 文帝 때 벼슬을 지낸 사람들로, 직간으로 황제의 실정을 바로잡고 현군으로 만들었다.
萬石張叔列傳 석분(石奮)은 충성심과 근면으로 만석의 재산을 받아 만석군이라는 호를 얻었다 그 외 장탕, 위관, 직불의, 주인의 사적을 실었다. 周仁은 입이 무겁고 검소하여 황제가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쁨에 대하여 물으면 항상 \"폐하께서 직접 살피십시오\" 라 말하여 남을 헐뜯으려 하지 않았다. 무제가 그를 중히 여겨 노후를 편안하게 보냈다.
田叔列傳 달도 차면 기울며, 사물은 성하면 쇠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며, 오래도록 부귀를 누리게 되면 화가 쌓여 해독을 끼치고 만다. 사마천은 범려가 후세에까지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된 것을 빗대어 후인들을 경계하고 있다.
扁鵲倉公列傳 神醫 편작과 창공의 사적에 대한 기록이다. 두 사람 모두 하늘이 내린 의술을 지녔으나 남의 시기를 받아 화를 입었다. \"여자는 아름답든 못생겼던 궁중에 있으면 시샘을 받고, 선비는 어질고 어질지 않든 간에 조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의심을 받는다\" 사마천이 이 두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아름답고 좋은 것은 다 좋지 못한 불길의 그릇이다\"
오王비列傳 오王 유비는 한고조의 형인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경제가 제후들의 봉토를 깎는 것에 불만하여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멸족을 당한다. 그 후 \"오랑캐와 사귀어 자기집안을 멀리하지마라\"는 말이 생겨났다.
魏其武安侯列傳 위기 후 두영은 한문제 두 왕후의 사촌조카로 7국의 난을 평정하여 위기 후에 제수되었고, 성품이 깨끗하여 황제가 주는 하사금도 받지 않았다. 무안 후 전분은 효경제 황후(왕태후)의 친동생으로 귀한 신분이 아니었으나 위기 후에 빌붙어 온갖 아부로 재상지위에 오르자 축재하고 위기 후의 재산까지 취하려는 인물로, 사마천은 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을 비교하여 군자와 소인배를 나타나고자 했다.
韓長孺列傳 어사대부 韓安國은 字가 長孺다. 그는 재물을 좋아하고 탐하기는 하였으나, 자신보다 청렴하고 현명한 선비들을 추천하여 선비들이 그를 칭찬하고 앙모하였다. 황제도 그를 재목으로 여겨 무안후가 죽자 승상의 자리에 임명하려 했으나 다리를 심하게 절어 다른 사람을 기용했다. 그 후 지위도 떨어지고 소원해져 우울하게 지내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李將軍列傳 명궁수 출신의 李廣은 문제, 경제 무제 때 70여차례에 걸쳐 흉노와 싸워 공을 세워 飛將軍으로까지 불린 장수이다. 그러나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조정대신들에 의해 궁지에 몰려 결국 자진(自盡)하게 된다. 백성들도 울고 남녀노소 모두 그를 슬퍼했다고 한다. 사마천이 변호하다 화를 당하게 된 장수 이릉이 이광의 손자다. 사마천은 이광의 경우를 보고 \"복숭아나 오얏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밑에는 절로 길이 난다\"고 평한다.
匈奴列傳 본래 한나라와 동족인데 오랜 세월이 흘러 적대관계에 있는 흉노족에 관해 적었다. 사마천은 어진 장수를 가려 쓰는 방법을 논하였고, 흉노를 포용하고 화해 정책을 쓰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권세를 얻기 위해 아첨하여 자기주장이 채택되도록 하는 편견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라고 사마천은 말한다.
衛將軍驃騎列傳 大將軍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이 흉노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공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무제의 외척이었기에 드러나는 문제점을 무제의 딸이 부정한것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平津侯主父列傳 당대의 유학자인 평진 후 공손홍과 주보언의 사적을 적었다. 공손홍은 曲學阿世라는 평을 듣고 있듯이 그의 처세술은 가히 일등급이다. 겉으로는 너그러우나 속은 각박하고 남을 의심하고 시기심이 많아, 주보언을 죽이고 동중서를
樊역膝灌列傳 한나라 개국공신이며 장수인 번쾌, 역상, 하우영, 관영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영웅이 되었다
張丞相列傳 漢나라 명재상인 張蒼과, 강직한 성격으로 죽음도 불사하고 황제에게 직간을 잘하여 蕭何,曺參도 두려워 할 정도의 재상 周昌을 다뤘다. 그러나 황제도 아량을 보임으로서 군신간의 보이지 않는 신뢰를 엿볼 수 있다. 그 외 任敖申屠嘉 등 재상을 지낸 인물들을 기록했다.
麗生陸賈列傳 客편으로, 한고조의 모사 역생 이기(食其)과 육고(陸賈), 초나라의 모신 주건(朱建)의 사적을 담고 있다. 역이기는 패왕 항우를 설득시킬 정도의 담력과 지력의 소유자다.
傅革斤괴成列傳 한고조의 측근 장수 세사람의 전기이다. 부관(傅寬)은 齊를 평정하여 陽陵侯에 봉해졌고, 信武侯 근흡과 괴성후 주설도 높은 관직에 올랐다.
劉敬叔孫通列傳 한나라 건국초기에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劉敬은 長安천도를 진언한 인물이고, 叔孫通은 秦나라 학자로 항우를 따랐다가 유방에게 투항한 인물로 예법을 관장하여 유방으로 하여금 황제의 고귀함을 깨우쳐준 인물이다. 시세와 형세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을 황제에게 알리는 고도의 처세술로 유방의 신임을 얻었다.
季布欒布列傳 계포는 항우의 사람으로 유방이 현상금까지 걸었으나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나 고조가 벼슬까지 내렸다.
후에 명성을 얻어 \"황금 백근을 얻는 것보다 계포 말 한마다 듣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난포는 팽월과 친구지간으로 팽월이 사형당했을 때 황명을 무릅쓰고 그의 시체를 거둔 의협심을 사마천이 기렸다.
袁앙晁錯列傳 원앙은 지나치게 간언을 잘하고 강직하여 주위에 많은 적을 만들어 결국 죽음을 당했으니 太强卽折(너무 강하면 부러진다)의 본보기가 된 인물이다 조조는 상앙의 형법학을 배워 기지가 있고 총명스러웠으나, 원앙과 견원지간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원앙을 죽이려다 오히려 원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권모에 앞장 서지마라, 재앙을 입게 된다\"는 말은 바로 이 두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張釋之馮唐列傳 장택지와 장탕은 文帝 때 벼슬을 지낸 사람들로, 직간으로 황제의 실정을 바로잡고 현군으로 만들었다.
萬石張叔列傳 석분(石奮)은 충성심과 근면으로 만석의 재산을 받아 만석군이라는 호를 얻었다 그 외 장탕, 위관, 직불의, 주인의 사적을 실었다. 周仁은 입이 무겁고 검소하여 황제가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쁨에 대하여 물으면 항상 \"폐하께서 직접 살피십시오\" 라 말하여 남을 헐뜯으려 하지 않았다. 무제가 그를 중히 여겨 노후를 편안하게 보냈다.
田叔列傳 달도 차면 기울며, 사물은 성하면 쇠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며, 오래도록 부귀를 누리게 되면 화가 쌓여 해독을 끼치고 만다. 사마천은 범려가 후세에까지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된 것을 빗대어 후인들을 경계하고 있다.
扁鵲倉公列傳 神醫 편작과 창공의 사적에 대한 기록이다. 두 사람 모두 하늘이 내린 의술을 지녔으나 남의 시기를 받아 화를 입었다. \"여자는 아름답든 못생겼던 궁중에 있으면 시샘을 받고, 선비는 어질고 어질지 않든 간에 조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의심을 받는다\" 사마천이 이 두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아름답고 좋은 것은 다 좋지 못한 불길의 그릇이다\"
오王비列傳 오王 유비는 한고조의 형인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경제가 제후들의 봉토를 깎는 것에 불만하여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멸족을 당한다. 그 후 \"오랑캐와 사귀어 자기집안을 멀리하지마라\"는 말이 생겨났다.
魏其武安侯列傳 위기 후 두영은 한문제 두 왕후의 사촌조카로 7국의 난을 평정하여 위기 후에 제수되었고, 성품이 깨끗하여 황제가 주는 하사금도 받지 않았다. 무안 후 전분은 효경제 황후(왕태후)의 친동생으로 귀한 신분이 아니었으나 위기 후에 빌붙어 온갖 아부로 재상지위에 오르자 축재하고 위기 후의 재산까지 취하려는 인물로, 사마천은 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을 비교하여 군자와 소인배를 나타나고자 했다.
韓長孺列傳 어사대부 韓安國은 字가 長孺다. 그는 재물을 좋아하고 탐하기는 하였으나, 자신보다 청렴하고 현명한 선비들을 추천하여 선비들이 그를 칭찬하고 앙모하였다. 황제도 그를 재목으로 여겨 무안후가 죽자 승상의 자리에 임명하려 했으나 다리를 심하게 절어 다른 사람을 기용했다. 그 후 지위도 떨어지고 소원해져 우울하게 지내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李將軍列傳 명궁수 출신의 李廣은 문제, 경제 무제 때 70여차례에 걸쳐 흉노와 싸워 공을 세워 飛將軍으로까지 불린 장수이다. 그러나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조정대신들에 의해 궁지에 몰려 결국 자진(自盡)하게 된다. 백성들도 울고 남녀노소 모두 그를 슬퍼했다고 한다. 사마천이 변호하다 화를 당하게 된 장수 이릉이 이광의 손자다. 사마천은 이광의 경우를 보고 \"복숭아나 오얏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밑에는 절로 길이 난다\"고 평한다.
匈奴列傳 본래 한나라와 동족인데 오랜 세월이 흘러 적대관계에 있는 흉노족에 관해 적었다. 사마천은 어진 장수를 가려 쓰는 방법을 논하였고, 흉노를 포용하고 화해 정책을 쓰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권세를 얻기 위해 아첨하여 자기주장이 채택되도록 하는 편견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라고 사마천은 말한다.
衛將軍驃騎列傳 大將軍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이 흉노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공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무제의 외척이었기에 드러나는 문제점을 무제의 딸이 부정한것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平津侯主父列傳 당대의 유학자인 평진 후 공손홍과 주보언의 사적을 적었다. 공손홍은 曲學阿世라는 평을 듣고 있듯이 그의 처세술은 가히 일등급이다. 겉으로는 너그러우나 속은 각박하고 남을 의심하고 시기심이 많아, 주보언을 죽이고 동중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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