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 정리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미술사 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고 앞의 넓은 평야가 있는 얕은 구릉지대에 분포되어 있다. 축조방법은 분구내부에 매장주체를 횡혈식 석실로 피장하고 분구는 방대형이나 절두 피라미드 형으로 만들었다. 묘실의 위치는 반지하식이나 지상식이고 천정의 형태는 말각조정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묘실 내부는 하나의 우주 공간, 생활공간으로 생각하여 그림이 그려져 있고 기둥, 관대를 설치하였다.
평면형태로는 단실묘, 복실묘, 특수형으로 나눌 수 있다. 단실묘는 석실이 하나 있는 것으로 기본구조가 석실+연도로 되어있다. 석실과 연도가 붙은 방식에 따라 동편연도, 서편연도 중앙연도 단실묘로 나눌 수 있지만 서편연도 단실묘는 거의 없다. 그리고 감실(벽장과 같은 작은 방)이 딸려 있는 경우도 있다. 복실묘는 방이 2대 이상 있는 것으로 전실+측실+현실의 형태가 있고 대표적 유적으로 안악3호분, 도산리 7호묘가 있다. 횡장 전실은 측실 내부를 트고 대신 천장만 구분하는 옆으로 긴 전실의 형태를 가진 것을 말하며 대표적 유적으로 감실총, 고산리 9호분이 있다. 방형 전실은 전실과 주실의 크기가 같은 것으로 평양 역전 벽화분과 연화총이 있다. 그 외 특수형으로는 삼실총, 요동성총, 한 봉토 안에 단실 3개가 있는 형태가 있다.
석실분의 기원은 3세기부터 고구려가 요동, 요서지방으로 진출한 시점에서부터 석실분(중국식 고분)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 대동강 유역의 낙랑의 전기묘제 목관분에서 외부의 봉토분을 후기 묘제 전축분에서 전실을 수용하여 사용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4. 백제고분
백제고분은 조기(원삼국 시대 기원전 1세기-3세기), 전기(한성백제기 3세기-5세기 후반) 후기 (웅진, 사비 475-660년)으로 나눌 수 있다.
조기는 마한지방의 묘제로서 주구 토광묘와 주구묘가 있고 기원이 확실치 않는 즙석식 적석묘가 있다. 주구 토광묘는 토광 윗부분에 눈썹형의 주구가 남아있는 무덤으로 2-3세기 때 유행했던 묘제이다. 대표적 유적으로는 천안 청당동, 공주 하복리 유적, 청주 송절동 유적이 있다. 주구묘는 매장 주체부를 지상식으로 만들고 평면 사각형의 도라을 판 것이다. 대표적 유적으로 서해안을 따라 보령 관창리, 서천 당정리, 익산 영등동, 영광 군동유적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현한 시기는 기원전 1세기로 잡고 있지만 앞으로 더 소급될 가능성이 많다. 또한 이묘제는 일본에 건너가 야요이 시대 중요한 묘제가 되기도 한다. 즙석식 적석묘는 외형상으로는 돌무덤이지만 내부적으로 강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사구위에 돌로 쌓은 사구위에 돌로 쌓은 변형된 형식이다. 시기는 2-3세기이고 대표적 유적으로는 춘천 중도 유적, 연천 삼곤리, 양평 문호리가 있다.
전기(한성기 백제)
크게 목관 봉토분과 적석총이 있다. 목관 봉토분은 3세기 후반 석촌동, 가락동, 일대에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외형상 봉토분이고 평면은 방대형의 분구이고 분구 내 여러 개의 목관, 옹관이 발견되었다. 일제시대 석촌동, 가락동에 수십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다 부서졌다. 대표적 유적으로 가락동 1, 2호분, 석촌동 5호분이 있다.
적석총은 4세기 후반 등장한 설이 가장 유력하고 고구려식 적석총인 순수적석총과 내부를 흙으로 대용한 백제화된 변형식 적석총이 있다. 대표적 유적으로는 순수 적석총으로 석촌동 3호분과 변형 적석총으로 석촌동 4호분, 1호분, 공주 송산리 고분 꼭대기에 있는 계로왕의 가묘로 추정되는 1기가 있다. 석촌동 3호분은 길이 55미터 높이 3.75미터로 3층 방형 계단식 적석총이고 내부구조는 파괴되어 알 수 없다. 규모가 제일 큰 것으로 보아 근초고왕릉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기원문제로는 고구려계 적석총이 나타나는 시기는 4세기 후반인데 반해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것은 기원전 18년으로 상당한 시기차를 보인다. 이 시기차는 고구려계 백제 지배층의 등장은 4세기 이후 고구려계 기마민족이 들어와 백제를 세웠다는 정복왕조설과 백제가 4세기경 강성해지면서 고구려의 강대국의 상징인 적석총을 받아들였다는 학설(박순발 교수님)로 설명할 수 있다.
한편 지방에는 토광묘와 수혈식 석곽묘가 있다.
후기는 다시 공주시기(475-538)와 부여시기(538-660)로 나눌 수 있다.
공주시기는 석실봉토분과 전축분이 있다.
석실봉토분은 내부에 횡혈식 석실을 축조한 방형 궁륭상 천정 석실분이다. 원형 봉분에 동편 연도 단실묘가 주를 이루고 그 규모는 고구려 고분에 비해 작다. 입지는 높지 않는 산 경사면에 위치하고 반 지하식이다. 한성 백제기

키워드

추천자료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0.03.29
  • 저작시기2003.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9488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