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과 부국(현대한국정치사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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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건국과 부국(현대한국정치사강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1장 대한민국의 탄생
제2장 분단에서 전쟁으로
제3장 한국전쟁과 그영향
제4장 이승만 정권의 안정과 동요 그리고 붕괴
제5장 1950년대:맹아의 시기
제6장 4.19혁명, 장면정권 그리고 민주주의의 유산
제7장 부국: 박정희정권과 발전국가의 등장
제8장 유신체제와 그 이후
에필로그 : 박정희정권 어떻게 볼것인가

본문내용

는 파병의 대가로 베트남에서 가급적 최대한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미국과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파병된 한국군이 사용할 물자와 용역은 가급적 한국에서 구입하며 미국이 베트남에서 국제개발처의 자금으로 시행하는 건설 및 구호사업에 소요되는 물자와 용역도 한국에서 구매한다는 등의 경제적 보장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한국은 1965년~1973년 사이 베트남과의 무역에서 약 2억 8,300만 달 러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또 1965년~1972년 사이 한국의 기업들이 벌어들인 수익과 군인과 노동자등이 받은 봉급 및 보상금은 모두 약 7억 5000만 달러에 달했다.
-파병에 대한 반대급부로 미국으로부터 조건이 좋은 공공차관을 다량 도입할 수 있었으며 안보공약이 확고해짐에 따라 상업차관을 얻기도 수월해졌다.
ㅇ수출지향형 지배연합과 발전국가의 물질적 기초의 형성
-대외개방정책의 시행과 한일국교정상화 및 베트남 파병의 성사이후 국내로 들어온 외자는 수입대체형 지배연합대신 수출지향형 지배연합이 한국사회에 군림하게 되었고, 쿠데타와 선거를 통해 물리적 기반과 저앙성의 기초를 마련한 발전국가는 보다 안정된 물적 토대까지 갖추게 되었다.
-상업차관의 도입으로 정부는 내자의 동원분배기관인 은행뿐 아니라 외자의 도입분배권까지 장악하게 되면서 양적으로 안정적인 물적 기초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자본에 대해 우위에 설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구비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소수의 대기업에게 특혜적으로 제공된 저리의 융자는 주로 수입수요를 충당하는데 쓰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하에서의 저리 융자와 외자는 주로 수출을 통해 성과를 내는 기업에게 주어지거나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회기반시설이나 기간산업분야에 투입되었다.
-따라서 똑같이 융자를 둘러싼 특혜의 추구라도 1950년대의 그것은 소비적이었다면 1960년대의 것은 성과에 따른 보상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보다 생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7. 발전국가의 형성과 위기
ㅇ두 번째 승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1966년에 접어들면서 정국은 다시 선거체제에 돌입했다. 1967년 5월11일과 6월8일에 각각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실시되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김종필이 당의장으로 복귀했고, 1967년2월2일 전당대회를 열어 박정희를 제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한일조약 비준파동으로 분열되었던 민중당과 신한당은 1967년 2월8일 신한당의 윤보선과 민중당의 유진오가 각각 대통령후보와 당수직을 나누어 갖는 조건으로신민당으로 통합했다.
-결국 선거는 공화당의 박정희와 신민당의 윤보선으로 대결로 압축되었고 경제개발, 농업대책, 한일관계정상화, 베트남 파병 등과 같은 현정부 정책에 대한 평가가 주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선거결과 박정희가 윤보선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박정희의 선거승리 요인은 저리의 은행융자와 차관을 특정기업에 알선하면서 챙긴 정치자금을 풍성하게 사용한 탓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1차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는 사실이었다.
ㅇ제7대 국회의원 선거
-대선 한 달 뒤인 6월8일 제7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공화당이 50.6%의 득표율로 전체의석의 70.6%인 129석을 얻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신민당은 32.7%의 득표율로 45석을 얻었다. 대중당은 한명이 당선되었다. 이로써 양당제가 한국정치에 다시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이 얻은 129석은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13석 초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화당의 압승은 발전국가의 정당성을 한층 강화시켜주었으며, 4년후의 박정희의 거취문제를 고민하던 공화당에 한줄기 햇살과도 같은 것이었다.
ㅇ삼선개헌(1): 권력연장의 시발점
-반김종필 파벌들은 김종필을 견제하고 박정희의 집권을 유지시켜야만 자신들의 설자리가 생긴다는 것에 공감했기 때문에 연대할 수 있었다. 이는 박정희의 생각과도 맞아떨어져 당안팎의 반김종필 세력이 포스트 박정희를 노리는 김종필파에 대해 쐐기를 박은 것이 삼선개헌이었고 그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친김종필파의 거센 반발이 당을 분란으로 몰고 갔다.
-1968년 5월에 터진 국민복지회사건을 두고 박정희는 이것을 김종필을 다음 대통령후보로 옹립하려는 조직으로 보고 중앙정보부를 동원하여 철퇴를 가하자 김종필이 이에 반발항려 일체의 공직을 사퇴하자 반김종필파는 그 틈을 타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개헌에 착수했다.
-개헌추진파들은 개헌선인 117석보다 4석 많은 121명의 이언들로부터 지지서명을 받아 개헌안을 국회에 체출했다.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야당 또한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면서 통과를 저지하려했으나 결국 개헌안은 9월14일 새벽 국회 제3별관에서 여당단독으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10월17일 유권자의 77.1%가 참여한 국민투표에서 65.1%의 찬성으로 확정되었다.
ㅇ삼선개헌(2): 정치실종의 시발점
-삼선개헌은 의회 및 정당정치가 실종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치에 대한 행정의 추월이 시작되었으며 그 귀결은 행정적 효율성이 정치를 완전히 대체한 유신체제의 수립이었다. 이로써 발전국가의 정당서의 기반이 훼손되기 시작하는 기점이기도 했다.
-삼선개헌 이후 박정희는 정치자금과 중앙정보부를 이용해 당을 직접 지휘하는 친정체제로 운영했다. 먼저 정치자금 수납권한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일원화시킴으로써 공화당은 독자적인 자금조달능력을 상실하였고, 박정희는 당에 대한 확실한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중앙정보부를 정치공작을 통해 당을 통제했다.
ㅇ발전국가의 제1차 위기
-발전국가의 위기는 1968년부터 북한의 군사적 도발로 남북관계가 긴장되고,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 철수, 1970년6월 주한미군 3분의1 감축안이 발표되는 등 한미관계가 갈등하면서 작되었다.
-보다 심각한 위기는 1969년을 정점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했고, 노조나 언론 등 사회내의 각종 세력들이 국가에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안팎으로부터 도전 속에서 1971년 4월27일 치러진 선거에서 야당후보인 김대중을 94만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제8장 유신체제와 그 이후
1. 유신체제
ㅇ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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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9페이지
  • 등록일2010.04.19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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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0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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