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가짜 김일성’론의 내용
1) 김일성 가짜론의 경로·수단
2) ‘가짜 김일성’론의 문제점
2. 북한학계의 ‘김일성신화’의 허구
3. 김일성 ‘항일유격투쟁’의 진상
1)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에의 참가
2)유격대지휘관으로서의 김일성
3) 소련에서의 생활과 귀국 과정
4.‘반공’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5.왜 정부가 반공의 이념적 잣대를 내세웠는가?
6.'반공'으로 민족 해방 운동가를 탄압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자들
7.해방공간
1)좌익의 우세
8.6.25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
9.이승만 정권에게 있어 반공이데올로기
10.그리고 지금...
1) 김일성 가짜론의 경로·수단
2) ‘가짜 김일성’론의 문제점
2. 북한학계의 ‘김일성신화’의 허구
3. 김일성 ‘항일유격투쟁’의 진상
1)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에의 참가
2)유격대지휘관으로서의 김일성
3) 소련에서의 생활과 귀국 과정
4.‘반공’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5.왜 정부가 반공의 이념적 잣대를 내세웠는가?
6.'반공'으로 민족 해방 운동가를 탄압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자들
7.해방공간
1)좌익의 우세
8.6.25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
9.이승만 정권에게 있어 반공이데올로기
10.그리고 지금...
본문내용
헌에 나오지 않는 것이 되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격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적지 않은 증언자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아직 중국에는 김일성과 유격대활동을 같이 한 조선족 및 한족인사들이 여러 명 생존해 있는데, 이들은 ‘가짜 김일성’론을 한결같이 부정하고 있다.
2. 북한학계의 ‘김일성신화’의 허구
과거 남한학계의 김일성 연구가 ‘가짜 김일성’이라는 유령에 매달리면서 진실을 보지 못한 것과는 정반대로 북한학계에서는 그의 활동을 ‘신화화’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외면해 왔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은 그의 권력 강화와 궤를 같이하면서 과장과 왜곡의 길로 치달아왔다. 북한의 역사서들은 김일성이 처음 항일 청소년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했다고 주장하는 1926년 10월을 ‘조선현대사’의 출발로 보고 있으며,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전개된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유격투쟁’을 김일성이 유일적으로 지도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북한의 역사서들은 만주에서의 ‘항일유격투쟁’을 김일성 중심으로 서술하기 위해서 당시 활동했던 많은 고참 유격대지도자들을 분별없이 김일성의 수하 정도로 서술하기도 한다. 이홍광은 김일성보다 6년 연상인 1906년생으로 남만주 최고의 유격대지도자였다. 그는 1933년 9월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의 참모장을 지냈으며 이듬해 11월에는 이 부대의 師長<사장>이 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1936년 4월에 전사하였다. 이홍광은 김일성과 함께 투쟁한적은 없었으나, 그보다 훨씬 전에 명성을 떨쳤으며, 지위도 몇 계급 위인 고참 지도자였다. 그런데 이 이홍광을 『력사사전』은 이렇게 표현한다.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충직한 혁명전사로서 그이께서 조직영도하신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여 열렬히 싸운 항일투사.…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리홍광동지는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항일무장투쟁로선에 무한히 고무되어 혁명투쟁의 길에 나섰다.…그는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을 자기의 뼈와 살로 만들기 위해 불면불휴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대원들을 그이께 충직한 혁명전사로 준비시키기에 온갖 정력을 다 바쳤다.”
김일성 신화화의 극단을 보여주는 이러한 서술은 『력사사전』에 실린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북한역사서들은 일제의 패망과 해방에 대해서도 김일성이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에 맞추어 ‘조선인민혁명군’에게 조국으로의 진격을 명령하여, 이 부대들이 ‘조국해방’에 선봉이 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뒤에 살펴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김일성의 항일유격대는 소련군에 파견되어 있던 일부 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대일전에 참전하지 못했다. 김일성 신화화의 결정판은 1984년에 후계자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이 공식화되면서 이루어졌다. 김정일의 백두산 충생설은 북한에서 다시 한번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김정일이 백두산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김일성이 거처하는 이른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가 백두산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1940년 10월에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간 김일성이 북한 역사서 속에서는 의연히 백두산에서 유격투쟁을 전개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역사서술은 단순한 과장을 넘어서 날조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은 역사적 사실의 수준을 넘어서 신화의 영역으로 조작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화는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른바 ‘주체사관’에 의해서 합리화되었다. 북한의 역사서술은 자주성 실현(계급적 자주성과 민족적 자주성의 실현)관점에서 서술하되 수령의 지도와 대중이 결합되는 지점을 중심적으로 서술하게 된다. 그리고 무오류의 수령이 지도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패배가 없는 승리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게 된다. 그동안주체사관은 ‘항일유격투쟁’을 김일성이 활동했던 동만에 국한해서 서술케 함으로써 북한 역사서들이 전체적인 유격투쟁의 像을 그려내는 것을 막아왔다. 뿐만 아니라 주체사관은 만주에서의 ‘항일유격투쟁’이 중국공산당 지휘 하에 전개된 조·중 연합투쟁이었다는 사실에 침묵함으로써 사실의 왜곡은 물론 이 투쟁이 지닌 국제적 성격도 도외시해 왔다.
3. 김일성 ‘항일유격투쟁’의 진상
1)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에의 참가
김일성이 ‘항일유격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부터였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성 위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근거하여 만주 전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항일유격대 건설이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만주상황 속에서 백두산 산록에 위치한 안도현의 공산청년조직에 관계하고 있던 김일성은 그 지역에서 1932년 4월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중국 구국군 우사령 부대 산하에서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김일성의 이 별동대는 곧 왕청현에서 결성된 왕청 유격대와 합류하였으며 그는 유격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동만 각지의 유격대가 단일편제를 갖추어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1934년 3월 결성)에서 1934년 가을부터 3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주로 빈농·고농 출신으로 이루어져 문맹률이 80%가 넘었던 항일 유격대 속에서 중학까지 수업한 그의 학력은 상대적으로 돋보였으며 거기에 그의 능력이 보태어져 22세의 젊은 나이에 단에 정치위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격대에서의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한때 당시 많은 조선인공산주의자들에게 올가미로 씌어졌던 ‘일제주구’를 의미하는 민생단분자로 몰려 유격구 내 아동학교의 교사로 강등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극복하고 재기하여 1936년 3월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3사 사장이 되었다.
2)유격대지휘관으로서의 김일성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유격투쟁’은 조·중 연합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지도부는 중국공산당이었다. 이러한 지휘체계 때문에 당시 조선혁명에 대한 자신들의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중국혁명에의 복무를 요구하는 중공과 상당한 갈등을
마지막으로 현재의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적지 않은 증언자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아직 중국에는 김일성과 유격대활동을 같이 한 조선족 및 한족인사들이 여러 명 생존해 있는데, 이들은 ‘가짜 김일성’론을 한결같이 부정하고 있다.
2. 북한학계의 ‘김일성신화’의 허구
과거 남한학계의 김일성 연구가 ‘가짜 김일성’이라는 유령에 매달리면서 진실을 보지 못한 것과는 정반대로 북한학계에서는 그의 활동을 ‘신화화’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외면해 왔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은 그의 권력 강화와 궤를 같이하면서 과장과 왜곡의 길로 치달아왔다. 북한의 역사서들은 김일성이 처음 항일 청소년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했다고 주장하는 1926년 10월을 ‘조선현대사’의 출발로 보고 있으며,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전개된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유격투쟁’을 김일성이 유일적으로 지도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북한의 역사서들은 만주에서의 ‘항일유격투쟁’을 김일성 중심으로 서술하기 위해서 당시 활동했던 많은 고참 유격대지도자들을 분별없이 김일성의 수하 정도로 서술하기도 한다. 이홍광은 김일성보다 6년 연상인 1906년생으로 남만주 최고의 유격대지도자였다. 그는 1933년 9월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의 참모장을 지냈으며 이듬해 11월에는 이 부대의 師長<사장>이 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1936년 4월에 전사하였다. 이홍광은 김일성과 함께 투쟁한적은 없었으나, 그보다 훨씬 전에 명성을 떨쳤으며, 지위도 몇 계급 위인 고참 지도자였다. 그런데 이 이홍광을 『력사사전』은 이렇게 표현한다.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충직한 혁명전사로서 그이께서 조직영도하신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여 열렬히 싸운 항일투사.…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리홍광동지는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항일무장투쟁로선에 무한히 고무되어 혁명투쟁의 길에 나섰다.…그는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을 자기의 뼈와 살로 만들기 위해 불면불휴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대원들을 그이께 충직한 혁명전사로 준비시키기에 온갖 정력을 다 바쳤다.”
김일성 신화화의 극단을 보여주는 이러한 서술은 『력사사전』에 실린 항일유격대 지도자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북한역사서들은 일제의 패망과 해방에 대해서도 김일성이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에 맞추어 ‘조선인민혁명군’에게 조국으로의 진격을 명령하여, 이 부대들이 ‘조국해방’에 선봉이 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뒤에 살펴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김일성의 항일유격대는 소련군에 파견되어 있던 일부 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대일전에 참전하지 못했다. 김일성 신화화의 결정판은 1984년에 후계자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이 공식화되면서 이루어졌다. 김정일의 백두산 충생설은 북한에서 다시 한번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김정일이 백두산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김일성이 거처하는 이른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가 백두산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1940년 10월에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간 김일성이 북한 역사서 속에서는 의연히 백두산에서 유격투쟁을 전개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역사서술은 단순한 과장을 넘어서 날조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은 역사적 사실의 수준을 넘어서 신화의 영역으로 조작되어 왔다. 이러한 신화화는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른바 ‘주체사관’에 의해서 합리화되었다. 북한의 역사서술은 자주성 실현(계급적 자주성과 민족적 자주성의 실현)관점에서 서술하되 수령의 지도와 대중이 결합되는 지점을 중심적으로 서술하게 된다. 그리고 무오류의 수령이 지도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패배가 없는 승리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게 된다. 그동안주체사관은 ‘항일유격투쟁’을 김일성이 활동했던 동만에 국한해서 서술케 함으로써 북한 역사서들이 전체적인 유격투쟁의 像을 그려내는 것을 막아왔다. 뿐만 아니라 주체사관은 만주에서의 ‘항일유격투쟁’이 중국공산당 지휘 하에 전개된 조·중 연합투쟁이었다는 사실에 침묵함으로써 사실의 왜곡은 물론 이 투쟁이 지닌 국제적 성격도 도외시해 왔다.
3. 김일성 ‘항일유격투쟁’의 진상
1)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에의 참가
김일성이 ‘항일유격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부터였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성 위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근거하여 만주 전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항일유격대 건설이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만주상황 속에서 백두산 산록에 위치한 안도현의 공산청년조직에 관계하고 있던 김일성은 그 지역에서 1932년 4월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중국 구국군 우사령 부대 산하에서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김일성의 이 별동대는 곧 왕청현에서 결성된 왕청 유격대와 합류하였으며 그는 유격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동만 각지의 유격대가 단일편제를 갖추어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1934년 3월 결성)에서 1934년 가을부터 3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주로 빈농·고농 출신으로 이루어져 문맹률이 80%가 넘었던 항일 유격대 속에서 중학까지 수업한 그의 학력은 상대적으로 돋보였으며 거기에 그의 능력이 보태어져 22세의 젊은 나이에 단에 정치위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격대에서의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한때 당시 많은 조선인공산주의자들에게 올가미로 씌어졌던 ‘일제주구’를 의미하는 민생단분자로 몰려 유격구 내 아동학교의 교사로 강등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극복하고 재기하여 1936년 3월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3사 사장이 되었다.
2)유격대지휘관으로서의 김일성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유격투쟁’은 조·중 연합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지도부는 중국공산당이었다. 이러한 지휘체계 때문에 당시 조선혁명에 대한 자신들의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중국혁명에의 복무를 요구하는 중공과 상당한 갈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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