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을 읽고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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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리랑을 읽고 감상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0. 들어가며

1. 'Song of Ariran'의 내용

2. Ideology 선택의 불가피성.~!

3. 조선 독립에 있어 이데올로기..~

4. 맺음말..~

본문내용

많은 조선 사람들이 1920년대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심취하여 독립운동의 철학으로 삼았는지에 대해 고찰해 보고, 아울러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우파 민족주의 계열과의 보이지 않는 분열에 대해 평하겠다. 그래서 독립운동이라는 대주제 아래 이데올로기가 갖는 의미와 의의에 필자의 생각을 말할 예정이다.
1. \'Song of Ariran\'의 내용
님웨일즈가 조선혁명가 장지락을 보고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아리랑을 썼으나, 이 책 전반이 장지락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물론 님웨일즈라는 제 3자의 시각을 무시할 수 없지만, 되도록 객관적으로 아리랑의 내용을 통해 장지락이라는 개인적인 삶에 대해 객관적으로 고찰하도록 노력하였다.
장지락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서 평북 평양 교외에 있는 차산리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러 일 전쟁중, 1905년 3월 5일 태어났다. 장지락 역시 조선 대부분의 가정처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작은형과 형수의 도움으로 중학교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카톨릭신자였다. 선생님은 항상 “기독교야 말로 오늘날 조선을 진정으로 통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조선인 모두가 이상주의자인데, ...조선이 이 두 나라를 모두 지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지락은 타고난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으며, 항상 자신의 현실에서 힘없이 쓰러져가는 이상주의자들을 보고 슬퍼하였다. 1919년 3월 1일 너무나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그날, 국제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고 세계 만방에 비폭력투쟁으로 조선의 독립을 실현시킬 것을 주장하는 그날, 장지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정치의식에 관해 관심을 보이게 된다. 모든 조선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하나의 외침이 이렇게 강렬한 힘이 되어 조선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라 믿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세계운동의 획을 긋는 이 운동은 모든 민족이 자주.자결의 원칙으로 독립을 성취할 것이라 떠들어댔다. 그러나 한낱 강대국들의 이해조정을 위해 제시되었던 윌슨의 민족자결의 원칙을 믿고 많은 지식인들이 독립이라는 구호한번으로 죽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에 가야 했으며 지금까지의 쌓아온 민족의 역량이 또다시 일제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다는-물론 전민족적인 단결로 독립을 외쳤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민족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사실은 많은 지식인들이 이상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며 장지락도 3.1운동의 양면성으로 자신의 정치의식을 일깨우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동경에서 유학하면서 그는 또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된다. 그는 신문을 배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는데, 거기서 조선 부르주아들과의 암묵적 갈등, 서로간의 비방을 통해 그는 막시즘에 대해 느끼게 된다. 그가 일본에 있는중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정부는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인에 대한 공격을 묵인하였는데,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인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수천명이 맞아 죽거나 동경을 떠나야만 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일본의 소시민들이 흉기를 들고 조선인을 죽이는 광경을 보았다. 장지락은 계급적인 증오, 민족적 증오, 국가간의 증오를 수 없이 보아왔기 때문에 잔인성에 대한 환멸이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잔혹성도 충분히 인정할 여지가 있으며, 이는 잔혹성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도덕적 이상주의를 영원히 포기한데서 연유한 것이라 생각했다.
또다시 그는 일본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잠시 조선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곳으로 가기 위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그는 안동을 거쳐 상해로 이르러 월 20달러를 받고 독립신문의 조선어 교정가겸 식자공이라는 일자리를 구하게된다. 1921년 그는 의학공부를 하기 위하여 베이징으로 갔다. 이시기에 그는 무정부주의자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김성숙-책에서는 김충창이라 되어있음-등과 함께 공산주의 잡지인 월간 ‘혁명’을 발간하게 된다. 1924년은 1920년대를 통틀어서도 동아시아에서 이데올로기가 그 힘을 발휘하는 때이다. 중국도 손문의 영도아래 좌익으로 급선회한때이며 조선에서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급격히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일본도 무정부주의자와 함께 이데올로기의 선향을 주장한 때이다. 그 때를 전후로 조선공산당이나(1925) 조선노동자동맹(1927) 등 좌익계열 단체가 생겨났다. 장지락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북경지부를 이 때 조직하였다. 1925년이 되어서는 장지락은 그 당시 공산주의가 한참 만연하던 광저우로 가서 광동코뮌의 준비에 힘쓰게 된다. 중국식으로는 광저우공사(廣州公社)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 광둥성 위원회의 지도아래 무장봉기하여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당의 군벌간의 상호다툼을 계기로 광둥성을 일시 점령하였다. 그러나 장지락의 표현대로 반동군-국민당 군대-는 3일만에 광둥성을 다시 점령하여 광둥코뮌에 참가한 대략 7000명가까이를 죽였다. 그야 말로 장지락이 바랬던 중국의 공산화, 그리고 그의 첫걸음인 광동코뮌이 3일천하로 돌아가자, 그는 쫓기는 몸이 되어 해륙풍으로 후퇴하게 된다. 해륙풍에서도 식량이 바닥이 나고 군사들이 흩어져서 재기를 도모하기 어렵게 되고 장지락은 병에 걸려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는 얼마간의 요양을 마치고 다시 상해로 가서 김성숙을 만나게 된다.
그후 조선인의 중국공산당 입당을 주도하다가 1930년 11월과 1933년 4월 2차례에 걸쳐 일본에 의해 체포되는데, 2차례 모두 곧 석방되자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중국공산당에 다시 가입하지 못하게 된다. 일본에 심해 심한 고문을 받고 결국은 폐결핵을 앓게 된다. 그는 자기가 있는 하숙집에 낼 돈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은 오직 중국혁명의 완수를 통해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유도하여 일본의 압정으로 벗어나고 일본의 노동자까지도 연계하여 세계 모든 곳에 혁명의 기치를 드높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루고자 했으나, 모든 건 현실의 벽에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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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4.28
  • 저작시기2006.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06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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