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1. 이집트(EGYPT)
(1) 이집트의 자연
(2) 이집트의 지지(地誌)
(3) 이집트의 역사
2. 피라미드(Pyramid)
(1) 역사
(2) 구조
(3) 기원
(4) 건설의 전성기
(5) 고대세계의 불가사의-쿠푸왕의 피라미드
(6) 피라미드의 건축방법과 의문점
3. 미라(Mummy)
(1) 미라란?
(2) 이집트의 미라에 담긴 사상
(3) 미라의 제작
(4) 장례
(5) 다시 깨어나는 미라들-람세스2세
1. 이집트(EGYPT)
(1) 이집트의 자연
(2) 이집트의 지지(地誌)
(3) 이집트의 역사
2. 피라미드(Pyramid)
(1) 역사
(2) 구조
(3) 기원
(4) 건설의 전성기
(5) 고대세계의 불가사의-쿠푸왕의 피라미드
(6) 피라미드의 건축방법과 의문점
3. 미라(Mummy)
(1) 미라란?
(2) 이집트의 미라에 담긴 사상
(3) 미라의 제작
(4) 장례
(5) 다시 깨어나는 미라들-람세스2세
본문내용
말기왕조시대에는 피부절개를 몸 각 부분에 실시하여 피부 밑에 채워넣어 둥그스름한 체형으로 만들었고, 의안(義眼)을 끼워넣고, 입술이나 볼을 붉게 물들였다. 또 목걸이·팔찌·주구(呪具) 등을 붙이고 천으로 감는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다. 신체의 각 부분에 천을 감고 그 위에 나무진이나 고무액을 발라 굳혔다. 천으로 감긴 얼굴 위에 마스크가 놓이고 이로써 미라가 완성되면, 개구의식(開口儀式)이 거행된다. 이것은 보고, 듣고, 먹고, 말하는 기능을 회복시키는 주술인데 오시리스 소생신화의 옛날 법식에 따라 이 주술이 베풀어지면 사자는 저승에서 소생하여 이승과 똑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한다. 미라는 옛날에는 상자모양의 관에 넣었는데 이 관의 장식은 중왕국시대에 정점에 달하여 제11·제12왕조의 것을 예로 들면, 왕궁과 같은 건축물이 바깥쪽에 그려져 있고 왼쪽면에는 상형문자, 외관상의 문짝, 눈[目] 등의 장식이 있다. 사람모양의 관이 등장하여 보급된 것은 중왕국시대부터인데, 종래의 상자모양의 관은 신왕국시대에서도 왕족들 사이에는 사람모양의 관을 안에 넣고 바깥쪽의 관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성수숭배(聖獸崇拜)에 따라 저승에서의 인간의 길동무인 고양이·악어·매·개 등도 미라화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조시대에는 역청만을 사용한 조잡한 미라가 제작되었다. 관도 석관에서 목관으로 바뀌고, 그 위에 밀랍물감으로 사자 생전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것이 문화적으로 초상화의 시초로 되어 있는데, 사자의 얼굴을 닮은 마스크를 씌우는 전통은 이미 고왕국시대에 나타났다. 따라서 이런 방법은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오늘날의 화폐의 개념으로 약 700파운드 이상이 들었다고 말한다.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 방법보다 덜 복잡한 만큼 비용도 약간 저렴했다. 이 방법은 뇌는 제거하지 않고 수술에 의해 내장만을 제거한후 50일간 소금물에 담가두는 방법이었다. 수술에 의해 내장만을 제거한 후 50일간 소금물에 담가두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뼈와 가죽만이 남고 다른 것은 전부 녹아버린다. 이것의 가격은 첫 번째 방법보다는 약 절반 정도 가격이 다운되었다.
세 번째로 가장 저렴한 방법은 내장과 위를 녹이기 위해 수렴제를 몸안에 주사한 다음 50일 동안 소금물에 담가두는 방식이었고, 비용은 거의 들지 않았다고 한다.
4) 장례
이런 식으로 미라를 만드는데 일반적으로 70일 정도 걸렸으며 미라가 만들어지면 비로소 장례식을 거행했다. 장례행렬에는 미라는 황소가 끄는 배위에 올려졌고, 그 앞길에는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우유를 뿌리는 사람이 앞장섰다. 미라를 옮기는데 배를 사용하는 까닭은 사자가 지하세계를 흐르는 강을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는 믿은 때문이었다.
한편 상객들은 푸른색과 회색이 도는 장례복을 입고 황소의 뒤를 따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무덤으로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상객들의 뒤에는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가구, 보석상자, 음식등을 든 시종들이 따라갔다.
피라미드 앞에는 악사와 무희가 미라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라가 도착하면 제사장은 향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미라를 똑바로 세운 후 끌로 입을 여는 개구의식을 거행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 개구의식을 통해 미라가 신체적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미라의 부활을 위해 가장 중요한 개구식이 끝나면 산해진미의 제물이 미라앞에 놓이게 되고, 잠시 시간이 지나면 준비된 석관에 미라를 넣는다. 그리고 석관의 문을 닫으면 장례식은 끝나는 것이다.
5) 다시 깨어나는 미라들-람세스2세
미라는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손상되어 갔다. 특히나 외국에서의 이집트로의 탐험과 발굴은 급기야 미라의 약재화를 가져왔다. 역청과 몰약(沒藥)이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만드는데 충분히 발라졌다는 것이 유럽사회에서는 중세와 18세기까지 진통제와 강장제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약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미 BC 1150년부터 BC 1080년 사이 그러니까 21대 왕조 때부터 테베주민들은 진귀한 보석이 많이 부장되어 있던 파라오의 무덤뿐 아니라 다른 무덤의 도굴을 일삼아 왔다. 도굴범은 사형당하거나 코와귀를 잘렸고, 아무리 가볍게 처벌된다 해도 태형을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도굴행위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이유로 투탕카멘의 무덤이나 그 외 많은 무덤들이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로로 된 통로라든지 비밀 방을 만들었다.
(사진은 1923년 카터박사가 투탄카멘의 무덤 봉인된 입구를 발견 열고 있는 모습)
(사진은 투탄카멘의 관의 발견과 오른쪽은 대기실의 모습)
장례가 끝나자마자 도굴범들이 어지럽혔던 것이 그대로 방치 현대에 들어서 발견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아직도 많은 역사학자들과 많은 수의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에 대한 발견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건축가인 장피에르 바롱은 여전히 굴착기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집트에서 발굴 중이라고 한다. 너무나 많은 비밀의 방과 각방마다의 연결 시스템등 굉장히 많은 부분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실정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이집트가 알려지면서 제일 많은 고나심을 끄는 것중에 하나가 바로 미라이다. 특히 람세스 2세의 미라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람세스2세는 무려 30세기 동안이나 시간과 공간을 여행한 끝에 마침내 카이로 박물관에 자신의 거처를 정했다. 이제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예리하게 생긴 옆얼굴에는 금발의 머리가 가느다랗게 타래를 이루었고 물결치듯이 부드러운 선을 만들고 있다. 지혜로웠던 그의 머리는 헨나나무에서 추출한 붉은 물감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바늘로 꿰멘 흔적도 없는 고대 이집트의 아마포에 감싸인 그의 두손은 길고 섬세했다. 헨나로 물들여진 손톱또한 생명을 상징하는 호박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람세스는 지중해인었다. 그의 피부는 투명했고, 금빛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평화로운 잠에 빠져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생생했고, 형체 또한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죽음 저편에서도 그는 인류학적 특성을 모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6년 당시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수세기를 거치면서도 훼손되지 않았던 이 미라가 험상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 방법보다 덜 복잡한 만큼 비용도 약간 저렴했다. 이 방법은 뇌는 제거하지 않고 수술에 의해 내장만을 제거한후 50일간 소금물에 담가두는 방법이었다. 수술에 의해 내장만을 제거한 후 50일간 소금물에 담가두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뼈와 가죽만이 남고 다른 것은 전부 녹아버린다. 이것의 가격은 첫 번째 방법보다는 약 절반 정도 가격이 다운되었다.
세 번째로 가장 저렴한 방법은 내장과 위를 녹이기 위해 수렴제를 몸안에 주사한 다음 50일 동안 소금물에 담가두는 방식이었고, 비용은 거의 들지 않았다고 한다.
4) 장례
이런 식으로 미라를 만드는데 일반적으로 70일 정도 걸렸으며 미라가 만들어지면 비로소 장례식을 거행했다. 장례행렬에는 미라는 황소가 끄는 배위에 올려졌고, 그 앞길에는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우유를 뿌리는 사람이 앞장섰다. 미라를 옮기는데 배를 사용하는 까닭은 사자가 지하세계를 흐르는 강을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는 믿은 때문이었다.
한편 상객들은 푸른색과 회색이 도는 장례복을 입고 황소의 뒤를 따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무덤으로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상객들의 뒤에는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가구, 보석상자, 음식등을 든 시종들이 따라갔다.
피라미드 앞에는 악사와 무희가 미라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라가 도착하면 제사장은 향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미라를 똑바로 세운 후 끌로 입을 여는 개구의식을 거행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 개구의식을 통해 미라가 신체적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미라의 부활을 위해 가장 중요한 개구식이 끝나면 산해진미의 제물이 미라앞에 놓이게 되고, 잠시 시간이 지나면 준비된 석관에 미라를 넣는다. 그리고 석관의 문을 닫으면 장례식은 끝나는 것이다.
5) 다시 깨어나는 미라들-람세스2세
미라는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손상되어 갔다. 특히나 외국에서의 이집트로의 탐험과 발굴은 급기야 미라의 약재화를 가져왔다. 역청과 몰약(沒藥)이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만드는데 충분히 발라졌다는 것이 유럽사회에서는 중세와 18세기까지 진통제와 강장제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약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미 BC 1150년부터 BC 1080년 사이 그러니까 21대 왕조 때부터 테베주민들은 진귀한 보석이 많이 부장되어 있던 파라오의 무덤뿐 아니라 다른 무덤의 도굴을 일삼아 왔다. 도굴범은 사형당하거나 코와귀를 잘렸고, 아무리 가볍게 처벌된다 해도 태형을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도굴행위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이유로 투탕카멘의 무덤이나 그 외 많은 무덤들이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로로 된 통로라든지 비밀 방을 만들었다.
(사진은 1923년 카터박사가 투탄카멘의 무덤 봉인된 입구를 발견 열고 있는 모습)
(사진은 투탄카멘의 관의 발견과 오른쪽은 대기실의 모습)
장례가 끝나자마자 도굴범들이 어지럽혔던 것이 그대로 방치 현대에 들어서 발견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아직도 많은 역사학자들과 많은 수의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에 대한 발견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건축가인 장피에르 바롱은 여전히 굴착기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집트에서 발굴 중이라고 한다. 너무나 많은 비밀의 방과 각방마다의 연결 시스템등 굉장히 많은 부분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실정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이집트가 알려지면서 제일 많은 고나심을 끄는 것중에 하나가 바로 미라이다. 특히 람세스 2세의 미라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람세스2세는 무려 30세기 동안이나 시간과 공간을 여행한 끝에 마침내 카이로 박물관에 자신의 거처를 정했다. 이제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예리하게 생긴 옆얼굴에는 금발의 머리가 가느다랗게 타래를 이루었고 물결치듯이 부드러운 선을 만들고 있다. 지혜로웠던 그의 머리는 헨나나무에서 추출한 붉은 물감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바늘로 꿰멘 흔적도 없는 고대 이집트의 아마포에 감싸인 그의 두손은 길고 섬세했다. 헨나로 물들여진 손톱또한 생명을 상징하는 호박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람세스는 지중해인었다. 그의 피부는 투명했고, 금빛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평화로운 잠에 빠져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생생했고, 형체 또한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죽음 저편에서도 그는 인류학적 특성을 모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6년 당시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수세기를 거치면서도 훼손되지 않았던 이 미라가 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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