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가정의 주인이 라고 믿을 수 있다. 새로운 가족은 남성 노동자가 착취자의 가치관에 어느 정도 동조하도록 부추 기기 때문에 노동계급을 분열하고 잇다. 이와 동시에 여성은 가정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좀 더 넓은 범위의 사회적 생산 활동들로부터 단절된다. 여성억압의 결과, 대부분의 경우 여성은 반 체제 투쟁 능력을 상실하고 보수적 사회관을 갖기 쉽다. 교회와 같은기구는 이러한 여성의 상황을 이용하여 사회 변혁에 반대하는데 여성을 동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여성해방의 전제 조건이 사회적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것--가장 극심한 종류의 착취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 하에서 조차--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노동 계급의 남녀가 이 새로운 가족 구조에 대대적으로 저항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비교적 높은 보수를 받는 직장에 다니는 여성의 경우는 직장을 그만두고 그런 가정을 꾸미는데 어느 정도 저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암울한 대안--위험한 낙태, 반복되는 유산, 12 시간의 공장 노동, 육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독신--밖에 없는 대부 분의 여성은 자신은 아이를 양육하고 남편은 자기를 먹여 살리는 이러한 이 상에 끌렸다.
자본주의 체제가 새로운 노동계급 가족이라는 이상을 창조해낸 이유는 체제 를 위해서 일 할 수 있는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체제는 적어도 현재의 노동계급 어머니들의 건강에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노동계급 여성이 가족이라는 이상 자체를 반대하기 보다는 그 이상에 따라 살 수 없는 현실을 비난하는 것도 별 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새로운 가족안에서도 여성은 외부 세계와 단절 된 채 남편에게만 의존해 야하기 때문에 여전히 억압받는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의 부담은 다소 줄어들 었다. 노동계급 남성에게도 이 새로운 가족은 이점을 지녔다. 그들은 가족을 부양 할 책임을 지고 있으며 이 사실에 가끔씩은 분노하지만, 그 대가로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며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또 다른 측면에서도 이 가족 형태는 노동계급 남녀들에게 이로웠다. 가정은 외로움과 심리적 소외감으로부터 도피처가 될 수 있었다. 도시로 유입된 노동자들은 옛 친구 및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족은 우정과 애정을 보장해주는 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이상에 따라 살 수 없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이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못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새로운 가족이 자본가 계급 남성들과 노동계급 남성들이 공모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녀 노동자 모두가 가족의 소멸을 상상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이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였다는 관점에서 그것은 체제 유지에 이로운 것이었다. 반동 세력들이 여성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늘 '가족'이라는 구호를 이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이다.
3. 결론 : 불회귀점을 나오며
그러나 이 결론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페미니즘이 맑스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가? 혹은 그래야 하는가?'라는 고민은 계속되고 있으며,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이러한 상황은, (비록 불행하더라도) 맑스주의와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을 우스갯거리로 만든다. 결합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페미니즘과 맑스주의 양자가 모두 실천과 분리될 수 없는 이론체계라고 할 때, 더욱 중요하게 사회주의 '운동'과 여성주의 '운동'이 만날 수 있는가? '부르주아적' 페미니즘이라는 비난에 '가부장적' 맑스주의라는 비난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지금의 이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이미 불회귀점을 지나왔다. 맑스주의의 공백과 가부장적 성격은 주지의 사실이고, 사회주의 운동이 여성인 자신의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맑스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불필요하게 (혹은 과도하게) 남녀를 대립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지만,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남녀간의 대립은 일부 여성이 대립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페미니스트들은 알고 있다. 여성억압은 엄연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맑스주의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이 봉착해 있는 수많은 결정적인 불가능성들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불회귀점 '이후'에 무엇이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불회귀점을 지난 이후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알 수 없다.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너무 많은 것이 말해지지 않았으며 더 많은 막대구부리기와 비판이 있어야 하는 시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현실적인 상황과 조건을 무시한 채 먼 유토피아의 모습 -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억압을 폐지하기 위한 투쟁이 형이상학이 되는 것이야말로 두려워 해야 할 일이다). 가령, '현실적 수준에서 볼 때 계급모순과 여성억압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으며, 따라서 여성해방을 위해 계급의 문제가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라는 수준의 매우 완충적인 발언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곧 정치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비등한 저울 중 계급모순을 강조하는 자들의 편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며, 나아가 계급모순 이외의 여성억압에 대해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부르주아적인 여성운동'으로 매도할 수 있게 하는 증거물로 사용될 것이다.
<참고문헌>고미라, [노동개념 새로 보기 - 감정노동의 이해를 위한 시론],
시타, [여성주의, 좌파의 새로운 싸움], 카피레프트모임, {읽을꺼리 4호}
이승희, {여성운동과 정치이론}, 녹두
장미경, {페미니즘의 이론과 정치}, 문화과학사
앤 쇼우스탁 사쑨 外, {여성과 국가}, 한국여성개발원
다이앤 앨슨 外,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 페미니즘의 시각}, 공감
하이디 하트만,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 {여성해방이론의 쟁점}, 태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여성해방의 전제 조건이 사회적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것--가장 극심한 종류의 착취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 하에서 조차--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노동 계급의 남녀가 이 새로운 가족 구조에 대대적으로 저항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비교적 높은 보수를 받는 직장에 다니는 여성의 경우는 직장을 그만두고 그런 가정을 꾸미는데 어느 정도 저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암울한 대안--위험한 낙태, 반복되는 유산, 12 시간의 공장 노동, 육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독신--밖에 없는 대부 분의 여성은 자신은 아이를 양육하고 남편은 자기를 먹여 살리는 이러한 이 상에 끌렸다.
자본주의 체제가 새로운 노동계급 가족이라는 이상을 창조해낸 이유는 체제 를 위해서 일 할 수 있는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체제는 적어도 현재의 노동계급 어머니들의 건강에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노동계급 여성이 가족이라는 이상 자체를 반대하기 보다는 그 이상에 따라 살 수 없는 현실을 비난하는 것도 별 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새로운 가족안에서도 여성은 외부 세계와 단절 된 채 남편에게만 의존해 야하기 때문에 여전히 억압받는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의 부담은 다소 줄어들 었다. 노동계급 남성에게도 이 새로운 가족은 이점을 지녔다. 그들은 가족을 부양 할 책임을 지고 있으며 이 사실에 가끔씩은 분노하지만, 그 대가로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며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또 다른 측면에서도 이 가족 형태는 노동계급 남녀들에게 이로웠다. 가정은 외로움과 심리적 소외감으로부터 도피처가 될 수 있었다. 도시로 유입된 노동자들은 옛 친구 및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족은 우정과 애정을 보장해주는 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이상에 따라 살 수 없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이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못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새로운 가족이 자본가 계급 남성들과 노동계급 남성들이 공모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녀 노동자 모두가 가족의 소멸을 상상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이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였다는 관점에서 그것은 체제 유지에 이로운 것이었다. 반동 세력들이 여성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늘 '가족'이라는 구호를 이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이다.
3. 결론 : 불회귀점을 나오며
그러나 이 결론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페미니즘이 맑스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가? 혹은 그래야 하는가?'라는 고민은 계속되고 있으며,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이러한 상황은, (비록 불행하더라도) 맑스주의와의 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을 우스갯거리로 만든다. 결합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페미니즘과 맑스주의 양자가 모두 실천과 분리될 수 없는 이론체계라고 할 때, 더욱 중요하게 사회주의 '운동'과 여성주의 '운동'이 만날 수 있는가? '부르주아적' 페미니즘이라는 비난에 '가부장적' 맑스주의라는 비난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지금의 이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이미 불회귀점을 지나왔다. 맑스주의의 공백과 가부장적 성격은 주지의 사실이고, 사회주의 운동이 여성인 자신의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맑스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불필요하게 (혹은 과도하게) 남녀를 대립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지만,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남녀간의 대립은 일부 여성이 대립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페미니스트들은 알고 있다. 여성억압은 엄연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맑스주의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이 봉착해 있는 수많은 결정적인 불가능성들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불회귀점 '이후'에 무엇이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불회귀점을 지난 이후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알 수 없다.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너무 많은 것이 말해지지 않았으며 더 많은 막대구부리기와 비판이 있어야 하는 시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현실적인 상황과 조건을 무시한 채 먼 유토피아의 모습 -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억압을 폐지하기 위한 투쟁이 형이상학이 되는 것이야말로 두려워 해야 할 일이다). 가령, '현실적 수준에서 볼 때 계급모순과 여성억압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으며, 따라서 여성해방을 위해 계급의 문제가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라는 수준의 매우 완충적인 발언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곧 정치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비등한 저울 중 계급모순을 강조하는 자들의 편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며, 나아가 계급모순 이외의 여성억압에 대해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부르주아적인 여성운동'으로 매도할 수 있게 하는 증거물로 사용될 것이다.
<참고문헌>고미라, [노동개념 새로 보기 - 감정노동의 이해를 위한 시론],
시타, [여성주의, 좌파의 새로운 싸움], 카피레프트모임, {읽을꺼리 4호}
이승희, {여성운동과 정치이론}, 녹두
장미경, {페미니즘의 이론과 정치}, 문화과학사
앤 쇼우스탁 사쑨 外, {여성과 국가}, 한국여성개발원
다이앤 앨슨 外,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 페미니즘의 시각}, 공감
하이디 하트만,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 {여성해방이론의 쟁점}, 태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