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D.스펜스의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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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너선D.스펜스의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을 읽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편집진을 결성했고 이들은 새 중국의 상징적 중심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그는 영향력 있는 새로운 지식 엘리트들을 여럿 보았지만 활발한 지적 세계의 자극만 받았을 뿐 그다지 중요 인물이 되지는 못한다. 이후 창사로 돌아오게 되는 그는 54운동이라 불리는 이 지적인 격변의 시기를 맞아 창사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최신 소식을 전해주기로 마음먹고 거의 혼자 편집하고 기사를 쓴 ‘상강평론’을 만들지만 곧 군벌에 의해 폐간되고 후에 창사 최대의 신문 ‘대공보’의 정규 기고자가 된다. 그러던 중 스승 양창지가 죽게 되고 이를 통해 리다자오와 의 친분을 쌓고 베이징에서 공식 단체인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조직했다. 설사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이론의 상세한 지식을 쌓아가는 중이었다고 해도 마오쩌둥의 마음은 다분히 절충적이었다. 그때까지도 모택동은 소련을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나라로 보았는데 이는 아직까지 모택동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해맸다는 이야기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54운동을 이끌었던 급진적 교수진이면서 후에 공산당 초대 창당 맴버인 천두슈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이때 경쟁관계에 있던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불시에 창사를 습격하여 장징야오를 축출해버린 예기치 못한 사태 변화가 일어나자 그는 곧 옛 스승의 도움으로 창사사범학교 부속 소학교 교장으로 임명되면서 불투명 했던 그의 앞길은 순식간에 탄탄대로로 변했다. 그때부터 그가 품어왔던 꿈의 일부인 모험적 사업을 발표하는데 그것이 바로 ‘문화서사’라는 신문화 운동이다. 이 사업은 독특한 성격과 구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번창했다. 그가 말하길 이 사업은 서로 완전히 이해하고 신뢰하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추진될 것이며 투자된 돈은 투자자들이 회수해 갈수도 이익 배당금도 없으며 공동의 소유가 영원히 지속되고 사업이 성공한다 해도 이윤을 취득할 사람을 없다고 밝혔다. 또 사업이 실패해서 돈이 한 푼도 남지 않게 된다 해도 창사시에 한때 집단적으로 소유되었던 서점이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할 것이라 이야기 한 것이다.
모택동이 후난성의 자립에 관해 쓴 기사에서 레닌을 처음 언급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레닌의 사례는 정치조직이 사회조직을 개혁 할 수 있고 집단의 힘이 개인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러시아의 사례가 특수한 경우이므로 중국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우선 레닌은 수백만 명의 당원들에 의 존하여 반동적 당들을 말끔히 일소 하고 상류층과 중산층을 깨끗이 정화하여 유례없는 인민 혁명을 이룰 수 있었고 용의주도하게 고안된 이데올로기와 레닌의 혁명적 요구에 반응을 보인 농민들 때문이다. 당장은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후난 공화국’을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결심하였다.
1920년 11월 드디어 중국 공산당의 창당이 선언 되었다. 하지만 공식 선언문의 내용은 추상적인 표현으로 가득했고 중국 사회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했다. 중국 공산당이 표방한 이념은 ‘생산 수단의 사회적 공동 소유와 사용, 국가의 폐지, 무계급 사회의 실현’이었고 목표는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었다. 비록 표현은 모호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쟁점들은 중요했고 모택동도 이것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과 논의 중 에 있었다.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중국대표 열세명과 코민테른 대표 두 명으로 이루어진 대표단 열다섯 명이 중국 공산당 제1차 당 대회를 열었다. 모택동은 창사 소그룹에서 온 두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이 당 대회에 참여한 것은 나중에 그의 혁명 경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그가 발탁된 데에는 그가 중국 공산당의 창립자인 리다자오와 천두슈를 잘 알았고, 창사 교육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쌓았다. 또 그는 양씨 가족을 비롯한 후난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두루 교분이 있었으나 사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관해서 정식으로는 거의 알지 못하고 1921년 1월이 되어서야 ‘역사에 관한 유물론적 이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새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프랑스 유학을 가서 현지의 공산주의 청년 동맹에 가입한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서이고 하나는 상하이의 공산주의 소그룹이 펴낸 ‘공산주의자’라는 새 잡지를 통해서였다. 당시 모택동은 자신이 운영하던 문화서사 활동이 엄청난 성장을 이루게 되고 규모도 점점 더 팽창해 갔다. 이러한 사업 수완 외에도 그는 놀라운 에너지와 창의성, 뛰어난 신체적 용기를 과시했으며 훤칠한 키에 또렷한 눈망울을 지닌 잘생긴 청년 이었고 말솜씨도 좋아 어디 나무랄 데라곤 없었다. 이 일차 당 대회에서의 쟁점은 브루주아 사회를 완전히 분쇄할 것인가 아니면 공개 활동과 비밀 활동 사이에 연계를 찾아 당이 사회 속에서 더 공개적으로 활동할 여지를 만들 것인가를 판단하는 문제였는데 결국 격렬한 논쟁 끝에 당의 최종 강령은 중국에서 자본가 계급을 타도하고 무계급 사회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명확히 하였다. 이는 기계, 토지, 건물, 기타 생산 수단도 사회적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 하였고 당원은 성별이나 국적의 제한을 받지 않았다. 모택동도 후난에서 당을 건설하라는 당 대회의 지침을 받고 창사로 돌아와 새로운 동지들을 규합하여 결성하고 젊은 사회주의자 동맹원들을 확보하려 애쓰고 있었다. 당시 그는 이미 후난성의 수많은 공장들과 노동자들에게서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었고 활동 범위는 급속하게 넓어졌다. 또 개인적으로는 양카이후이와 살림을 시작하고 곧 장남이 태어났다. 이러한 주변의 변화들이 곧 모택동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전횡적인 성격에 그토록 거세게 저항하고, 부르주아적 결혼의 족쇄를 증오하고 경멸하면서 자유연애에서 기쁨을 찾았고 학교를 무척 싫어해 두 번 다시 학교에 가려하지 않았고 언제나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고 성장과 변화의 기회를 꿈꾸었던 스물여덟 살의 젊은이가 그간 그가 만난 어느 누구의 명령보다도 공산당의 규율과 통제를 기꺼이 받아 들였다는 점이다. 1921년 초까지 모택동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아마추어였지만 1922년이 끝날 무렵 모택동은 직업적인 혁명 조직가가 되어가고 있었으며 수만 노동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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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22
  • 저작시기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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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1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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