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이로 돌아가셨고, 뒤에 그의 아들 성종이 즉위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고 적혀있다. 소혜왕후 한씨는 세조 즉위년에 세자빈이 되어 월산 대군과 성종형제를 낳고 연산군 10년에 68세로 돌아가셨다. 불경에 조예가 깊고, 내훈이라는 예의범절 책도 남겼다고 한다.
역시 오릉에 속하여서 그런 것인지 순창원에 비하여 매우 넓고 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양쪽으로 거대한 언덕으로 묘 두개가 있었다. 어느 것이 왕의 것이고 어느 것이 왕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비슷한 걸로 보아 남녀평등 이런 것과 관계가 있나? 아니면 일찍 죽은 세자와 오래 살은 왕비는 계급이 비슷한 것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원래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사진을 찍고 또 돌아서 창릉, 홍릉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다 보니 얼마 되지 않아서 대빈묘라 하여 샛길이 있었다. 팜플렛을 찾아서 보니 장희빈의 묘였다. 운용이와 나는 호기심이 동하여 바로 갔다.
그 명성 높던 장희빈의 묘치고는 너무 조촐하고 작았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었기 때문인가? 죄인이기 때문에? 아니면 후궁이기 때문인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왕족들의 묘들 사이에 후궁의 묘라도 조그맣게 있는 것도 대단한 생각이 든다. 어찌
역시 오릉에 속하여서 그런 것인지 순창원에 비하여 매우 넓고 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양쪽으로 거대한 언덕으로 묘 두개가 있었다. 어느 것이 왕의 것이고 어느 것이 왕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비슷한 걸로 보아 남녀평등 이런 것과 관계가 있나? 아니면 일찍 죽은 세자와 오래 살은 왕비는 계급이 비슷한 것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원래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사진을 찍고 또 돌아서 창릉, 홍릉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다 보니 얼마 되지 않아서 대빈묘라 하여 샛길이 있었다. 팜플렛을 찾아서 보니 장희빈의 묘였다. 운용이와 나는 호기심이 동하여 바로 갔다.
그 명성 높던 장희빈의 묘치고는 너무 조촐하고 작았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었기 때문인가? 죄인이기 때문에? 아니면 후궁이기 때문인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왕족들의 묘들 사이에 후궁의 묘라도 조그맣게 있는 것도 대단한 생각이 든다. 어찌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