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지방사림의 대두와 사대부건축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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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8장 지방사림의 대두와 사대부건축의 전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8장 지방사림의 대두와 사대부건축의 전개

본문내용

으로 정책적 억압을 받으면서도 왕실의 후원 아래 어느 정도 절의 세력을 유지 하던 불교계는 16세기 중종조 이후에는 회복하기 어려운 억압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승과도 폐지되고 선종, 교종의 구분도 사라졌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제한되는 대신 나라의 각종 국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도시와 달리 지방산간에서 불교 사찰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갔다. 비록 정치적 억압을 받기는 했지만 왕으로부터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신앙의 뿌리를 내린 불교가 간단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불교 사원은 비록 과거와 같은 영화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드러나지 않게 왕실의 비호를 받았고 농촌 지주계층의 지원을 받아 절의 모습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지방의 사찰에서는 고려시대와 같은 대규모 법회가 치러지기는 어려웠다. 대신에 농촌 지주 집안 식구를 위한 소규모 법회나 각종 기제가 주로 치러졌다. 이 과정에서 과거와 같은 야단법석은 사라지고 법당내에서 치르는 간소한 의식이 자주 치러졌다고 짐작된다. 이제 불전은 단지 불상을 모신 빈 공간이 아니고 신도들의 소규모 예불과 법회를 위한 장소로 활요되기 시작한 것이다. 불전 실내 공간이 일반 신도들을 위한 예불공간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 2층 지붕을 세워 장대한 외관을 갖추던 불전을 단층으로 축소하여 재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본래 팔작지붕이던 건물을 손이 덜 드는 맞배지붕으로 개조해서 재건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재목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각종 폐자재를 재활용하는 지혜도 동원되었다. 간혹 외관에 통일성을 기하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적절히 부분 부분을 짜 맞추는 방법도 구사되었다. 하나의 혼란스러운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불교건축은 17세기를 맞으면서 서서히 회생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사대부 집안의 사찰 출입은 거의 사라졌다. 그 대신 왕실 주변 사람들의 사찰 지원은 더 표면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17세기에 와서 복구된 불전 건물에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은 과거에 비해 창문의 크기가 더 넓어진 점이다. 또 불상을 모신 불단을 옆으로 긴 장방형으로 만들어 불단 앞에 신도들이 예불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점도 발견된다. 이런 현상들은 신도들이 실내에 들어와서 예불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회복세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으로 17세기 전반기까지 불교건축은 기본적으로는 16세기와 같은 선상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찰 건립이 여전히 왕실이나 사대부 층에 의존하는 중세적 경제구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5. 조선 고유의 구조기법과 익공
16세기에서 17세기 전반기를 지나는 사이에 목조건축은 조선 고유한 시대 양식을 만들어 갔다. 다포 형식은 본래의 구조 개념을 지키면서 살미와 짜임에 변화가 생기고 장식이 가미되기 시작했다. 주심포형식은 서서히 그 존립 기반을 상실해 가면서 쇠퇴되었고 절충적인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여기에 주심포를 대신해서 시대가 요구하는 구조 방식으로 익공형식이 나타났다. 익공형식은 비록 간략하고 간략하고 구조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국 일본에도 없는 독창적인 기법이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전반에 지어진 다포식 건물은 공포 부분에서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우선 살미는 본래 각 층이 서로 분리되어 있던 것이 전체가 하나로 일체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아울러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는 위치에 가서 소위 운궁이라고 하는 곡선 장식이 생긴다. 쇠서 역시 초기에 단순하게 꾸며지던 것이 점차 곡선이 커지고 날카로워지는 경향을 띈다. 또한 일부 건물에서는 출목수에서 조선 초기에 내부와 외부가 같았던 것이 이때 와서는 서서히 내부 출목이 외부보다 많아지는 사례가 는다. 또 대들보 끝은 전에 보머리를 빼내던 방식 대신에 안으로 감추어지고 밖에는 장식적으로 보뺄목이 설치되고 끝은 독특한 장식적인 표현으로 바뀌게 된다.
다포형식의 세부에 주심포식 기법이 가미되는 것은 건축기법이 토착화되는 현상의 하나이다. 주심포형식은 고려후기 이전부터 뿌리 내린 기법이었다. 비확일화의 전통과는 다른 차원으로 다포형식의 구조 개념에서 또 다른 특징을 완주 화암사 극락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건물은 지금은 거의 유일하게 하앙이 그대로 남아있는 다포 건물이다. 하앙이라는 것은 지붕 하중을 공포에 전달하는 긴 경사재이다. 내부 중도리 아래서 길게 내려 뻗은 경사재가 처마 아래로 내려가 처마 도리의 하중을 지탱하는 하앙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바깥쪽 끝은 용머리로 장식하는 표현력도 갖추었다. 이시기에 주심포식은 그 자체 기술적 제약을 안고 있었다. 여러 개의 살미를 수평 방향으로 밖으로 길게 내밀어 처마를 받치도록 한 주심포 형식은 비교적 긴 재목을 많이 요구하는 기법이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로 가면서 조선의 목재 공급 여건은 아주 나빠지고 있었다. 이미 한반도 내의 목재는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는 시점에 오고 있는 데다 조선초기에 도성 건설을 비롯해 전국 읍치를 새로 정비하면서 전국적으로 과다하게 목재를 소모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주심포형식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웅축해 온 기술적 세부들은 다포형식에 녹아 들어가서 재현되거나 간혹 다포식에 주심포식을 절충한 방식으로 재현되는데 머물렀다. 이러한 현상에 직면해서 시대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형식이 다음 시대의 건축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 익공형식의 창출이 바로 그것이다. 익공형식의 초기 형태는 강릉 해운정과 오죽헌에서 볼 수 있다. 해운정 건물의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직교해서 바깥쪽에 쇠서가 하나 돌출하여 있고 안쪽으로는 보이지가 보를 받치면서 기둥머리 주두를 일체로 엮어준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쇠서가 하나 돌출한 것을 보통 초익공이라고 부르며 익공의 가장 간단한 형태가 된다. 17세기로 넘어가면서 익공은 완전히 하나의 독립된 구조형식으로 정착되었다. 기둥머리에서 주두와 밀착된 쇠서를 내밀어 기둥머리 부분을 구조적으로 보강하면서 필요에 따라서는 출목을 두어 외목도리를 받치는 공포 본래의 기능까지 수용하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8장
지방사림의 대두와
사대부건축의 전개
  • 가격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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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02
  • 저작시기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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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16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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