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근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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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근대영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 작품은 실제로 구로자와 자신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일본 영화 전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품일 것입니다. 이 영화는 일본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그 당시 있었던 강도사건에 대해 각 인물들이 다르게 연속적으로 회상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라쇼몽이라는 오래된 터에 세 명의 남자들, 나무꾼, 스님, 하인이 비를 피해 들어옵니다. 이들은 아내와 함께 여행하던 한 사무라이가 강도를 만나면서 겪게 된 이상한 일에 대해 서로 이야기 하게 되죠. 이 영화의 나래이션은 네 명의 관점, 즉 강도, 죽은 사무라이와 그의 아내, 나뭇꾼에 따라 각기 다르게 진행됩니다. 이렇듯 다양한 인물들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각자의 입장에서 본 사건을 기술한 것은 물론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닌데요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예를 들자면, 오손 웰즈의「시민 케인」을 들 수 있겠지요. 시민케인은 영화 처음에 주인공 케인이 죽으며 남긴 마지막 말 \'로즈 버드\'의 의미를 알아내고자 기자가 그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 인물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각기 다른 모습의 케인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로즈버드\'는 무엇일까요? 세계 영화 비평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화로 손꼽히는 이 영화를 보고서 여기에 대한 답을 찾아보십시오. 이렇듯「시민케인」에서 이미 시도되었던 것과 유사한 다양한 서술 시점을 전개하며 근대적인 영화 방식을 선보였던 이 작품은 미국에서도 오스카 최우수 외국 영화상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까지 관심밖에 머물러있던 일본 영화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고 물론 구로자와 자신에게는 대규모 작품들을 자유로이 창작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지요. 이 중 몇몇 작품들은 외국 문학을 각색한 작품들이 있는데 그 중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각색한 「백치」세익스피어의 희곡을 각색한「거미의 성」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확고해 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물에서인데 베니스영화제 은곰상을 받았던「7인의 사무라이」는 이후 여러 서양 영화에서 여러 번 패러디되기도 했으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영화가 죤 스터지스 감독의 「황야의 7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성공은 1965년을 기점으로 점차 하향세를 그리게 되고 할리우드에서 계획한 영화들이 중도에 포기되고 일본에서 만든 영화들 역시 실패하게 되면서 심지어 한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에게 희망을 던져준 것이 1973년에 소련이 제안한 영화 한편의 제작이었습니다. 「데루수 우잘라」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모스크바 영화제 대상을 차지하였고 몇몇 나라에서 예기치 못한 흥행을 기록하게 되며 이와 더불어 미국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는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 20세기 폭스사의 도움으로 1980년 영화「가케무사」를 마무리하게 되고 화려한 무대 장치로 인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본 영화의 영향
구로자와 아키라는 미국 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본 감독임에 틀림없을 것이며 그의 「스가타 산시로」는 홍콩 무술 영화는 물론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에 큰 영향을 미쳤고「7인의 사무라이」는 존 스터지스 감독에 의해「황야의 7인」이란 제목으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어 흥행에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미조구치 역시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데 이는 어쩌면 미조구치와 장 르누아르 간의 보이지 않는 유사성 때문일 수 있으며 이 둘은 환상과 거짓으로 이루어진 사실의 복잡한 조직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잡아내어 그 속에서 어떤 진실성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감독은 때론 엄청난 고통을 뒤따르게 하는 현실을 영화 속에 반영하여 진실의 순간을 솟아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어떤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현실에 작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작은 변화를 이루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해피 앤드가 아닙니다. 이는 화면 내에서 이루지 못한 해피 앤드를 이루는 노력을 관객의 몫으로 돌리기 위해서 일지도 모를 것입니다. 이렇듯 일본의 영화는 간접적이나마 꾸준히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아갔으며 그러한 내용을 담는 영화적 형식의 간결함과 강렬함은 뒤따를 많은 영화감독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미조구치가 세상을 떠난 후 이년여가 지나 1958년에 이르러는 일본의 영화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고 영화관객수가 10억 명 이상에 달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미조구치와 오즈, 그리고 구로자와 같은 감독들에 의해 일본영화에 대한 세계적 인지도가 높아진 것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영화사들은 젊은 감독들을 영입하여 새로운 취향의 영화들을 만들기로 하는데 여기에는 프랑스에서 일기 시작한 누벨바그의 감독들의 영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이 영향을 받은 이가 바로 오시마 나기사였습니다.
이 신세대 감독은 그 누구보다 도발적인 영상으로 기존의 영화적 방식을 갱신하고자 하였으며 영화 속에 사회고발적인 내용을 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영화 중 하나인 「감각의 제국」은 그때까지 전통적 일본 사회에서 부터 시작되었던 성의 문제를 군국주의적인 시대적 배경과 대조를 이루어 영화 속에서 다루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인 성과 지극히 집단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군인들의 대비를 통해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제는 이렇듯 일본 사회의 터부를 건드리면서 기존의 사회적 통념을 깨는 데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에 시작 되었던 영화사들의 독점적 지휘는 1970년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영화사는 5개(니카추, 소시쿠, 도호, 다이에이, 도헤이)가 있을 뿐이었으며 거의 모든 영화 기술자와 시나리오 작가들은 이들 영화사 중 하나와 작업을 했는데요, 이러한 체계를 거부하는 젊은 영화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중 하나가 위에서 우리가 다루었던 나기사 오시마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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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8페이지
  • 등록일2010.06.08
  • 저작시기201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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