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책 소개
Ⅱ. 저자소개
Ⅲ. 구 성
Ⅳ. 저술 의도와 목적
Ⅴ. 요 약
1장 예수님의 말씀 전승의 신빙성
2장 예수님의 사명
3장 구원 시대의 여명
4장 은혜의 때
5장 하나님의 새 백성
6장 자신의 임무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
7장 부활
Ⅴ. 서 평
1. 예수의 말씀 전승의 신뢰성
2. 구원시대의 여명
3. 자신의 임무에 대한 예수의 증거
Ⅵ. 총 평
Ⅱ. 저자소개
Ⅲ. 구 성
Ⅳ. 저술 의도와 목적
Ⅴ. 요 약
1장 예수님의 말씀 전승의 신빙성
2장 예수님의 사명
3장 구원 시대의 여명
4장 은혜의 때
5장 하나님의 새 백성
6장 자신의 임무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
7장 부활
Ⅴ. 서 평
1. 예수의 말씀 전승의 신뢰성
2. 구원시대의 여명
3. 자신의 임무에 대한 예수의 증거
Ⅵ. 총 평
본문내용
신 새로운 어법임이 분명하다.
‘abba’를 하나님께 대한 호칭으로 사용한 이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언어이다. 예수께서 선호하신 표현법이 쓰여졌다고 해서 그 구절이 진짜 로기온인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그러나 아바는 다르다.
2장 예수님의 사명
4.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예수님은 거의 지나칠 정도의 말로써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인정하셨다. 한가지 포현에 언급이 필요하다. 마 11:12-13, 눅 16:16절의 ‘요한까지’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요한을 포함하는 것으로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이해 가능하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배타적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누가에 따르면 세례자는 아직 율법과 선지자의 시기에 속하며 구원의 시기는 예수님과 함께 비로서 시작된다. 배타적으로 이해하는 마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이미 새로운 세계의 일부분이거나 혹은 새로운 세계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중간 시기를 소개하는 사람이다. 세례자를 새로운 세계를 여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보다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진술임이 분명하다. 초기 교회가 가졌던 경향은 세례자를 예수님께 종속시키는 납득할 만한 입자이었다. 따라서 마태가 제시하는 것이 바른 견해이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과 많은 것을 공유하셨고 비록 세레자 안에서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중개자를 발견하신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대해 열려있는 반면 요한은 금욕적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의 여명이 밝았다. 오라 너희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선포하셨다. 요한은 소망의 틀 안에 남아 있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성취를 가져왔다고 주장하신다. 요한은 여전히 율법의 영역에 속해 있었으나 예수님과 함께 복음이 시작되었다. 이 차이는 요한의 활동을 예수님의 등장의 결정적인 자극제로 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5. 예수님의 소명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자신의 소명을 체험하셨다. 5중의 전승이 예수님의 세례를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본문은 두 가지를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성령의 강림과 그에 동반되는 선포이다.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종래의 생각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의 앞에 서 있고 요한은 손이나 어떤 그릇으로 물을 퍼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맞지 않는다. 세례를 받는다 보다 침수를 경험한다. 스스로 잠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세례자의 면전에서 스스로 잠겼다고 말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를 예수님과 요한 둘 사이에서 사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누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집단적인 세례의 일부분으로 묘하사고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로도 그렇다. 예수님은 요한의 신호나 구령에 맞추어 요단강에 몸을 잠그는 백성들 가운데 서계셨고 함께 세례 받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 시에 하나님의 영이 그의 위에 내려오셨다고 말하며 이 점에 있어서는 모든 기사가 다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예수님이 세례 시에 체험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모다 정확하게 밝히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그때부터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역을 시작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사자와 구원의 시대의 창시자가 되도록 자질과 권위를 부여하고 계셨다. 세례시에 예수님이 체험하신 것은 자신의 소명이었다.
이사야 42:1에 따르면 성령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 하나님의 종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사상이 하늘의 선포에서 표현된 것처럼 예수님께 발생하였으며 예수님은 세례 시에 이사야에 약속된 하나님의 종임을 인식하셨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
아무튼 예수님이 자신의 세례의 순간에 대하여 지고의 중요성을 부여하신 것은 명백하다. 예수님은 그의 권위의 근거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대질문,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냐 아니냐는 대답 회피, 즉 예수께서 직접적인 대답을 피할 생각으로 하신 행동이 아니다. 그의 반대 질문이 진지한 것이라면 그 의미는 ‘나의 권위는 요한의 세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다시 구체적인 용어로 말하면 ‘나의 권위는 내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난 일에 근거한다’는 의미이다.
6. 계시를 받으심
마태복음 11:27(눅 10:22) 로기온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것들은 4행시이다. 첫 행은 주제를 도입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는 교리,지식, 거룩한 구비의 전수를 나타내는전문 용어이다. 따라서 25절의 타우타처럼 판다는 계시의 신비를 가리키고 1행위 의미는 ‘내 아버지께서 충분한 계시를 나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2행과 3행은 동의적 병행구로 이 주제를 부가설명한다. 그런데 이 두 행의 형식이 병렬적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종속적이며 정관사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이 행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번역될 것이다.
아버지만이 (실제로) 그 자식을 알듯이
마찬가지로 자식 만이 (실제로) 그 아버지를 안다.
마태복음 11:27은 예수님의 사명에 관한 중심적인 진술이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계시를 주셨다. 이것은 아버지되는 사람이 그 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큼 완벽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하나님에 관한 참 된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7. 하나님의 호칭으로서 ‘Abba\'
우리 복음서 내의 전승의 다섯 단계들은 예수께서 하나니을 ‘내 아버지’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이견 없이 확인해 준다. 이 다섯 단계는 예수께서 ‘아버지’라는 말을 호칭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그의 모든 기도에서 이 호칭을 사용하셨다는 것도 만장일치로 증거하고 있다.
유대교에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호칭이 풍부하였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이 용례가 오대 기도 문학에 신기하리만치 전혀 나오지
‘abba’를 하나님께 대한 호칭으로 사용한 이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언어이다. 예수께서 선호하신 표현법이 쓰여졌다고 해서 그 구절이 진짜 로기온인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그러나 아바는 다르다.
2장 예수님의 사명
4.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예수님은 거의 지나칠 정도의 말로써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인정하셨다. 한가지 포현에 언급이 필요하다. 마 11:12-13, 눅 16:16절의 ‘요한까지’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요한을 포함하는 것으로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이해 가능하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배타적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누가에 따르면 세례자는 아직 율법과 선지자의 시기에 속하며 구원의 시기는 예수님과 함께 비로서 시작된다. 배타적으로 이해하는 마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이미 새로운 세계의 일부분이거나 혹은 새로운 세계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중간 시기를 소개하는 사람이다. 세례자를 새로운 세계를 여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보다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진술임이 분명하다. 초기 교회가 가졌던 경향은 세례자를 예수님께 종속시키는 납득할 만한 입자이었다. 따라서 마태가 제시하는 것이 바른 견해이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과 많은 것을 공유하셨고 비록 세레자 안에서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중개자를 발견하신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대해 열려있는 반면 요한은 금욕적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의 여명이 밝았다. 오라 너희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선포하셨다. 요한은 소망의 틀 안에 남아 있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성취를 가져왔다고 주장하신다. 요한은 여전히 율법의 영역에 속해 있었으나 예수님과 함께 복음이 시작되었다. 이 차이는 요한의 활동을 예수님의 등장의 결정적인 자극제로 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5. 예수님의 소명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자신의 소명을 체험하셨다. 5중의 전승이 예수님의 세례를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본문은 두 가지를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성령의 강림과 그에 동반되는 선포이다.
예수님의 세례에 대한 종래의 생각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의 앞에 서 있고 요한은 손이나 어떤 그릇으로 물을 퍼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맞지 않는다. 세례를 받는다 보다 침수를 경험한다. 스스로 잠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세례자의 면전에서 스스로 잠겼다고 말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를 예수님과 요한 둘 사이에서 사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누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집단적인 세례의 일부분으로 묘하사고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로도 그렇다. 예수님은 요한의 신호나 구령에 맞추어 요단강에 몸을 잠그는 백성들 가운데 서계셨고 함께 세례 받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 시에 하나님의 영이 그의 위에 내려오셨다고 말하며 이 점에 있어서는 모든 기사가 다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예수님이 세례 시에 체험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모다 정확하게 밝히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그때부터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역을 시작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사자와 구원의 시대의 창시자가 되도록 자질과 권위를 부여하고 계셨다. 세례시에 예수님이 체험하신 것은 자신의 소명이었다.
이사야 42:1에 따르면 성령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 하나님의 종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사상이 하늘의 선포에서 표현된 것처럼 예수님께 발생하였으며 예수님은 세례 시에 이사야에 약속된 하나님의 종임을 인식하셨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
아무튼 예수님이 자신의 세례의 순간에 대하여 지고의 중요성을 부여하신 것은 명백하다. 예수님은 그의 권위의 근거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대질문,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냐 아니냐는 대답 회피, 즉 예수께서 직접적인 대답을 피할 생각으로 하신 행동이 아니다. 그의 반대 질문이 진지한 것이라면 그 의미는 ‘나의 권위는 요한의 세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다시 구체적인 용어로 말하면 ‘나의 권위는 내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난 일에 근거한다’는 의미이다.
6. 계시를 받으심
마태복음 11:27(눅 10:22) 로기온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것들은 4행시이다. 첫 행은 주제를 도입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는 교리,지식, 거룩한 구비의 전수를 나타내는전문 용어이다. 따라서 25절의 타우타처럼 판다는 계시의 신비를 가리키고 1행위 의미는 ‘내 아버지께서 충분한 계시를 나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2행과 3행은 동의적 병행구로 이 주제를 부가설명한다. 그런데 이 두 행의 형식이 병렬적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종속적이며 정관사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이 행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번역될 것이다.
아버지만이 (실제로) 그 자식을 알듯이
마찬가지로 자식 만이 (실제로) 그 아버지를 안다.
마태복음 11:27은 예수님의 사명에 관한 중심적인 진술이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계시를 주셨다. 이것은 아버지되는 사람이 그 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큼 완벽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하나님에 관한 참 된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7. 하나님의 호칭으로서 ‘Abba\'
우리 복음서 내의 전승의 다섯 단계들은 예수께서 하나니을 ‘내 아버지’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이견 없이 확인해 준다. 이 다섯 단계는 예수께서 ‘아버지’라는 말을 호칭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그의 모든 기도에서 이 호칭을 사용하셨다는 것도 만장일치로 증거하고 있다.
유대교에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호칭이 풍부하였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이 용례가 오대 기도 문학에 신기하리만치 전혀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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