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 후기 농업 생산력의 발달
1. 농지 개간과 농법
2. 농기구 및 수리시설
Ⅲ. 지주 전호제의 발달
1. 토지소유 관계
2. 지주전호제의 발달
3. 18세기의 토지개혁론
Ⅳ. 맺음말
Ⅱ. 조선 후기 농업 생산력의 발달
1. 농지 개간과 농법
2. 농기구 및 수리시설
Ⅲ. 지주 전호제의 발달
1. 토지소유 관계
2. 지주전호제의 발달
3. 18세기의 토지개혁론
Ⅳ. 맺음말
본문내용
여 사전이 확대됨으로써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이에 실학자들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지주들에게 집중된 토지를 국유화하고 백성들에게 재분배하자는 토지제도 개혁론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인 실학자가 유형원이다. 그는 정전법을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여기고, 관리·선비·농민 등에게 토지를 차등 분배하여 자영농을 육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농민에게 1호마다 1경씩 나누어주고 조세를 내게 하며, 4경마다 1명의 군인이 나오게 한다. 이와 같이 자영농을 육성하여 농병을 일치시켜야 군역 대신 군포를 납부하는 군역의 폐해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유생에게는 2~4경의 토지를 주고, 현직 관리에게는 품계에 따라 6~12경을 준다. 유생과 관리는 병역을 면제한다. 상공인에게는 농민의 절반을 주고, 무당·승려·여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토지를 받은 자가 사망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한 때에는 관청에 보고하여 다시 지급받도록 한다. 전세는 실제 수확의 10분의 1만 바치고 다른 부담을 부과하지 않는다.
유형원의 균전론은 농민의 최저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토지개혁론이었으나, 사·농·공·상의 신분에 따라 차등지급하도록 함으로써 신분제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실학파의 토지개혁사상 가운데 최초의 체계적인 안으로서 토지소유제도를 개혁하여 지주제의 폐해를 타파하려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유형원의 균전론은 정책으로 채택되지는 못하였으나 후대의 실학파 학자들에 영향을 미쳐 홍대용·박지원 등으로 계승되었다.
4) 한전론
18세기 말에 이르러 정석유, 임박유, 서명신 등 농촌 지식인과 이익이 제기한 전제개혁론이다. 당시 국민들의 토지소유 형태가 권세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광대한 지역을 소유하고 대다수 국민들은 적은 토지만을 보유하고 있어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출발한 개혁론이다. 개혁론의 근저에는 국가의 모든 토지가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유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며 토지 소유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용은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국가에서 일가(一家)에 소요되는 기준량을 정하여 토지면적을 제한하고 그 전지를 1호(戶)에 영업전(永業田)으로 지정해 준다.
② 영업전으로 제한된 전지 내에서 매매행위가 있을 때 엄벌한다. 그러나 그 이외의 전지는 매매를 허락하여 토지소유의 평등을 이루도록 한다.
③ 전지매매는 양안(量案:토지대장)에 기록을 마친 후 문권(文券)을 주고 엄격한 규제로써 매매를 방지한다.
이러한 이론은 당시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전지를 당장 빼앗아 개혁하자는 이론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토지 소유의 균형을 맞추어가자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다양한 개혁론의 한 부분이다.
후대의 정약용은 한전제를 시행할 경우 직접 농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도 영업전을 소유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과 대토지 소유를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5) 둔전론
정전제적 토지소유관계를 기반으로 해서 현실에 맞추어 구상했으며 서울과 각도, 각읍, 북방의 변읍, 동남방의 도서에 모두 둔전을 설치하고, 자금은 정부에서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부민들이 출자를 원하면 이를 허락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설치한 둔전은 정전제적 농지제도, 즉 이랑을 파서 일정한 면적의 농지를 만들어 수전은 영남식의 이앙법, 한전은 서북식의 견종법으로, 더욱 좋은 것은 1무 3견의 농법으로서 재배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명농자나 자금을 댄 부농층을 각 둔전의 둔전장으로 임명하여 둔전민에게 농법을 가르치게 하고, 둔전민이 농법을 습득한 후에는 각각 자기 향리에 돌아가 지도적인 농민이 되게 함으로써 농업을 전환시키고자 했다.
둔전론은 한전론과는 달랐는데 그 이유는 첫째, 한전론은 영세소농층의 안정된 자작농화를 목표로 한 토지개혁론인 데 비해 둔전론은 영농적 부농층의 성장을 전제하여 그 안에서 무전농민들이 임금노동자로 안정될 것을 지향했다. 둘째로는 한전론은 단순히 토지재분배론으로 그치고 있으나 둔전론은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농법개량과 국가재정의 충실이나 농민경제의 안정을 위한 집단농장적 의미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셋째로는 한전론은 정전제적 토지소유의 이념을 거의 그대로 따르는 것이나 둔전론은 정전론의 농지형태는 따르되 그 토지균분의 이념은 당시의 사회경제 상황을 인정한 위에서 받아들였다. 넷째로는 한전론은 봉건적인 지주전호관계를 부정한 데 비해 둔전론은 지주전호관계의 질적인 전환을 전제로 했다.
Ⅳ. 맺음말
조선 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농업 부분 뿐 아니라 토지소유관계와 지주전호 간의 관계 등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조선 후기엔 새로운 농사 방법인 이앙법과 견종법이 보급되고, 시비법의 발달, 수리 시설의 개선 ,농기구의 개량 등의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이로 인하여 식량 생산 중심의 농업이 상업적 농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앙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이 감소하여 경작지의 규모를 크게 확대하는 광작이 유행하여 농촌의 계층 분화를 가져오기도 하였고 결과적으로 삼정문란을 대표로 하는 조세제도의 문란은 농민경제를 파탄에 지경까지 몰고 가기까지 하였다. 삼정문란과 소작료 부담의 가중으로 농업경영을 통한 성장이 힘들었기 때문에 부농층의 일부는 직접 농업경영을 담당하기보다는 소작료나 고리대에 의존하여 부를 축적해 가는 지주로 변신하였고, 다른 일부는 계속 농업경영에 종사하면서 그들의 성장을 저지하였던 중세적 제도를 철폐시키고자 하였다.
위와 같은 삼정의 폐단은 토지제도의 개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여러 실학자들에게서 다양한 토지개혁론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토지제도 전반을 바꾸지는 못한 채 19세기에 이르렀고, 농민들은 전시기에 행했던 항조나 항세운동을 적극화하여 그들의 성장을 저지하였던 중세적 제도를 부정하는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그러한 것들의 절정을 보여주는 결과이며 그들은 농업경영을 통한 성장과 아울러 농민항쟁을 통하여 근대적 생산관계를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실학자들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지주들에게 집중된 토지를 국유화하고 백성들에게 재분배하자는 토지제도 개혁론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인 실학자가 유형원이다. 그는 정전법을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여기고, 관리·선비·농민 등에게 토지를 차등 분배하여 자영농을 육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농민에게 1호마다 1경씩 나누어주고 조세를 내게 하며, 4경마다 1명의 군인이 나오게 한다. 이와 같이 자영농을 육성하여 농병을 일치시켜야 군역 대신 군포를 납부하는 군역의 폐해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유생에게는 2~4경의 토지를 주고, 현직 관리에게는 품계에 따라 6~12경을 준다. 유생과 관리는 병역을 면제한다. 상공인에게는 농민의 절반을 주고, 무당·승려·여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토지를 받은 자가 사망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한 때에는 관청에 보고하여 다시 지급받도록 한다. 전세는 실제 수확의 10분의 1만 바치고 다른 부담을 부과하지 않는다.
유형원의 균전론은 농민의 최저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토지개혁론이었으나, 사·농·공·상의 신분에 따라 차등지급하도록 함으로써 신분제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실학파의 토지개혁사상 가운데 최초의 체계적인 안으로서 토지소유제도를 개혁하여 지주제의 폐해를 타파하려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유형원의 균전론은 정책으로 채택되지는 못하였으나 후대의 실학파 학자들에 영향을 미쳐 홍대용·박지원 등으로 계승되었다.
4) 한전론
18세기 말에 이르러 정석유, 임박유, 서명신 등 농촌 지식인과 이익이 제기한 전제개혁론이다. 당시 국민들의 토지소유 형태가 권세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광대한 지역을 소유하고 대다수 국민들은 적은 토지만을 보유하고 있어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출발한 개혁론이다. 개혁론의 근저에는 국가의 모든 토지가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유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며 토지 소유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용은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국가에서 일가(一家)에 소요되는 기준량을 정하여 토지면적을 제한하고 그 전지를 1호(戶)에 영업전(永業田)으로 지정해 준다.
② 영업전으로 제한된 전지 내에서 매매행위가 있을 때 엄벌한다. 그러나 그 이외의 전지는 매매를 허락하여 토지소유의 평등을 이루도록 한다.
③ 전지매매는 양안(量案:토지대장)에 기록을 마친 후 문권(文券)을 주고 엄격한 규제로써 매매를 방지한다.
이러한 이론은 당시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전지를 당장 빼앗아 개혁하자는 이론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토지 소유의 균형을 맞추어가자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다양한 개혁론의 한 부분이다.
후대의 정약용은 한전제를 시행할 경우 직접 농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도 영업전을 소유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과 대토지 소유를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5) 둔전론
정전제적 토지소유관계를 기반으로 해서 현실에 맞추어 구상했으며 서울과 각도, 각읍, 북방의 변읍, 동남방의 도서에 모두 둔전을 설치하고, 자금은 정부에서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부민들이 출자를 원하면 이를 허락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설치한 둔전은 정전제적 농지제도, 즉 이랑을 파서 일정한 면적의 농지를 만들어 수전은 영남식의 이앙법, 한전은 서북식의 견종법으로, 더욱 좋은 것은 1무 3견의 농법으로서 재배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명농자나 자금을 댄 부농층을 각 둔전의 둔전장으로 임명하여 둔전민에게 농법을 가르치게 하고, 둔전민이 농법을 습득한 후에는 각각 자기 향리에 돌아가 지도적인 농민이 되게 함으로써 농업을 전환시키고자 했다.
둔전론은 한전론과는 달랐는데 그 이유는 첫째, 한전론은 영세소농층의 안정된 자작농화를 목표로 한 토지개혁론인 데 비해 둔전론은 영농적 부농층의 성장을 전제하여 그 안에서 무전농민들이 임금노동자로 안정될 것을 지향했다. 둘째로는 한전론은 단순히 토지재분배론으로 그치고 있으나 둔전론은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농법개량과 국가재정의 충실이나 농민경제의 안정을 위한 집단농장적 의미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셋째로는 한전론은 정전제적 토지소유의 이념을 거의 그대로 따르는 것이나 둔전론은 정전론의 농지형태는 따르되 그 토지균분의 이념은 당시의 사회경제 상황을 인정한 위에서 받아들였다. 넷째로는 한전론은 봉건적인 지주전호관계를 부정한 데 비해 둔전론은 지주전호관계의 질적인 전환을 전제로 했다.
Ⅳ. 맺음말
조선 후기에는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농업 부분 뿐 아니라 토지소유관계와 지주전호 간의 관계 등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조선 후기엔 새로운 농사 방법인 이앙법과 견종법이 보급되고, 시비법의 발달, 수리 시설의 개선 ,농기구의 개량 등의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이로 인하여 식량 생산 중심의 농업이 상업적 농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앙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이 감소하여 경작지의 규모를 크게 확대하는 광작이 유행하여 농촌의 계층 분화를 가져오기도 하였고 결과적으로 삼정문란을 대표로 하는 조세제도의 문란은 농민경제를 파탄에 지경까지 몰고 가기까지 하였다. 삼정문란과 소작료 부담의 가중으로 농업경영을 통한 성장이 힘들었기 때문에 부농층의 일부는 직접 농업경영을 담당하기보다는 소작료나 고리대에 의존하여 부를 축적해 가는 지주로 변신하였고, 다른 일부는 계속 농업경영에 종사하면서 그들의 성장을 저지하였던 중세적 제도를 철폐시키고자 하였다.
위와 같은 삼정의 폐단은 토지제도의 개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여러 실학자들에게서 다양한 토지개혁론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토지제도 전반을 바꾸지는 못한 채 19세기에 이르렀고, 농민들은 전시기에 행했던 항조나 항세운동을 적극화하여 그들의 성장을 저지하였던 중세적 제도를 부정하는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그러한 것들의 절정을 보여주는 결과이며 그들은 농업경영을 통한 성장과 아울러 농민항쟁을 통하여 근대적 생산관계를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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