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목차
Ⅰ. 낭만파 음악 소개
Ⅱ. 음악가 소개
1. 슈베르트
① 슈베르트의 생애
② 슈베르트 작품과 특징
③ 슈베르트의 3대 연가곡집
④ 슈베르트 작품해설
⑤ 슈베르트를 찾아서
2. 멘델스존
① 멘델스존의 생애
② 멘델스존 작품과 특징
③ 멘델스존 총평
④ 멘델스존을 찾아서
3. 베르디
① 베르디의 생애
② 베르디의 오페라
③ 베르디의 작품들
④ 베르디 작품해설
⑤ 베르디 총평
⑥ 베르디를 찾아서
■ 참고문헌
Ⅱ. 음악가 소개
1. 슈베르트
① 슈베르트의 생애
② 슈베르트 작품과 특징
③ 슈베르트의 3대 연가곡집
④ 슈베르트 작품해설
⑤ 슈베르트를 찾아서
2. 멘델스존
① 멘델스존의 생애
② 멘델스존 작품과 특징
③ 멘델스존 총평
④ 멘델스존을 찾아서
3. 베르디
① 베르디의 생애
② 베르디의 오페라
③ 베르디의 작품들
④ 베르디 작품해설
⑤ 베르디 총평
⑥ 베르디를 찾아서
■ 참고문헌
본문내용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C장조의 판타지라는 제목의 피아노를 위한 대곡이 완성되었다. 이 곡의 제2악장에 가곡 <유랑하는 사람>의 선율이 사용되고 있어서 <방랑자 환상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작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b단조의 2악장의 교향곡으로서, 제3악장의 스케치와 그 첫 부분의 스코어가 되어 있을 뿐이라서 <미완성>이라 불리고 있다. 이 곡이 미완성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행해지고 있으나, 아마 작곡자가 애초부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완성시켜야겠다는 의욕을 갖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으면 그냥 무심코 잊어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 슈베르트는 대작을 쓰는 일에 능숙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인지 오페라는 부분적으로는 아름답지만은 전체로서는 허술한 데가 있어서 인상이 약해지는 감을 많이 느낄 수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교향곡도 끊임없이 전체를 생각하면서 주제를 조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로 이런 식으로 두뇌를 쓰는 일은 슈베르트로서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대개 사람이란 자기의 약점이나 결점은 잊어버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구상이 막히면 이를 계기로 하여 작곡을 중지하고 곧 잊어버리고 마는 일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미완성>은 다음해 그가 시타이어의 음악협회의 명예회원으로 추천되어 이에 대한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작품으로서 이 협회에 보내졌다. 받은 쪽에서는 곧 제3악장 이하가 도착하리라 생각하고 당장에 연주를 하지 않고 있던 중 세월이 지나 버려 1865년 에 발견될 때까지 슈베르트의 친구이며 시타이어의 음악협회의 위원이던 안젤름 휘 텐브레너의 책상 서랍에서 잠자고 있었다.
1823년은 수확이 많은 해였다. 극적 작품으로 4월에 완성된 징시필 <반역자들>을 비롯하여, 오페라 <피에라브라스>가 10월에, 음악이 있는 로만스 극 <로자문데>는 가을에 완성되었다. <로자문데>만은 1823년 12월 20일에 테아터안 데어 빈에서 공연되었으나, 흥행이 2일에 그치고 말았다. 다른 2개의 공연을 작곡자 자신은 생전에 듣지 못했다.
가곡으로서는 작곡한 날짜가 불분명한 <물위에서 노래한다>, <그대는 나의 안식처>의 두 명작에다가 9월에 완성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연작 20곡이 있다. 이 연작은 1824년에 출판되었다. 피아노곡으로서는 <34개의 감상적인 왈츠>, <악흥의 때>, <12개의 독일 무곡> 등이 있다. 게다가 이해부터는 슈베르트를 둘러싸고 그의 새 작품을 듣는 모임이 여기저기의 가정에서 개최되게 되었다. 이것을 ‘슈베르티아데’라 하였다. 이후 시타이어와 그라쯔의 음악협회는 그를 명예회원으로 추천했고, 전자에게는 b단조 <미완성>교향곡을 보냈다.
10월 25일 베버의 <오이리안테>가 빈에서 공연되어 이 기회에 슈베르트는 그 작곡자와 면담하였는데, 이때 평을 해 달라는 청을 받고 솔직하게 혹평을 하였으나 베버는 화를 조금도 내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알폰소와 에스트렐라>를 공연시키려고 애를 써 주었으나 끝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 해와 그 다음해가 아마도 슈베르트의 짧은 생애 중에서도 가장 인생의 보람을 느꼈던 세월일 것이다. 게다가12월에는 당시 여류성악가의 제1인자였던 안나 밀더가 베를린에서 편지를 보내어 슈베르트의 가곡에 감동하였다고 말하고, 아울러 그의 오페라를 베를린에 공연할 마음은 없느냐고 물어왔다. 곧 <알폰소와 에스트렐라>의 스코어를 보냈으나 1825년 봄에 공연될 전망은 없다는 회답이었다. 또 1824년에는 다시 에스테르하지 백작가의 가정교사로서 헝가리에 가서 여름을 보내며 몇 개의 피아노 연탄곡과 독주곡을 작곡하였다. 오페라에서는 계속 실패였으나 1825년 2개의 피아노 소나타 A장조, op. 42와 D장조, op. 53은 모두 호평을 받았고 특히 전자는 곧 출판되어 북독일 스위스의 음악애호가들을 기쁘게 했다. 이 해 처음으로 그는 친구인 화가 쉬빈트의 이웃으로 이사하여 그들의 친분도 더욱 두터워지고 또 슈베르티아데도 큰 성황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지병이 재발하여 생활을 어둡게 하였다. 5월 20일 포글과 함께 시타이어로 갔는데 그 도중에 가시타인의 온천장에 체재하면서 가시타인 교향곡을 작곡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전혀 없고, 현지로서는 1828년에 완성한 C장조의 대형 교향곡의 일부 초고가 여기에서 쓰였다고 인정되고 있는 정도이지만 이것도 정설은 아니다. 이 해의 가곡의 명작은 영국의 시인 윌터 스콧트의 <호수 위의 미인> 가운데에 엘렌이 부르는 노래 <아베 마리아>의 독어역 작곡이다. 이밖에 빈에서 인기가 있었던 여류 성악가 조피 물러를 위한 <미뇽의 노래> 4곡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작곡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정한 직업이 없는 것은 그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의 걱정거리였다. 작곡은 차츰차츰 출판되기는 하였지만 거기에서 얻어지는 수입은 충분하지 못하고, 게다가 출판업자와의 교섭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아 그것이 또한 불쾌의 씨가 되었다. 1826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궁정예배당의 부악장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는 열심히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해에도 피아노의 명작, G장조 소나타, op. 78이 작곡되었다. 이것은 보통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작곡된 가곡 <들어라, 들어라, 종달새를>은 교외의 야외 맥주 집에서 담소하는 사이에 작곡되었다고 한다. 슈베르트의 동생 페르디난트가 1845년에 무반주 남성합창곡으로 편곡한 이래, 그러한 형태로 널리 알려져 있는 <독일 미사>는 이 해부터 1827년에 걸쳐서 만들어 진 것으로서 원곡은 혼성 4부 합창, 관악기 및 오르간반주가 붙어 있다. op. 99의 상쾌한 Bb장조의 피아노 트리오는 1827년의 작품이지만 작곡 날짜는 분명치 않다. op. 142의 즉흥곡도 이 해의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보다도 중요한 작품은 <겨울 나그네> 연작 가곡이다. 2월에 앞부분의 반과 10월에는 그 나머지가 작곡되어 모두 곧 출판되기는 하였지만, 출판 당시에는 그렇게 호평만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9월에는 피아니스트인
1823년은 수확이 많은 해였다. 극적 작품으로 4월에 완성된 징시필 <반역자들>을 비롯하여, 오페라 <피에라브라스>가 10월에, 음악이 있는 로만스 극 <로자문데>는 가을에 완성되었다. <로자문데>만은 1823년 12월 20일에 테아터안 데어 빈에서 공연되었으나, 흥행이 2일에 그치고 말았다. 다른 2개의 공연을 작곡자 자신은 생전에 듣지 못했다.
가곡으로서는 작곡한 날짜가 불분명한 <물위에서 노래한다>, <그대는 나의 안식처>의 두 명작에다가 9월에 완성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연작 20곡이 있다. 이 연작은 1824년에 출판되었다. 피아노곡으로서는 <34개의 감상적인 왈츠>, <악흥의 때>, <12개의 독일 무곡> 등이 있다. 게다가 이해부터는 슈베르트를 둘러싸고 그의 새 작품을 듣는 모임이 여기저기의 가정에서 개최되게 되었다. 이것을 ‘슈베르티아데’라 하였다. 이후 시타이어와 그라쯔의 음악협회는 그를 명예회원으로 추천했고, 전자에게는 b단조 <미완성>교향곡을 보냈다.
10월 25일 베버의 <오이리안테>가 빈에서 공연되어 이 기회에 슈베르트는 그 작곡자와 면담하였는데, 이때 평을 해 달라는 청을 받고 솔직하게 혹평을 하였으나 베버는 화를 조금도 내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알폰소와 에스트렐라>를 공연시키려고 애를 써 주었으나 끝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 해와 그 다음해가 아마도 슈베르트의 짧은 생애 중에서도 가장 인생의 보람을 느꼈던 세월일 것이다. 게다가12월에는 당시 여류성악가의 제1인자였던 안나 밀더가 베를린에서 편지를 보내어 슈베르트의 가곡에 감동하였다고 말하고, 아울러 그의 오페라를 베를린에 공연할 마음은 없느냐고 물어왔다. 곧 <알폰소와 에스트렐라>의 스코어를 보냈으나 1825년 봄에 공연될 전망은 없다는 회답이었다. 또 1824년에는 다시 에스테르하지 백작가의 가정교사로서 헝가리에 가서 여름을 보내며 몇 개의 피아노 연탄곡과 독주곡을 작곡하였다. 오페라에서는 계속 실패였으나 1825년 2개의 피아노 소나타 A장조, op. 42와 D장조, op. 53은 모두 호평을 받았고 특히 전자는 곧 출판되어 북독일 스위스의 음악애호가들을 기쁘게 했다. 이 해 처음으로 그는 친구인 화가 쉬빈트의 이웃으로 이사하여 그들의 친분도 더욱 두터워지고 또 슈베르티아데도 큰 성황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지병이 재발하여 생활을 어둡게 하였다. 5월 20일 포글과 함께 시타이어로 갔는데 그 도중에 가시타인의 온천장에 체재하면서 가시타인 교향곡을 작곡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전혀 없고, 현지로서는 1828년에 완성한 C장조의 대형 교향곡의 일부 초고가 여기에서 쓰였다고 인정되고 있는 정도이지만 이것도 정설은 아니다. 이 해의 가곡의 명작은 영국의 시인 윌터 스콧트의 <호수 위의 미인> 가운데에 엘렌이 부르는 노래 <아베 마리아>의 독어역 작곡이다. 이밖에 빈에서 인기가 있었던 여류 성악가 조피 물러를 위한 <미뇽의 노래> 4곡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작곡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정한 직업이 없는 것은 그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의 걱정거리였다. 작곡은 차츰차츰 출판되기는 하였지만 거기에서 얻어지는 수입은 충분하지 못하고, 게다가 출판업자와의 교섭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아 그것이 또한 불쾌의 씨가 되었다. 1826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궁정예배당의 부악장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는 열심히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해에도 피아노의 명작, G장조 소나타, op. 78이 작곡되었다. 이것은 보통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작곡된 가곡 <들어라, 들어라, 종달새를>은 교외의 야외 맥주 집에서 담소하는 사이에 작곡되었다고 한다. 슈베르트의 동생 페르디난트가 1845년에 무반주 남성합창곡으로 편곡한 이래, 그러한 형태로 널리 알려져 있는 <독일 미사>는 이 해부터 1827년에 걸쳐서 만들어 진 것으로서 원곡은 혼성 4부 합창, 관악기 및 오르간반주가 붙어 있다. op. 99의 상쾌한 Bb장조의 피아노 트리오는 1827년의 작품이지만 작곡 날짜는 분명치 않다. op. 142의 즉흥곡도 이 해의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보다도 중요한 작품은 <겨울 나그네> 연작 가곡이다. 2월에 앞부분의 반과 10월에는 그 나머지가 작곡되어 모두 곧 출판되기는 하였지만, 출판 당시에는 그렇게 호평만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9월에는 피아니스트인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