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상][중국 과학사상][한국 과학사상][조선시대 과학사상][서재필][소태산 대종사]과학사상의 지향점, 중국의 과학사상, 한국의 과학사상, 조선시대의 과학사상, 서재필의 과학사상, 소태산 대종사의 과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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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과학사상][중국 과학사상][한국 과학사상][조선시대 과학사상][서재필][소태산 대종사]과학사상의 지향점, 중국의 과학사상, 한국의 과학사상, 조선시대의 과학사상, 서재필의 과학사상, 소태산 대종사의 과학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과학사상의 지향점

Ⅱ. 중국의 과학사상

Ⅲ. 한국의 과학사상

Ⅳ. 조선시대의 과학사상

Ⅴ. 서재필의 과학사상

Ⅵ. 소태산 대종사의 과학사상

참고문헌

본문내용

로운 자연관에서 본다면 생물과 인간은 물론 우주도 지구도 생명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고, 현재 이 순간에도 모두가 숨쉬고 진화하고 있다. 실지 인간이란 이와 같은 우주라는 생명체의 일부인 것이다. 인간의 몸에는 수백억의 세포가 있고 이들 하나하나가 생명을 가지면서 한 인간을 형성한다. 마찬가지로 지구는 한 개의 세포처럼 살아 있다(루이스 토머스). 지구가 미묘하게 조화를 유지하면서 살아 있음은 라 부럭(『지구생명권』)이 밝혔다. 우리 인간은 분명히 살아 있는 지구의 한 세포로서 존재한다. 이 내용은 노장의 사상과 같으며 \"나지(裸地)의 기를 합하여 만물을 생성한다.\"는 동양사상이 단순한 철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과학의 진리임이 입증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당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자기조직계로서의 생명체를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일이다. 즉 공해와 환경오염, 핵폭탄의 위험이다. 우리는 죽은 물질을 분자원자 등 미립자로 분석한 뒤 종합하여 하나의 목적물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것이 큰 잘못임을 생각해야 할 단계에 온 것이다. 인간을 마치 톱니와 작은 부품을 만들어 조립한 시계처럼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살아 있는 인간을 시계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교육은 전문지식밖에 모르는 전문바보를 만들어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자연, 혼이 있는 인간이라야 한다. 전인적 인간이 요구된다.
Ⅴ. 서재필의 과학사상
서재필(徐載弼, 1863~1951)은 『독닙신문』(1896년 4월 7일부터 30일까지 ‘독닙’으로 표기됨)을 창간함으로써, 한국 언론사에서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기존의 서재필 연구는 언론자유, 민권확립, 천부인권 등 서구 민주주의적 요소에 집중되었다. 서재필이 오히려 과학·기술의 논리와 보편성의 원리에 충실하였으며, ‘기술 결정론적’ 발상을 중시했음을 밝힌다. 핵심적으로 서재필의 정보지 창간, ‘미디어 결정론’에 관한 정보 혁명의 발상 등을 그의 과학·기술 사상에서 도출한다.
14년에 걸친 외국 생활을 뒤로 하고, 1896년 1월 1일 귀국한 서재필은 그해 4월 7일 『독닙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닙신문』은 구어체 한글 전용의 획기적 시도와 아울러 영문판을 함께 발행함으로써, 국제성을 동시에 띄고 있었다. 또한 『독닙신문』은 독립, 시민의 ‘권리’, 언론 자유 등 서구 민주주의 사회의 보편적 원리를 뿌리내리기에 일조를 하였다.
『독닙신문』의 ‘독립’ 은 국가의 독립 뿐 아니라, 개인의 독립을 상징적으로 표출했다. 서재필의 사상은 인간 행위를 위한 자유의 사상이었으며, 『독립신문』은 서구의 사상을 전파하는 계몽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문을 통해, 정부가 인민의 상황을 알게 하고, 인민은 정부의 일을 알도록 하였다. 신문이 정부와 인민사이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고, 정부와 인민을 교육시킨 것이다.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일본공사 코무라(小村壽太郞)와의 대화를 소개하였다. 코무라는 한국은 미국과 사상이 다르고, 민도가 뒤떨어진 나라이니, 미국사상인 민권주의사상, 즉 ‘데모크라시’를 전파하지 말 것을 서재필에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환국한 주요 목적이 인민을 가르치고, 지도, 계발하려는 의도임을 분명히 하고, 민권확립에 주력했다. 그는 청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완전한 자주독립의 국가건설의 취지를 자서전에서 밝혔다.
개인은 자유롭게 사회관계를 형성하고, ‘목적을 위한 수단’을 선택한다. 그러나 자유가 상황에 따라서는 ‘부자유’와 ‘사슬’(Chain)에 매몰될 수 있다. ‘수단이 목적’을 압도하는 경우 ‘기술결정론’의 발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분석에서, 목적을 위한 수단과 인간행위에 주안점을 두었다. 같은 맥락에서 서재필은 직, 간접적으로 기술에 매몰된 언론관을 폈다.
과거 조선의 언론사는 의견, 언어의 역사가 주축을 이루었지만,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사실’(‘정보’)의 질서를 바탕으로 취재하여 작성된 기사를 지면에 반영시켰다. 서재필은 ‘형식적 합리성’(formal, 혹은technological rationality)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기술 합리성’은 서류(files)가 중요한데, 그 핵심은 기업에서 부기(簿記, files)이다. 그 예로 서재필은 「한국의 금융」(Korean Finance)의 기사에서 조선의 \'사실의 언급\'(a statement of facts)을 신뢰할 수 없는 정보로 단정하고, “재정, 그리고 사건에 대한 정확한 조사로부터 만들어진 표의 기록 통계가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탄하였다. 조선인은 ‘사회적 사실’(social facts)의 강제성·보편성·전달성 성격을 숙지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국가운영에서 중요한 세입 제도에 문제점이 속출하였다. 정부가 납세자로부터 거두어들인 세입이 실제 받아야할 것의 두 배나 되었으며, 세입의 대부분이 부패한 관리에 의해 탕진되었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과다하게 거두어들인 조세는 체계적으로 쓰여 지지 못했다. 납세자는 궁핍하여지고, 정부도 재정적자에 허덕였다. 이 상황에서 인민은 양반(兩班)을 불신하였으며, 커뮤니케이션은 왜곡되었고,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창간, 창립하고 기술 합리성, 그리고 과학적·기술적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기술 사상은 당시 유행하였던 ‘척사론(斥邪論)’에서 주장, 즉, 자강을 도모하기 위하여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자는 채서사상(採西思想)과 일맥상통하였다. 말하자면 자신의 도(道)를 지키되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한다는 후일, 『황성신문』 등에서 집약적으로 표출되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1880년초 金允植 제창)에 서재필 은 부분적으로 동조를 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서재필은 서구의 기술사고에 근거하여, 새판을 짰다. 즉, 서재필은 하이데거의 `판짜기(enframing)\', 그리고 `판짜기의 도전(challenging setting upon)\'으로 현존의 진리의 위협에 대항하여, 기술로 새 틀 짜기를 시도하였다. 그는 존재의 위치, 기술, 미디어, 교육, 뉴스 형식, 사회 질서 등에 대한 새로운 판짜기에 도전한 것이다.
『독닙신문』 창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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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3.2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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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5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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