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암 이현일]갈암 이현일의 성리학, 갈암 이현일의 경세관, 갈암 이현일의 민본정치론, 갈암 이현일의 理(이)중심적 사고, 갈암 이현일의 율곡 이이 비판, 갈암 이현일의 복제 문제, 갈암 이현일과 전통유학 분석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갈암 이현일]갈암 이현일의 성리학, 갈암 이현일의 경세관, 갈암 이현일의 민본정치론, 갈암 이현일의 理(이)중심적 사고, 갈암 이현일의 율곡 이이 비판, 갈암 이현일의 복제 문제, 갈암 이현일과 전통유학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갈암 이현일의 성리학

Ⅲ. 갈암 이현일의 경세관

Ⅳ. 갈암 이현일의 민본정치론
1. 신뢰성 구축을 위한 민본정치의 추구
2. 공정성의 정치

Ⅴ. 갈암 이현일의 理(이)중심적 사고
1. 理氣관념
2. 太極
3. 實然之理
4. 條理
5. 道

Ⅵ. 갈암 이현일의 율곡 이이 비판
1. 四端七情論
2. 人心道心說

Ⅶ. 갈암 이현일의 복제 문제

Ⅷ. 갈암 이현일과 전통유학
1. 전통유학의 동요와 갈등
2. 순유(醇儒)적 전통유학의 고수

참고문헌

본문내용

孝宗이 仁祖의 王統을 이어받았으므로 葛庵은 宋時烈의 無二統不貳斬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葛庵이 비판하는 宋時烈의 말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맏아들이 어른이 된 뒤에 죽어서 그 아버지가 이미 斬衰服을 입은 다음에 다시 本妻에게서 태어난 둘째아들을 들여세워 맏아들로 삼았다가 그 本妻에게서 난 둘째아들이 죽으면 또 斬衰服을 입는다. 그렇게 본다면 \'正統이 둘일 수 없고, 斬衰服을 두 번 입을 수 없다\'라고 한 뜻에서 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慈懿大妃가 昭顯世子가 죽었을 때 喪服을 입었고 또 孝宗을 위하여 斬衰三年服을 입는다는 것은 \'尊\'이 두 개가 없다는 正統의 問題에 비추어볼 때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宋時烈의 주장이지만 葛庵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主張이다. 그것은 昭顯世子가 王位를 繼承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孝宗이 仁祖의 王統을 繼承하였다는 측면에서 仁祖의 代를 이은 것은 孝宗이기 때문에 마땅히 慈懿大妃가 斬衰三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葛庵은 宋時烈의 주장이 옳은 것 같으나 틀렸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批判을 하고 있다.
삼가 생각하건대, [禮記]<喪服小記>에 시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고 長子가 죽었을 경우에 그 아내인 適婦를 위하여 시어머니는 小功服을 입는다고 하였다. 疏에 말하기를 禮는 시부모가 適婦를 위하여 大功服을 입는다고 하였다.
지금 시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 남편이 有故로 祖上의 代를 잇지 못하여 祖上에게 제사지낼 수가 없기 때문에 庶婦를 위하여 입는 服을 입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代를 이어야할 자가 일찍 죽거나 몹쓸 병이 들어 뒤를 이을 사람이 없을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다. 또한 葛庵은 [禮記]에서 적부라고 한 것은 長子가 成人이 되어 죽더라도 傳重을 받지 못하고 代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適統에 歸依하지 못하여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葛庵은 王統은 孝宗이 이어받았고 王統의 실마리는 昭顯世子에서 이미 끊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Ⅷ. 갈암 이현일과 전통유학
1. 전통유학의 동요와 갈등
갈암이 살았던 17세기의 조선유학은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이 주류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6세기 초엽에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이 17세기에는 이미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갈암에 의해 비판된 바 있는 지봉 이수광의 경우를 하나의 예로 들기로 하자. 그의 저술인 {지봉유설 芝峯類說}에는 양명우파인 나홍선(念庵 羅洪先, 1504~1564)과 양명좌파로 지목받는 초횡(澹園 焦, 1541~1620)의 시나 학설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학의 경우에도 이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과 이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17세기 초에는 조선에 이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와 세계지도가 소개되어 서학이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지봉 이수광의 경우만 하더라도 {지봉유설}에서 여기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을 통한 양명학이나 서학의 전래와 유포는 전통유학의 동요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이나 서학의 유입에 의한 전통유학의 동요가 외적인 자극에 의한 것이라면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갈등은 전통유학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같은 성리학자로서 주자학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을 예로 든다면 백호 윤휴(白湖 尹, 1617~1680)와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을 들 수 있다. 백호나 서계는 당시 전통유학의 성역이었던 주자학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자주적인 입장에서 경전 해석을 시도하였다. 곧 백호는 {독서기 讀書記}를 통하여, 서계는 {사변록 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적 경학에 대하여 정면으로 비판하고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같이 17세기의 전통유학은 심각한 대내외적인 도전과 갈등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전통적인 유학자들은 이러한 도전과 갈등에 대하여 일정한 대응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 순유(醇儒)적 전통유학의 고수
이 시기에 전통유학의 고수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이 대응에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 다름 아닌 갈암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성리학이 적극적으로 주자학 정통주의와 퇴계학 부흥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주자학 나아가서 퇴계학의 유일적 정통주의를 모색한 것은, 순수한 사상사적 관점으로 이해한다면, 당시 이단사설(異端邪說)로 받아 들여졌던 양명학이나 서학의 영향과 주자학 귄위에의 도전에 따른 전통유학의 동요와 갈등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소명 의식의 발로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연유에서 그는 정통주의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같은 성리학 가운데에서도 그의 학문적 배경을 이루어 온 퇴계학에 의존하여 그 정통성의 \'뿌리\'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세론에 있어서는 당시 성리학자의 비경세유학적인 학문경향을 비판하면서 공맹(孔孟) 선진유학의 경세정신을 재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갈암의 성리학에는 주자학이나 선진유학 이외의 다른 사상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말하자면 그의 성리학에서는 양명학이나 서학의 영향은 찾아보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또한 전통적 사상인 불교나 도가의 흔적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점은 정통론을 고집하는 그의 성리학적 특징으로 볼 때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갈암은 주자와 퇴계 그리고 공맹사상에 철저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7세기 조선유학사에 있어서 갈암은 대표적 순유(醇儒)로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금장태(1996) : 갈암 이현일, 한국인물유학사, 한길사
금훈식(1986) : 여말선초의 민본사상과 명분론, 애산학보 4
김풍기(1988) : 율곡 이이의 문학론 연구, 고려대 석사
신천식(1998) : 고려후기 성리학의 수용과 교육사상, 명지대학교 출판부
윤남한(1975) : 유학의 성격, 한국사 6
한국학술정보 편집부(2006) : 갈암 이현일 문집 4

키워드

  • 가격7,5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11.04.05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6339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