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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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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유교의 사상

Ⅱ. 유교의 문화

Ⅲ. 유교의 건축
1. 향교건축
2. 서원건축
3. 재각

Ⅳ. 유교의 영향
1. 동족촌의 형성
2. 작은 사랑채
3. 가묘의 등장
4. 높은 담장
5. 주택의 명칭
6. 선비
7. 제사

Ⅴ. 유교의 개혁운동

Ⅵ. 유교와 홍길동전

Ⅶ. 유교와 신유교

참고문헌

본문내용

덕 으로 보아 현실 위주로 유교를 해석하였다. 이른바 순수학문에 반기를 들고 현실참여의 학문에 그 가치를 둔 것이다. 순수라는 이름으로 현실의 비리는 외면하고, 산림으로 묵히는 선비를 썩은 무리로 보았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현실의 잘못을 고치려고 하며 비리에 과감히 도전하려는 이를 참된 선비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16~17세기는 유학의 교후성이 가장 위세를 떨치는 시기였다. 유학을 닦지 않으면 교양인이 될 수가 없었다. 학자 또한 될 수 없었고, 벼슬길은 더군다나 나갈 수가 없었다.
같은 유학 중에서도 공자, 맹자 그리고 정자, 주자의 학설만 강요하였으며, 여기에서 벗어나면 그것도 또한 이단으로 생각했다.
교산은 유학도 이기는 하나, 정통 유학도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유학도가 되었으나, 유학만이 그의 학구의 대상은 아니었다. 교산은 유교 의 교양 을 쌓았으나, 그에 반하여 반유교적 인 행동으로 그의 인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학문하는 자세에서도 유가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교산의 유교 에 대한 이중적 인 자세는 “홍길동전” 에서도 길동의 행동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우선 길동의 호부호형 에 관한 한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길동이 팔 세 되매 총명이 과인하여 하나를 들으면 백을 통하니 공이 더욱 애증하나 근본 천생이라 길동이 매양 호부호형 하면 문득 꾸짖어 못하게 하니 길동이 십 세 넘도록 감히 부형을 부르지 못하고 비복들의 천대함을 각골통한하여 심사를 정하지 못하더니, “나는 어찌하여 일신이 적막하고 부형이 있으되 호부호형을 못 하니 심장이 터질지라, 어찌 통한치 않으리오.” 소인이 평생 설운 바는 대감 정기로 당당하온 남자 되었사오매 부생 모휵지은이 깁삽거늘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데져 대감께서 당초의 천한 길동을 위하여 부친을 부친이라 하고 형을 형이라 하였던들 어찌 이의 이르리까.
물론 호부호형을 원하는 길동의 행동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지 어찌 유교에만 국한될 수 있느냐는 이론도 있을 수 있으나 여타의 종교와 비교하여 유교에서 훨씬 강력하게 인간의 기본 도리로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길동은 자신에 대한 암살 기도를 모면했음을 상공에게 말한다. 그런데 상공 역시 길동의 암살에 암묵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동은 상공에게 가출의 허락을 받으며 유교적 예의, 즉 자식의 도리에 충실하고자 한다.
길동이 복지 대왈
“소인이 일찍 부생모휵지온을 만분지일이나 갚을까 하였더니, 가내에 불의지인이 있사와 상공께 참소하고 소인을 죽이려 하오매 겨우 목슴을 보전하였사오나 상공을 모실 길이 없삽기로 금일 상공을 하직을 고하나이다”
“소자의 일편지한을 야야가 풀어 주옵시니 죽어도 여한이 업소이다. 복망 야야는 만수무강 하옵소서”
또한 상공과 인형이 잡히자, 스스로를 나타내어 오륜에 충실하고자 했다. 또한 인형도 자현 한 길동에게 충과 효를 강조한 충고를 하며 길동이는 이를 수용한다.
상공은 지속적으로 길동에게 유교적 인 예의를 강조하며 길동도 군신 의 예를 갖추어 임금에게 말한다.
네 지척에 임금이 계시고 아래로 내 아비가 있거늘 이렇듯 천고에 없는 죄를 지었으니 죽기를 아끼지 말라.
신의 아비가 국온을 많이 입었사오니 신이 어찌 감히 불측한 행사를 하오이리까마는, 신은 본디 천비 소생이라 집을 버리고 적당에 참여해 각읍 수령의 준민고택하는 재물을 탈취하였사오나, 이제 십년을 지내면 조선을 떠나 가을 곳이 있사오니 복걸 석상은 근심치 말으시고 신을 잡는 관자를 거두옵소서.
길동이 가출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부친이 자식으로 인정해 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길동은 이미 운명한 부에게 정중하게 호곡 하고, 서강에 대기 중인 배로 호위하여 저도에 모시고 삼년상을 정성스럽게 치른다.
길동은 행동적 인물이지만, 기존 사회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에 대한 신하로서의 도리와 부에 대한 효심이 철저해 유교적 윤리관이 강조된 면을 보여주었다.
만약 길동이 부자간의 윤리 회복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홍판서가 호부호형을 허락하였을 때 그것은 이미 성취 되었다. 또한 서자에 대한 차별 철폐가 목적이었다면, 병조판서가 제수됨으로써 갈등이 해소되었다 볼 수 있다.
그러나 길동은 조선을 떠나 스스로의 국가를 건설하여 왕이 된다.
Ⅶ. 유교와 신유교
신유교(新儒敎)란 도학(道學)주자학(朱子學)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 말기에 전래한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바탕을 둔 도학은 육조시대에 융성하여 서로 항쟁하는 가운데, 유교는 침체상태를 보였으나 당나라 때 도학의 선구자인 한유(韓愈)가 유교의 도통을 밝히고 숭유척불(崇儒斥佛)의 기치를 들었다. 이어 북송(北宋)에 이르러 주돈이(周敦)정호(程顥)정이(程) 등이 나와 과거 훈고에만 치중하던 유교를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다루어 크게 부흥시켰고 이어 남송의 주자(朱子)는 이들 학설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시켰다. 그는 5경(經)에 대신하여 4서(四書:대학논어맹자중용)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여 명성을 남겼으며 그 밖에도 《역본의(易本義)》 《시집전(詩集傳)》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주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하고, 이를 만물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의 도(道)라 하였으며, 기를 만물의 도구(道具)가 되는 형이하의 기(器)라 하였다. 그러나 주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육상산(陸象山)은 견해를 달리하여 심즉리(心卽理)의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육학(陸學)은 심학(心學)이라고도 하였으며 이것은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에게로 계승되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이 정립되었다.
참고문헌
김하태, 종교의 자유, 사상계, 1958
이효영, 동아시아 경제발전과 유교문화의 역할, 국제지역연구 제12권 제1호, 2009
이완재, 구한말 영남지역의 유교개혁운동, 영남철학회, 1997
조동일, 영웅의 일생과 홍길동전, 새문사, 1983
최무석, 동학의 도덕교육사상에 관한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8
한국 전통건축과 동양사상,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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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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