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 저자의 이런 유사한 용어 사용은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용어의 혼용이유를 설명하려는 시도도 여러 각도에서 모색되었다. 저자가 분명한 개념차를 인지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이 용어들을 구분하여 썼겠는가, 아니면 용어의 내용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위적으로 사용하였겠는가를 물을 수 있다.
2. 저벨과 크라벨의 이해 : 저벨은 ‘경외자’를 ‘예배하는 자-공경자’, ‘개종자’를 의미하는 포괄적 범주의 종교 집단으로 파악한다. 이들은 단순히 유대교에 호의를 품은 동정자, 동조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의 글에 반영된 1세기 선교 노력이 우선적으로 회당 주변의 ‘경외자’ 그룹에 모아져 있었다는 저벨의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그 주장이, 선교적 관심이 유대교와 상관없는 이교도는 철저히 배제된 채 ‘경외자’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집중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일반화요, 확증할 수 없는 본문에 대한 확대 해석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크라벨은 ‘경외자’ 라는 개념이 실은 누가가 자신의 신학적 목적을 위해서 고안한 개념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이 용어에서 전문적 술어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것에 반대한다. 그 말은 다만 기독교가 구약의 뿌리를 견지한 채 합법적으로 이방인을 위한 종교가 되었다는 점을 보이려는 ‘상징’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3. 기술적 의미로 본 경외자 : 오늘날 회당 주변의 특정 인물들로서 ‘경외자’라는 개념은, 두드러진 기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일반적 합의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다. 누가가 아무런 구분 없이 이런 용어들을 무작위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개종자 관련 논의에 다소 의외의 견해가 제시되었다. 유대교 ‘안에서의 개종자’를 가리키는 용어를 기독교인들이 채용하여, 유대교인으로서 기족교로 개종한 사람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명백히 ‘이방인’ 개종자를 뜻한다.
Ⅲ. 경외자의 발생 배경
1. 이방인의 유대교 유입 : 1세기의 정황이나 문헌 증거로 볼 때 당시 유대교가 커다란 규모의 조직적 이방인 선교를 시행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이방인들 중에는 유대교에 이끌린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당시의 다른 이방종교들에서 있었던 것처럼, 그들이 유대교의 부분적이고 소극적인 선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2. 유대교 주변 이방인들을 향한 각축 : 그런데 이들이 유대교 내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통한 개종의 길에 드렁서야 되는데, 이것은 이방인들로서는 도덕적, 관습적으로 쉽게 용납되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생 기독교의 가르침은 호소력 있게 들릴 수 있었다. 이방인 출신인 자기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각별히 우호적인 메시지들을 거듭 접하게 될 때, 그것은 이들 바깥 경외자들에게 솔깃한 초대가 될 수 있었고, 유대교 공동체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제 7 장 - 예루살렘 사도회의 (행 15:1-21)
- 누가의 예루살렘 회의 기록의 의미
1. 이방인 선교원칙 확립과 ‘한 교회’의 성원됨을 알림 : 예루살렘 회의의 정점은 이방인 선교원칙의 수립이라는 데 모아진다. 이방교회가 직면한 구체적이고 실천적 문제, 곧 이방인 입교 조건으로서의 율법 준수 논쟁을 통해 이방인 선교의 기본원칙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 원칙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신다는 근본적인 사실과, 그들을 수용하는 전제조건의 확립이다.
2. 합리적 의사 결정 과정 :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위와 같은 선교원칙이 확립된 과정과 절차상의 의미다. 저자는 이방인 수용과 입교에 따르는 조건 부과와 같은 주요원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권위 있는 인물들, 또는 집단의 임의적 결정이 개입, 작용하지 않았음을 보인다. 이것은 ‘회의’라는 의사 결정의 합리적 기제가, 지도자나 지도체제의 전횡보다 우선되었다는 점에서 한층 돋보이는 결론 도출 과정이다. 결국 누가의 의식 속에는 어느 지도자의 독단적 자의 발동이나, 독주, 어느 사람이나 지역이 또 다른 사람이나 지역 위에 군림한다는 등의 위계적 발상이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고, 그러한 발상의 가장 뚜렷한 표현이 바로 여기 예루살렘 회의 기록 속에서 나타난다.
3. 예루살렘의 지도력과 권위 :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를 안디옥 회중이 “기쁘게 받아들였다”(행 15:31)는 묘사나, 사도행전 16:4(“예루살렘에서 정한 규칙들을 사람들에게 주어 지키게 했다.”)등의 기록은 회의의 결의를 인정했다는 것, 또 그것을 산출한 예루살렘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라고 보아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 권위의 성격이 강압적이거나 지배 종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은 권위를 가졌고, 그 권위에 근거하여 여타 지역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4. 사도회의 기록의 서술 전략상 기능 : 사도회의의 기록을 사도행전 13-14장의 선교 이후 15장에 배치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은 선교지에서 벌어지는 실제적 문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발생하는 구체적 어려움의 해결 및 타협에 관한 실천적 설명과 해답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선교의 경험과 이방현장에서의 구체적 문제점들을 몸소 겪었던 사람들만이 이 문제에 관한 발언권과 해명의 노력에 동참할 수 있다. 이 점을 저자가 몰랐을 리 없다. 바로 그런 경험들을 사도행전 13-14장에서 생생히 겪었을 두 사람들이야 말로 그 경험들을 토대로, 제기되는 문제점들에 관해 권위와 신뢰를 갖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었다.
5. 베드로와 야고보 역할의 의미 : 사도회의 기록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의 역할이다. 이 회의 기록에서 저자는 왜 두 사람을 동원하여 발언하고, 중재역을 맡게 하였을까? 예루살렘 지도자가 나서서 중재하고 화해의 결론을 이끌게 한 것은 결자해지의 차원과 후유증 최소화의 요구가 종시에 작용한 탓이다.
제 8 장 - 사도서진 (행 15:22-35)
Ⅰ. 사도서신의 내용
1. 예루살렘의 파송자 선정 : 안디옥에 나타난 유대 출신의 며
2. 저벨과 크라벨의 이해 : 저벨은 ‘경외자’를 ‘예배하는 자-공경자’, ‘개종자’를 의미하는 포괄적 범주의 종교 집단으로 파악한다. 이들은 단순히 유대교에 호의를 품은 동정자, 동조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의 글에 반영된 1세기 선교 노력이 우선적으로 회당 주변의 ‘경외자’ 그룹에 모아져 있었다는 저벨의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그 주장이, 선교적 관심이 유대교와 상관없는 이교도는 철저히 배제된 채 ‘경외자’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집중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일반화요, 확증할 수 없는 본문에 대한 확대 해석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크라벨은 ‘경외자’ 라는 개념이 실은 누가가 자신의 신학적 목적을 위해서 고안한 개념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이 용어에서 전문적 술어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것에 반대한다. 그 말은 다만 기독교가 구약의 뿌리를 견지한 채 합법적으로 이방인을 위한 종교가 되었다는 점을 보이려는 ‘상징’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3. 기술적 의미로 본 경외자 : 오늘날 회당 주변의 특정 인물들로서 ‘경외자’라는 개념은, 두드러진 기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일반적 합의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다. 누가가 아무런 구분 없이 이런 용어들을 무작위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개종자 관련 논의에 다소 의외의 견해가 제시되었다. 유대교 ‘안에서의 개종자’를 가리키는 용어를 기독교인들이 채용하여, 유대교인으로서 기족교로 개종한 사람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명백히 ‘이방인’ 개종자를 뜻한다.
Ⅲ. 경외자의 발생 배경
1. 이방인의 유대교 유입 : 1세기의 정황이나 문헌 증거로 볼 때 당시 유대교가 커다란 규모의 조직적 이방인 선교를 시행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이방인들 중에는 유대교에 이끌린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당시의 다른 이방종교들에서 있었던 것처럼, 그들이 유대교의 부분적이고 소극적인 선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2. 유대교 주변 이방인들을 향한 각축 : 그런데 이들이 유대교 내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통한 개종의 길에 드렁서야 되는데, 이것은 이방인들로서는 도덕적, 관습적으로 쉽게 용납되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생 기독교의 가르침은 호소력 있게 들릴 수 있었다. 이방인 출신인 자기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각별히 우호적인 메시지들을 거듭 접하게 될 때, 그것은 이들 바깥 경외자들에게 솔깃한 초대가 될 수 있었고, 유대교 공동체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제 7 장 - 예루살렘 사도회의 (행 15:1-21)
- 누가의 예루살렘 회의 기록의 의미
1. 이방인 선교원칙 확립과 ‘한 교회’의 성원됨을 알림 : 예루살렘 회의의 정점은 이방인 선교원칙의 수립이라는 데 모아진다. 이방교회가 직면한 구체적이고 실천적 문제, 곧 이방인 입교 조건으로서의 율법 준수 논쟁을 통해 이방인 선교의 기본원칙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 원칙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신다는 근본적인 사실과, 그들을 수용하는 전제조건의 확립이다.
2. 합리적 의사 결정 과정 :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위와 같은 선교원칙이 확립된 과정과 절차상의 의미다. 저자는 이방인 수용과 입교에 따르는 조건 부과와 같은 주요원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권위 있는 인물들, 또는 집단의 임의적 결정이 개입, 작용하지 않았음을 보인다. 이것은 ‘회의’라는 의사 결정의 합리적 기제가, 지도자나 지도체제의 전횡보다 우선되었다는 점에서 한층 돋보이는 결론 도출 과정이다. 결국 누가의 의식 속에는 어느 지도자의 독단적 자의 발동이나, 독주, 어느 사람이나 지역이 또 다른 사람이나 지역 위에 군림한다는 등의 위계적 발상이 작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고, 그러한 발상의 가장 뚜렷한 표현이 바로 여기 예루살렘 회의 기록 속에서 나타난다.
3. 예루살렘의 지도력과 권위 :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를 안디옥 회중이 “기쁘게 받아들였다”(행 15:31)는 묘사나, 사도행전 16:4(“예루살렘에서 정한 규칙들을 사람들에게 주어 지키게 했다.”)등의 기록은 회의의 결의를 인정했다는 것, 또 그것을 산출한 예루살렘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라고 보아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 권위의 성격이 강압적이거나 지배 종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은 권위를 가졌고, 그 권위에 근거하여 여타 지역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4. 사도회의 기록의 서술 전략상 기능 : 사도회의의 기록을 사도행전 13-14장의 선교 이후 15장에 배치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은 선교지에서 벌어지는 실제적 문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발생하는 구체적 어려움의 해결 및 타협에 관한 실천적 설명과 해답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선교의 경험과 이방현장에서의 구체적 문제점들을 몸소 겪었던 사람들만이 이 문제에 관한 발언권과 해명의 노력에 동참할 수 있다. 이 점을 저자가 몰랐을 리 없다. 바로 그런 경험들을 사도행전 13-14장에서 생생히 겪었을 두 사람들이야 말로 그 경험들을 토대로, 제기되는 문제점들에 관해 권위와 신뢰를 갖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었다.
5. 베드로와 야고보 역할의 의미 : 사도회의 기록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의 역할이다. 이 회의 기록에서 저자는 왜 두 사람을 동원하여 발언하고, 중재역을 맡게 하였을까? 예루살렘 지도자가 나서서 중재하고 화해의 결론을 이끌게 한 것은 결자해지의 차원과 후유증 최소화의 요구가 종시에 작용한 탓이다.
제 8 장 - 사도서진 (행 15:22-35)
Ⅰ. 사도서신의 내용
1. 예루살렘의 파송자 선정 : 안디옥에 나타난 유대 출신의 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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