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개념
Ⅲ.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어원
Ⅳ.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생애
1. 사생애 : 준비기
2. 공생애 : 활동기
Ⅴ.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지도자론
1. 참 지도자로서의 권위
2. 삶의 자리
1)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곧 모든 이들을 이끄는 현장을 의미한다
2)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았던 유랑자적인 카리스마이기도 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눅 9:58, 마 8:20)
3. 지도자론
1) 지도력의 동기들
2) 지도 방법론
Ⅵ.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가르침
1. 쉽게 가르치셨다
2. 재미있게 가르치셨다
3. 정곡을 찌르는 가르침이셨다
4. 사랑으로 가르치셨다
Ⅶ.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자기칭호
1. 간접기독론
1) 어법
2) 예수께서 용서해 주는 권위 주장(막2:10)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3. 예수의 자기 칭호(그 사람의 아들-인자)
Ⅷ.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토지정의
1. 영적 희년 선포와 "땅"
2. 하나님 나라와 “땅"
3. 십일조와 “땅"
Ⅸ. 결론 및 비판
참고문헌
Ⅱ.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개념
Ⅲ.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어원
Ⅳ.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생애
1. 사생애 : 준비기
2. 공생애 : 활동기
Ⅴ.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지도자론
1. 참 지도자로서의 권위
2. 삶의 자리
1)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곧 모든 이들을 이끄는 현장을 의미한다
2)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았던 유랑자적인 카리스마이기도 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눅 9:58, 마 8:20)
3. 지도자론
1) 지도력의 동기들
2) 지도 방법론
Ⅵ.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가르침
1. 쉽게 가르치셨다
2. 재미있게 가르치셨다
3. 정곡을 찌르는 가르침이셨다
4. 사랑으로 가르치셨다
Ⅶ.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자기칭호
1. 간접기독론
1) 어법
2) 예수께서 용서해 주는 권위 주장(막2:10)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3. 예수의 자기 칭호(그 사람의 아들-인자)
Ⅷ. 예수그리스도(예수님)의 토지정의
1. 영적 희년 선포와 "땅"
2. 하나님 나라와 “땅"
3. 십일조와 “땅"
Ⅸ. 결론 및 비판
참고문헌
본문내용
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받은 수세사건을 들고 있다(막 1:9-11 및 병행구절).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영적 체험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경험한 그런 소명에 따른 환상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예수님의 확실한 자기 소명의식은 이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예수님에게 어떤 자의식(自意識)이 비로소 확정되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지도력의 중요 동기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1) 먼저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라는 자의식(自意識)이다(막 1:38 병행, 10:45 병행, 마 5: 17, 15:24, 10:34-35, 눅 12:49). 이는 “나는 …이다”(e*gwv ei*mi)는 예수님의 독특한 말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자기 정체성이 신적인 필연성에 의해 정해진 삶의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체득되었다기보다는, 점진적이며 다양한 삶의 경험에 의해 연속적으로 획득된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세례요한과의 만남, 수세사건, 마귀와의 시험사화, 각계각층과의 만남과 인간관계, 제자 파송, 율법에 대한 논쟁, 죄용서의 선포 등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송된 자라는 지도자 의식을 체득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파송된 자로서의 다양한 삶의 여정을 경험하며 고난의 길을 스스로 밟아 나가는 지도자였다.
(2) 둘째는, 그의 “(그) 선지자” 의식이다(눅 13:33, 마 23:31 이하, 37-39 병행, 막 6:4 및 병행구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했다고 주장했다(막 3:28 이하, 마 12:28, 사 61:1 참조). 이는 그의 선지자적 권위와 연관한다. 역시 백성들도, 제자들도, 심지어 바리새인도 그를 선지자로 이해한다. 그는 사 61:1의 영의 약속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끊어진 영”에 대한 공유로 종말론적 회복을 제자들에게 기대했다. 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영은 아버지아들따르는 자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도록 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들”의 자격을 부여한다. 이런 창조적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 부름말 “아바”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율법적 권위가 아닌, 가족적 사랑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의 종말론적 지평과 더불어 기존의 제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연히 새로운 이단적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참조. 막 1:22, 27, 2:10, 11:27-33).
(3) 셋째는, 그의 메시아적 “인자” 의식이다. 수세사건(막 1:11)과 시험사화(막 1:12-13)를 통해 이미 세례요한에 의해 예고된 인자-메시아로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한다(참조. 막 1:7 병행). 이런 “최초의 결단”을 통해 그는 점진적으로 메시아적 인자의 길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엄격한 “아들됨의 순종”(A. Schlatter)으로 걸어가도록 하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종적인 결단”에 이른다. 이처럼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아들과 인자-메시아로 나아갔고 또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때, 예수님 자신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극진한 헌신(cf. 사 61:1-2), 사랑의 섬김(눅 19:10, 막 10:42-45, 요 13:2-17), 또한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통해, 새롭게 자신을 이스라엘과 일치시키려 한다.
2) 지도 방법론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자의식과 그것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런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지도하려 했고 또 지도했는지를 알기 위해, 여기서 어떤 체계적인 방법론을 추출 해내기보다는 일괄적으로 예수님의 특징적 활동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살펴보려 한다.
(1)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지만 비유적이어서 그 성격상 제한된 자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참조. 막 4:11-12).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자를 자신의 자리에 초대했지만, 세리, 죄인, 가난한 자, 종 등과 같은 하층민들이 그 초대에 응할 뿐이었다(참조. 눅 14:7-14, 4:18 이하, 마 11:5, 참조. 막 2:17b), 그의 초대에 응한 자들은 속옷조차도 빼앗기며,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만 하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마 5:40-41). 한편,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과 제사는 원하면서 이웃에 대한 자비는 원치 않았다(마 12:7, 참조. 막 2:23 이하). 화려한 궁전과 쌓이는 재물에 정신이 팔려 그것들을 의인의 축복과 평안으로 오해했다. 이런 사회적 갈등이 결국 자신들의 자멸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의 종교적,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 때,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회에 등장했던 것이다.
(2)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 사회적 현실이 역전되기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을 향한 새로운 비존이며 새로운 지도력이었다. 그 약속은 물질의 만족을 넘어서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확신”을 체험케 하는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런 새로운 확신의 자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며 행동으로 옮겨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그 현장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하나의 비전(the vision)을 통해 서로가 만나는 삶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랍비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율법에 대한 문자의 해석과 행위적 모범이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혹은 새로운 신율의 나라를 경험하도록 무리들을 초대하고 지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밖에 있던 자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왕국을 꿈꾸며 자신의 지도력을 이 땅에 확장시켜 나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가까이 있던 제자들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요 10:11, 마 26:31b 참조)를 보기 보다는, 열 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그런 지도자(마 26:53)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3)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의 지도자였다. 이는 남을 자유케 하는 고난의 섬김을 뜻한다.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1) 먼저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라는 자의식(自意識)이다(막 1:38 병행, 10:45 병행, 마 5: 17, 15:24, 10:34-35, 눅 12:49). 이는 “나는 …이다”(e*gwv ei*mi)는 예수님의 독특한 말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자기 정체성이 신적인 필연성에 의해 정해진 삶의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체득되었다기보다는, 점진적이며 다양한 삶의 경험에 의해 연속적으로 획득된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세례요한과의 만남, 수세사건, 마귀와의 시험사화, 각계각층과의 만남과 인간관계, 제자 파송, 율법에 대한 논쟁, 죄용서의 선포 등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송된 자라는 지도자 의식을 체득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파송된 자로서의 다양한 삶의 여정을 경험하며 고난의 길을 스스로 밟아 나가는 지도자였다.
(2) 둘째는, 그의 “(그) 선지자” 의식이다(눅 13:33, 마 23:31 이하, 37-39 병행, 막 6:4 및 병행구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했다고 주장했다(막 3:28 이하, 마 12:28, 사 61:1 참조). 이는 그의 선지자적 권위와 연관한다. 역시 백성들도, 제자들도, 심지어 바리새인도 그를 선지자로 이해한다. 그는 사 61:1의 영의 약속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끊어진 영”에 대한 공유로 종말론적 회복을 제자들에게 기대했다. 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영은 아버지아들따르는 자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도록 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들”의 자격을 부여한다. 이런 창조적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 부름말 “아바”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율법적 권위가 아닌, 가족적 사랑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의 종말론적 지평과 더불어 기존의 제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연히 새로운 이단적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참조. 막 1:22, 27, 2:10, 11:27-33).
(3) 셋째는, 그의 메시아적 “인자” 의식이다. 수세사건(막 1:11)과 시험사화(막 1:12-13)를 통해 이미 세례요한에 의해 예고된 인자-메시아로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한다(참조. 막 1:7 병행). 이런 “최초의 결단”을 통해 그는 점진적으로 메시아적 인자의 길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엄격한 “아들됨의 순종”(A. Schlatter)으로 걸어가도록 하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종적인 결단”에 이른다. 이처럼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아들과 인자-메시아로 나아갔고 또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때, 예수님 자신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극진한 헌신(cf. 사 61:1-2), 사랑의 섬김(눅 19:10, 막 10:42-45, 요 13:2-17), 또한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통해, 새롭게 자신을 이스라엘과 일치시키려 한다.
2) 지도 방법론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자의식과 그것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런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지도하려 했고 또 지도했는지를 알기 위해, 여기서 어떤 체계적인 방법론을 추출 해내기보다는 일괄적으로 예수님의 특징적 활동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살펴보려 한다.
(1)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지만 비유적이어서 그 성격상 제한된 자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참조. 막 4:11-12).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자를 자신의 자리에 초대했지만, 세리, 죄인, 가난한 자, 종 등과 같은 하층민들이 그 초대에 응할 뿐이었다(참조. 눅 14:7-14, 4:18 이하, 마 11:5, 참조. 막 2:17b), 그의 초대에 응한 자들은 속옷조차도 빼앗기며,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만 하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마 5:40-41). 한편,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과 제사는 원하면서 이웃에 대한 자비는 원치 않았다(마 12:7, 참조. 막 2:23 이하). 화려한 궁전과 쌓이는 재물에 정신이 팔려 그것들을 의인의 축복과 평안으로 오해했다. 이런 사회적 갈등이 결국 자신들의 자멸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의 종교적,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 때,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회에 등장했던 것이다.
(2)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 사회적 현실이 역전되기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을 향한 새로운 비존이며 새로운 지도력이었다. 그 약속은 물질의 만족을 넘어서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확신”을 체험케 하는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런 새로운 확신의 자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며 행동으로 옮겨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그 현장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하나의 비전(the vision)을 통해 서로가 만나는 삶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랍비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율법에 대한 문자의 해석과 행위적 모범이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혹은 새로운 신율의 나라를 경험하도록 무리들을 초대하고 지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밖에 있던 자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왕국을 꿈꾸며 자신의 지도력을 이 땅에 확장시켜 나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가까이 있던 제자들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요 10:11, 마 26:31b 참조)를 보기 보다는, 열 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그런 지도자(마 26:53)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3)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의 지도자였다. 이는 남을 자유케 하는 고난의 섬김을 뜻한다.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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