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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단 원 명 ( 대 단 원 )
Ⅱ.단 원 의 연 구 ( 중 단 원 )
1.단 원 의 도 입 ( 생 각 해 보 기 )
2.학 습 계 열
3.진 단 평 가
4.단 원 의 학 습 목 표 (무엇을 알게 될까?)
Ⅲ.단 원 의 지 도 계 획 (중단원)
1.학 습 의 지 도 계 획
2.평 가 계 획 및 방 법
Ⅳ.교 재 연 구 ( 소 단 원 )
1.진 단 평 가
2.호 기 심 열 기 ( 함 께 생 각 하 기 )
3.이 론 의 발 전 과 정 을 만 화 로 작성하기
4.학 습 목 표
5.소 단 원 도 입
6.탐 구 활 동
7.학 습 내 용 정 리
8.역 할 극
9.쪽 지 글 ( 읽 을 거 리 )
10.보 충 학 습 및 심 화 학 습
11.생화과 과 학
12.개념 도 작 성
13.과 학 자 소 개 하 기
14.형 성 평 가
15.인 터 넷 자 료 찾 기
16.창 의 력 키 우 기
17.미 해 결 과 제
18.선 택 학 습
Ⅴ.본 시 학 습 지 도 안 ( 소 단 원 )
1.학 습 모 형 의 선 택 과 그 모 형 을 선 택 한 이 유
2.학 습 제 목
3.학 습 목 표
4.지 도 과 정 ( 학 습 내 용, 교 수 - 학 습 활 동, 시 간 )
Ⅵ.참 고 문 헌
Ⅱ.단 원 의 연 구 ( 중 단 원 )
1.단 원 의 도 입 ( 생 각 해 보 기 )
2.학 습 계 열
3.진 단 평 가
4.단 원 의 학 습 목 표 (무엇을 알게 될까?)
Ⅲ.단 원 의 지 도 계 획 (중단원)
1.학 습 의 지 도 계 획
2.평 가 계 획 및 방 법
Ⅳ.교 재 연 구 ( 소 단 원 )
1.진 단 평 가
2.호 기 심 열 기 ( 함 께 생 각 하 기 )
3.이 론 의 발 전 과 정 을 만 화 로 작성하기
4.학 습 목 표
5.소 단 원 도 입
6.탐 구 활 동
7.학 습 내 용 정 리
8.역 할 극
9.쪽 지 글 ( 읽 을 거 리 )
10.보 충 학 습 및 심 화 학 습
11.생화과 과 학
12.개념 도 작 성
13.과 학 자 소 개 하 기
14.형 성 평 가
15.인 터 넷 자 료 찾 기
16.창 의 력 키 우 기
17.미 해 결 과 제
18.선 택 학 습
Ⅴ.본 시 학 습 지 도 안 ( 소 단 원 )
1.학 습 모 형 의 선 택 과 그 모 형 을 선 택 한 이 유
2.학 습 제 목
3.학 습 목 표
4.지 도 과 정 ( 학 습 내 용, 교 수 - 학 습 활 동, 시 간 )
Ⅵ.참 고 문 헌
본문내용
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구가 운동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구는 매일 그 축의 둘레를 완전히 일주하며, 그 양극(북극과 남극)은 항상 같은 위치에 있다.
6. 우리 눈에는 태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궤도를 돌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7. 행성운동에서 볼 수 있는 유, 역행 등도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사람들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였거니와 증명이나 실험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왜 완전한 원운동을 고집한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이래 지극히 신비주의적 경향을 띄었던 피타고라스와 그 제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원이 처음도 끝도 없으며 중심으로부터 거리가 일정하기 때문에 가장 완벽한 도형으로 보았다. 그래서 조화로운 우주는 이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지동설에서 이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고, 행성이 원운동을 할 것이라는 신념은 나중에 케플러가 타원운동으로 바꾸기까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고집한 생각이 되었다.
흔히 코페르니쿠스가 그의 이론을 출판하지 않은 것을 교회의 박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는 이미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된 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황과 친한 니콜라스 쇤베르크(Nikolas Schoinberg)추기경은 오히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출판하라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그가 출판을 미루었던 이유는 그의 소심한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학설이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평화와 정숙을 좋아했으며 비웃음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에 관한 혁명적인 학설은 그의 제자 레티쿠스(Rheticus) 덕분이었다. 태양중심설에 반한 레티쿠스는 이 이론을 책으로 출판할 것을 권했지만 코페르니쿠스는 거절하였다. 대신 그의 체계에 관한 개설서인 \'첫번째 보고서(Narratio prima)\'를 출판하는 것은 허락하였다. 이 개설서는 레티쿠스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체계를 비교적 쉽게 설명한 책으로 1540년 초 출판되어 학자나 성직자들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또한 교황청에서도 별 문제로 삼지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 Orbium Coelestium)\'도 출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작업을 레티쿠스에게 맡겼다.
그러나 레티쿠스는 바쁜 개인 사정으로 출판작업을 마무리 할 수 없었다. 그는 친구인 오시안데르(Andreas Osiander)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루터파 신학자였던 오시안데르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체계를 자신의 신앙적 입장에 맞추도록 노력했다. 당시 병석에 있던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5월 24일 자신의 저서를 받아보았다. 그 책에는 뜻밖의 서문이 첨가되어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이 완전히 가설이어서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문제는 이 서문을 쓴 사람을 밝히지 않아서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서문을 쓴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오시안데르는 이렇게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왜곡한 것이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저서가 출판되고 며칠 지나 바로 사망했다. 그는 잠들었지만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그 후 이어질 역사에서 수많은 운명의 독자들을 찾아가, 지구중심의 우주관을 태양 중심으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관측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che 1546~1601)
티코 브라헤는 행성운동에 대한 이전 관측자료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집요한 관측 활동을 통해 정확한 관측자료를 남긴 사람이다. 티코의 이런 업적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으나, 결과적으로 지동설을 옹호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티코 브라헤는 현재의 스웨덴 남부의 작은 도시 크누드스트르프(Kunudustrup, 당시는 덴마크, 티코의 국적은 덴마크이다.)에서 1546년 12월 7일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다른 한 아이가 죽었기 때문에, 원래 붙이려던 티게(Tyge) 라는 이름 대신 \"복있는 아이\" 라는 뜻의 티코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한 살 때 그는 자기의 큰아버지에게 강제로 유괴 당해 양자로 들어갔는데, 다행히 돈 많은 큰아버지 덕에 비교적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하면서 자랄 수 있었다.
1559년 13살의 나이에 그는 천문학이 아닌 법학을 공부하게 위해 코펜하겐 대학에 들어갔다. 이듬해 8월 21일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을 일이 생겼다. 바로 일식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가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은 일식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일식을 예언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인간이 정확히 별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는 것에 어떠한 신성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티코는 알폰스 천문표나 프로이센 천문표를 사서 행성의 운행을 연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열심히 읽고 공부하였다. 결국 그는 관심을 천문학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나 티코의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티코를 수사학에 능한 뛰어난 귀족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아버지 오토 브라헤는 티코를 가정교사와 동행시켜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결국 1562년 티코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가정교사는 티코에게 법학 공부를 지도하고 밤에 별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티코는 천문학 공부가 더 즐거웠기 때문에 가정교사가 잠든 사이에 별을 보곤 하였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점성술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물론 티코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점성술에서 별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구상에서 별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계판의 숫자와 같은 것이 별이고, 이때 시계바늘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움직이는 별, 행성이다. 점성술에 따르면 각각의 행성은 고유의 영향력을 갖는다고 한다. 태양은 창조력과 자기 통달, 달은 본능과 감수성, 수성은 통신, 금성은 동정심과 쾌락, 화성은 자기주장과 의지력, 목성은 열정과 발전, 토성
6. 우리 눈에는 태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궤도를 돌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7. 행성운동에서 볼 수 있는 유, 역행 등도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사람들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였거니와 증명이나 실험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왜 완전한 원운동을 고집한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이래 지극히 신비주의적 경향을 띄었던 피타고라스와 그 제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원이 처음도 끝도 없으며 중심으로부터 거리가 일정하기 때문에 가장 완벽한 도형으로 보았다. 그래서 조화로운 우주는 이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지동설에서 이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고, 행성이 원운동을 할 것이라는 신념은 나중에 케플러가 타원운동으로 바꾸기까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고집한 생각이 되었다.
흔히 코페르니쿠스가 그의 이론을 출판하지 않은 것을 교회의 박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는 이미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된 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황과 친한 니콜라스 쇤베르크(Nikolas Schoinberg)추기경은 오히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출판하라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그가 출판을 미루었던 이유는 그의 소심한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학설이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는 평화와 정숙을 좋아했으며 비웃음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에 관한 혁명적인 학설은 그의 제자 레티쿠스(Rheticus) 덕분이었다. 태양중심설에 반한 레티쿠스는 이 이론을 책으로 출판할 것을 권했지만 코페르니쿠스는 거절하였다. 대신 그의 체계에 관한 개설서인 \'첫번째 보고서(Narratio prima)\'를 출판하는 것은 허락하였다. 이 개설서는 레티쿠스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체계를 비교적 쉽게 설명한 책으로 1540년 초 출판되어 학자나 성직자들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또한 교황청에서도 별 문제로 삼지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 Orbium Coelestium)\'도 출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작업을 레티쿠스에게 맡겼다.
그러나 레티쿠스는 바쁜 개인 사정으로 출판작업을 마무리 할 수 없었다. 그는 친구인 오시안데르(Andreas Osiander)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루터파 신학자였던 오시안데르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체계를 자신의 신앙적 입장에 맞추도록 노력했다. 당시 병석에 있던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5월 24일 자신의 저서를 받아보았다. 그 책에는 뜻밖의 서문이 첨가되어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이 완전히 가설이어서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문제는 이 서문을 쓴 사람을 밝히지 않아서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서문을 쓴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오시안데르는 이렇게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왜곡한 것이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저서가 출판되고 며칠 지나 바로 사망했다. 그는 잠들었지만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그 후 이어질 역사에서 수많은 운명의 독자들을 찾아가, 지구중심의 우주관을 태양 중심으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관측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che 1546~1601)
티코 브라헤는 행성운동에 대한 이전 관측자료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집요한 관측 활동을 통해 정확한 관측자료를 남긴 사람이다. 티코의 이런 업적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으나, 결과적으로 지동설을 옹호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티코 브라헤는 현재의 스웨덴 남부의 작은 도시 크누드스트르프(Kunudustrup, 당시는 덴마크, 티코의 국적은 덴마크이다.)에서 1546년 12월 7일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다른 한 아이가 죽었기 때문에, 원래 붙이려던 티게(Tyge) 라는 이름 대신 \"복있는 아이\" 라는 뜻의 티코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한 살 때 그는 자기의 큰아버지에게 강제로 유괴 당해 양자로 들어갔는데, 다행히 돈 많은 큰아버지 덕에 비교적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하면서 자랄 수 있었다.
1559년 13살의 나이에 그는 천문학이 아닌 법학을 공부하게 위해 코펜하겐 대학에 들어갔다. 이듬해 8월 21일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을 일이 생겼다. 바로 일식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가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은 일식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일식을 예언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인간이 정확히 별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는 것에 어떠한 신성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티코는 알폰스 천문표나 프로이센 천문표를 사서 행성의 운행을 연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열심히 읽고 공부하였다. 결국 그는 관심을 천문학으로 돌린 것이다.
그러나 티코의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티코를 수사학에 능한 뛰어난 귀족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아버지 오토 브라헤는 티코를 가정교사와 동행시켜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결국 1562년 티코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가정교사는 티코에게 법학 공부를 지도하고 밤에 별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티코는 천문학 공부가 더 즐거웠기 때문에 가정교사가 잠든 사이에 별을 보곤 하였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점성술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물론 티코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점성술에서 별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구상에서 별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계판의 숫자와 같은 것이 별이고, 이때 시계바늘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움직이는 별, 행성이다. 점성술에 따르면 각각의 행성은 고유의 영향력을 갖는다고 한다. 태양은 창조력과 자기 통달, 달은 본능과 감수성, 수성은 통신, 금성은 동정심과 쾌락, 화성은 자기주장과 의지력, 목성은 열정과 발전,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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