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김일성 가짜설과 반공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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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김일성 가짜설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1. ‘가짜 김일성’론의 내용
1) ‘가짜 김일성‘론의 경로 · 수단
2) ‘가짜 김일성’론의 문제점

2. 김일성 ‘항일유격투쟁’의 진상
1)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에의 참가
2) 유격대지휘관으로서의 김일성
3) 소련에서의 생활과 귀국 과정

3. ‘반공’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4. 왜 정부가 반공의 이념적 잣대를 내세웠는가?
1) '반공'으로 민족 해방 운동가를 탄압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자들
2) 해방공간 : 좌익의 우세
3) 6.25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
4) 이승만 정권에게 있어 반공이데올로기

5. 그리고 지금...

맺음말

본문내용

成柱<김성주>라는 등식도 일제관헌자료에 의해서 허구로 밝혀졌다. 셋째, 이명영 교수가 주장하는 이른바 ‘김일성 행명론’의 논리적 무모성을 지적할 수 있다. 이명영 교수는 김일성이나 최현이 죽었을 때 그들의 이름을 따서 제2대 김일성, 제2대 최현이 출현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항일유격투쟁’ 기간 중 이홍광, 이동광 등 김일성이나 최현을 능가하는 뛰어난 지도자들이 무수하게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이 전사했을 때 그들의 이름을 따서 제2의 이홍광, 제 2의 이동광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들오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독 김일성과 최현만이 죽어서도 그들을 대신할 제2의 김일성, 제2의 최현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교수가 김일성이 사살된 것으로 기술한 1937년 말 김일성과 그의 제 6사는 몽강현 마당거우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3월부터 다시 대일유격전을 나섰다. 넷째, 이명영 교수는 중국에서 출판된 문헌들에 김일성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조차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경력을 완전무결할 정도로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들은 1990년대 들어서서 김일성의 이름을 그의 당시 직책과 함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설령 이명영 교수의 주장대로 중국문헌에 김일성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 중국이 북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같은 논리로 이 교수가 고증한 1,2대 김일성도 중국문헌에 나오지 않는 것이 되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격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적지 않은 증언자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아직 중국에는 김일성과 유격대활동을 같이 한 조선족 및 한족인사들이 여러 명 생존해 있는데, 이들은 ‘가짜 김일성’론을 부정하고 있다.
2. 김일성 ‘항일유격투쟁’의 진상
1)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에의 참가
김일성이 ‘항일유격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부터였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성 위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근거하여 만주 전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항일유격대 건설이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만주상황 속에서 백두산 산록에 위치한 안도현의 공산청년조직에 관계하고 있던 김일성은 그 지역에서 1932년 4월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중국 구국군 우사령 부대 산하에서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김일성의 이 별동대는 곧 왕청현에서 결성된 왕청 유격대와 합류하였으며 그는 유격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동만 각지의 유격대가 단일편제를 갖추어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1934년 3월 결성)에서 1934년 가을부터 3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주로 빈농·고농 출신으로 이루어져 문맹률이 80%가 넘었던 항일 유격대 속에서 중학까지 수업한 그의 학력은 상대적으로 돋보였으며 거기에 그의 능력이 보태어져 22세의 젊은 나이에 단에 정치위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격대에서의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한때 당시 많은 조선인공산주의자들에게 올가미로 씌어졌던 ‘일제주구’를 의미하는 민생단 분자로 몰려 유격구 내 아동학교의 교사로 강등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극복하고 재기하여 1936년 3월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3사 사장이 되었다.
2) 유격대지휘관으로서의 김일성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유격투쟁’은 조·중 연합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지도부는 중국공산당이었다. 이러한 지휘체계 때문에 당시 조선혁명에 대한 자신들의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중국혁명에의 복무를 요구하는 중공과 상당한 갈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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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7.08
  • 저작시기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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