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천도운동부터 5.16쿠데타까지 요약 및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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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부터 5.16쿠데타까지 요약 및 느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묘청의 난과 한반도의 국제적 입지
무신 난과 몽골의 침략
몽골의 지배와 공민왕의 개혁정치
배불숭유정책과 사대교린정책
정도전과 이방원
유교적 양반체제의 성립
주자학의 발전
과거제도와 신분제
양반사회의 균열
임진-병자란
실학의 시대
세도정치
천주교와 동학
대원군과 민비
일본의 대륙 침략
대한제국의 성립과 그 의의
항일운동과 그 실제
해방과 한반도 분단
한국전쟁과 그 의의
4.19와 5.16

본문내용

기 위해 탐학을 공공연히 한다는 것이다. 영조 때에는 1필의 군포를 징수했는데 어린이에게 정수하는 황구첨정, 죽은 자에게 징수하는 백골징포가 나타났고 다른 이웃의 몫까지 납부하는 족징 인징 등이 있어 군포의 문란이 매우 심각했다. 이렇게 어지러운 세도정치 기간 민중들은 난을 일으켰는데 그 중 선두주자는 홍경래의 난이다. 몰락한 양반의 자손인 홍경래는 조정의 서북차별 대우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 뒤에 진주 민란 등 연속적인 민란이 일어났다. 조정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해 삼정의 문란을 교정하려하고 암행어사도 파견했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문벌이 권력을 잡아도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정치를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런 입장이 되면 그렇지 못하나 보다. 이는 양반사회의 혼란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고통까지 가져왔다. 이웃의 몫까지 내야하는 군포의 횡포 때문에 이웃끼리 함께 도망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한 자리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도망다녀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백성들을 한 번이라도 생각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32강 천주교와 동학
당시 조선은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이 극에 달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있던 자들에게 내세에 대한 희망을 불러 일으켜 줄 수 있고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양반이나 계급적 억압을 받는 중상민 그리고 사회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던 부녀자들에게 평등사상을 지닌 천주교는 환영받았다. 천주교는 조선조의 사상적 기반인 유교적 충효사상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사상이었고 남인시파가 천주교의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천주교 박해는 정치적으로 남인시파 타도의 구실로 안성맞춤이었다. 이로 인해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졌다. 이해 대항하는 한민족의 독자적 종교인 동학이 발생 했는데 보국안민을 내세워 밖으로는 외세 침략 및 천주교의 침투에 대항하여 보국을 안으로는 조선의 모순인 탐관오리로부터 백성을 구하고자하는 안민을 주장하였다. 동학은 유.불.선 3교와 기독교의 장점을 가미시킨 것으로 가장 기본이 되고 있는 사상은 인간과 하늘을 하나로 보는 인내천 사상이다. 동학이 크게 유행하자 조정은 긴장했고 최제우는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되었다.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최제우가 남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정리하여 간행하는 등 교세확대를 위한 노력을 했다.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종교의 힘에 기대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 때 당시의 천주교나 동학은 남아있는 양반들에게 있어 매우 위험한 존재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평등사상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유교의 질서가 몇백년 동안 지속되어 온 조선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을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우리 민족이 창시한 동학은 거부감이 조금 덜 할 듯 하다.
33강 대원군과 민비
흥선대원군은 능력본위로 인재를 등용하고 왕권약화의 상징이며 당쟁의 근거지인 서원의 철폐를 단행하여 전국 400여 개의 서원 중 47개 만을 남기고 모두 없애 버렸다. 또한 임진왜란 후 300여 년이 지나도록 재건하지 못한 경복궁을 왕권강화를 상징하는 의미로 중건했다. 국내적으로는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를 행한 대원군은 밖으로 쇄국정책을 시도하였다. 비변사를 의정부에 통합시켜 의정부에서 국방문제를 논의하도록 했다. 또 삼군부라는 국방전담부서를 만들었다. 이 때 병인양요가 일어났는데 한성근이 문수산성에서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각각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신미양요 때에는 미군이 초지진 광성진 등을 점령하고 갑곶에 상륙했지만 광성진 전투에서 어재연의 저항에 물러났다. 이 승리로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의 결의를 더욱 굳게 했다. 이런 흥선대원군은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거두고 당백전이라는 악화를 주조하여 경제적 혼란을 초래했다. 또 평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호포라 개칭하여 양반에게도 징수했고 사창제를 부활시켰다.
흥선대원군은 나라를 지켰지만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생각이다. 세도정치시기의 혼란스러움은 조금 멈췄고 실추된 왕권도 다시 세웠다. 하지만 왕권확립에 급급한 나머지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상평통보의 백배의 가치를 지닌 당백전의 발행으로 조선사회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어 상업이 마비되었을 것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대를 훌륭하게 막아냈지만 이것은 단시간 동안의 방책이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방침이었을 텐데 너무 우리 것만을 주장한 것이 아닌가 싶다.
34강 일본의 대륙 침략
일본은 가깝고 내막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한반도야 말로 그들의 식민지 개척의 적지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운양호사건을 일으켰는데 강화도 초지진 앞 바다를 배회하다 수비병이 발포하자 이를 미끼로 통상을 요구했고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다. 부산 동래에서도 일본이 위협하자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3개 항구를 개항하고 해안측량권도 주었고 치외법권까지 인정해 주었다. 일본이 미국에 의해서 당한 일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 조선은 수신사로 김기수와 김홍집을 파견했는데 2차 수신사로 갔던 김홍집이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들여 왔다. 조선책략에서는 러시아를 견제하라는 내용과 친중국, 결일본, 연미방이라는 내용이 주였다. 이 책에 반발해 영남지역의 유학자들이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유림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는데 이를 알고 청은 자신들의 양무운동을 견학하도록 했다. 그 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서 행정의 쇄신을 기하려 했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해 별기군을 만들었다. 후에 별기군과 구식군대의 대립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일본과 제물포조약이 맺어져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개화당이 주세력이 되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은 일본과 한성조약을 맺고 청.일은 천진조약을 맺었다. 동학운동이 일어났을 때 청.일 양국의 군대 동시파병의 원인이 되는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져 일본의 우위를 확인하는 원인이 되는 조약이었다.
일본은 조금조금씩 우리나라를 갉아 먹었다. 자신이 당한대로 똑같이 행한 것이 우리나라였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성공했다는 것은 대단하지만 식민지 개척까지

키워드

서경,   공민왕,   유교,   이방원,   과거,   양반,   세도,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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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7.08
  • 저작시기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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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88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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