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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 부 현대사회와 군수산업
제 2 부 미국의 군수산업
추가자료. 죽음의 상인들이 벌이는 잔혹한 게임
추가자료. 군산복합체
제 3 부 일본의 군수산업
제 4 부 한국의 군수산업
추가자료. 김정일 정권의 군수산업 현황
제 5 부 탈냉전과 군수산업
제 2 부 미국의 군수산업
추가자료. 죽음의 상인들이 벌이는 잔혹한 게임
추가자료. 군산복합체
제 3 부 일본의 군수산업
제 4 부 한국의 군수산업
추가자료. 김정일 정권의 군수산업 현황
제 5 부 탈냉전과 군수산업
본문내용
군수산업의 발전은 진공상태에서가 아니라, 일정한 사회구조적 조건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일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것은 전쟁이 곧 ‘사회적 현상’이라는 사실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토인비는 한번은 다 번창하였지만 그 많은 문명들이 통과하여 사라져 버린 ‘죽음의 문’은 무엇인가가 바로 역사와 문명 연구의 핵심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죽음의 문’의 암울한 그림자를 바로 군사산업의 발전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현대사회를 성찰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진보에 대한 낙관적 믿음만이 난무하는 시대일수록, 혹은 이성에 대한 허무주의적 불가지론과 진보에 대한 희망이 극단적으로 상실되는 시기일수록, 한 사회의 ‘발전’이라는 긍정적 힘이 동시적으로 그 사회의 ‘위기’를 증대시키는 부정적 힘으로 작용한다는 사회 변동과 발전에 관한 변증법적 인식을 일반화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소위 이러한 ‘죽음의 문’이 ‘합리주의적 계몽성’의 이름으로 부당하게 왜곡되거나, ‘ 환상적 유토피아’에 의해 의도적으로 가리워질 때에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탈냉전이 곧 평화를 이르는 것은 아니다. 냉전 시대에는 잠재화되었던 군사적, 무력적 위기가 탈냉전의 시기에 오히려 증대되고 있다. 탈냉전은 사회주의의 위기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와도 긴밀히 맞물려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를 단순히 국제 관계상의 초역사적 갈등 구도로만 접근할 때에는 그 위기의 본질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현대의 위기는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위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사회가 지향하였던 평화의 이상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
냉전 시대를 지배하였던 그 냉전의 진정한 의미도 사실은 실제적 대립이었다기보다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하나의 담론의 대립이었다. 이처럼 근대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는 갈등 구조는 근대사회가 딛고 있는 현실에서 발생되기도 하면서, 또한 근대사회의 이념적 지향과 그 현실과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근대사회의 현실적, 이념적 위기의 본질을 근대사회의 기본적 가치 체계인 이성과 진보, 계몽과 해방으로 표상되는 근대성의 문제를 통해 접근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만이 체제적 위기 저편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근대사회 전체의 위기를 올바로 조명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사회의 위기는 단순한 수사법적 함의 이상의 구체적 실체로 전개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근대적 위기가 산업적으로 정형화하여 노정하는 일련의 체계인 군수산업의 발전 구조를 주목함으로서, 근대사회가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는 위기의 본질적 측면을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이러한 근대성의 위기를 접근하는 시각은 크게 보아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근대성의 위기를 산업 사회의 계몽적 전도 과정에서 발생한 ‘미완적 프로젝트’에서 즉, 근대성의 왜곡 내지 자기 발전의 결여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보는 하버마스류의 접근이 있다. 그는 이러한 미완의 기획으로서의 계몽의 위기와 부동화도니 근대성, 인간주의의 독단에 빠진 문화적 오류, 지적, 도덕적 위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근대사회의 발전에 따른 물상화의 증대는 체계의 복합성을 증대시키고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증대시키게 된다. 그 결과 체계의 메카니즘은 생활세계에 닻을 내리게 되며, 생활 세계에서의 자기결정성과 지기실현은 소비적 역할에서나 못 볼 수 있는 ‘생활 세계의 식민화’와 ‘의미의 성실’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묶여질 수 없는 두 영역에서 발생하는 근대성의 위기는 바로 ‘성스러운 것의 언어화’를 통한 합리적 구조를 통해 재생산된다. 근대사회의 지배 수단인 기능적 이성의 증대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위기는 다름 아닌 의사소통적 이성을 상징되는 근대성의 미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근대성의 회복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 그 자체의 규범성을 창조하기 위해 지속적 자기 갱신을 통한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비젼을 재획득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새로운 비젼은 다름 아닌 근대사회의 발전에 따라 이원화된 이성구조 즉, 구도화된 이성의 수단화와 지배성을 극복하고, 해방의 담론구조를 담보할 수 있는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한 해방적 이성의 창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둘째는, 근대 이성의 위기는 산업 사회의 단선적 진화 과정 속의 ‘탈 역사적 자유주의적 이성’의 힘과 아직도 후진적 ‘역사적’힘과의 잠재적 갈등에서 파생된다고 보는 후쿠야마등의 ‘자유주의에 대한 낙관적’접근이 있다.
헤겔의 논의를 빌어 역사의 동인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적극 강조하는 그는, 자유주의의 최종적 승리로 확인된 최근의 역사는 이데올로기 갈등이 종국에 왔으므로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주의로 ‘탈근대화’된 사회와 전통적, 민족적, 종교적 신념이 지배하는 ‘전근대’사회와의 대립이 현대의 위기를 구성하고 있으나, 이것이 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신념으로 대체되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현실적 증거물을 ‘거만하게’ 제시하면서, 자유주의만이 세계사적 유의미성을 획득하였다는, 자유주의의 승리를 노골적으로 부르짖는 그의 주장한데 대해 많은 논자들이 무기력하게 지켜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종다양한 자유주의의 변이를 무시하고 단일하게 취급한 그의 단견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간의 내적, 역사적 긴장관계를 무시하고, 시장 메카니즘을 단지 무기력한 조정의 메카니즘으로만 설정하고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들간의 잠재적 갈등의 가능성을 간과한 점은 심각한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셋째는, 근대성의 위기는 오직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산물로만 보아,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급진화된 계몽의 구상’을 통한 사회주의적 이성의 ‘견결한 수호자’로 불릴 만한 칼리니코스의 입장이 있다. 그는 하등 새로울 것이 없는 제반 포스트 모더니즘의 ‘은어’속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급진화된 계몽’의 구상은
토인비는 한번은 다 번창하였지만 그 많은 문명들이 통과하여 사라져 버린 ‘죽음의 문’은 무엇인가가 바로 역사와 문명 연구의 핵심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죽음의 문’의 암울한 그림자를 바로 군사산업의 발전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현대사회를 성찰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진보에 대한 낙관적 믿음만이 난무하는 시대일수록, 혹은 이성에 대한 허무주의적 불가지론과 진보에 대한 희망이 극단적으로 상실되는 시기일수록, 한 사회의 ‘발전’이라는 긍정적 힘이 동시적으로 그 사회의 ‘위기’를 증대시키는 부정적 힘으로 작용한다는 사회 변동과 발전에 관한 변증법적 인식을 일반화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소위 이러한 ‘죽음의 문’이 ‘합리주의적 계몽성’의 이름으로 부당하게 왜곡되거나, ‘ 환상적 유토피아’에 의해 의도적으로 가리워질 때에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탈냉전이 곧 평화를 이르는 것은 아니다. 냉전 시대에는 잠재화되었던 군사적, 무력적 위기가 탈냉전의 시기에 오히려 증대되고 있다. 탈냉전은 사회주의의 위기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와도 긴밀히 맞물려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를 단순히 국제 관계상의 초역사적 갈등 구도로만 접근할 때에는 그 위기의 본질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현대의 위기는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위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사회가 지향하였던 평화의 이상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
냉전 시대를 지배하였던 그 냉전의 진정한 의미도 사실은 실제적 대립이었다기보다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하나의 담론의 대립이었다. 이처럼 근대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는 갈등 구조는 근대사회가 딛고 있는 현실에서 발생되기도 하면서, 또한 근대사회의 이념적 지향과 그 현실과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근대사회의 현실적, 이념적 위기의 본질을 근대사회의 기본적 가치 체계인 이성과 진보, 계몽과 해방으로 표상되는 근대성의 문제를 통해 접근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만이 체제적 위기 저편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근대사회 전체의 위기를 올바로 조명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사회의 위기는 단순한 수사법적 함의 이상의 구체적 실체로 전개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근대적 위기가 산업적으로 정형화하여 노정하는 일련의 체계인 군수산업의 발전 구조를 주목함으로서, 근대사회가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는 위기의 본질적 측면을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이러한 근대성의 위기를 접근하는 시각은 크게 보아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근대성의 위기를 산업 사회의 계몽적 전도 과정에서 발생한 ‘미완적 프로젝트’에서 즉, 근대성의 왜곡 내지 자기 발전의 결여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보는 하버마스류의 접근이 있다. 그는 이러한 미완의 기획으로서의 계몽의 위기와 부동화도니 근대성, 인간주의의 독단에 빠진 문화적 오류, 지적, 도덕적 위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근대사회의 발전에 따른 물상화의 증대는 체계의 복합성을 증대시키고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증대시키게 된다. 그 결과 체계의 메카니즘은 생활세계에 닻을 내리게 되며, 생활 세계에서의 자기결정성과 지기실현은 소비적 역할에서나 못 볼 수 있는 ‘생활 세계의 식민화’와 ‘의미의 성실’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묶여질 수 없는 두 영역에서 발생하는 근대성의 위기는 바로 ‘성스러운 것의 언어화’를 통한 합리적 구조를 통해 재생산된다. 근대사회의 지배 수단인 기능적 이성의 증대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위기는 다름 아닌 의사소통적 이성을 상징되는 근대성의 미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근대성의 회복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 그 자체의 규범성을 창조하기 위해 지속적 자기 갱신을 통한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비젼을 재획득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새로운 비젼은 다름 아닌 근대사회의 발전에 따라 이원화된 이성구조 즉, 구도화된 이성의 수단화와 지배성을 극복하고, 해방의 담론구조를 담보할 수 있는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한 해방적 이성의 창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둘째는, 근대 이성의 위기는 산업 사회의 단선적 진화 과정 속의 ‘탈 역사적 자유주의적 이성’의 힘과 아직도 후진적 ‘역사적’힘과의 잠재적 갈등에서 파생된다고 보는 후쿠야마등의 ‘자유주의에 대한 낙관적’접근이 있다.
헤겔의 논의를 빌어 역사의 동인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적극 강조하는 그는, 자유주의의 최종적 승리로 확인된 최근의 역사는 이데올로기 갈등이 종국에 왔으므로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주의로 ‘탈근대화’된 사회와 전통적, 민족적, 종교적 신념이 지배하는 ‘전근대’사회와의 대립이 현대의 위기를 구성하고 있으나, 이것이 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신념으로 대체되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현실적 증거물을 ‘거만하게’ 제시하면서, 자유주의만이 세계사적 유의미성을 획득하였다는, 자유주의의 승리를 노골적으로 부르짖는 그의 주장한데 대해 많은 논자들이 무기력하게 지켜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종다양한 자유주의의 변이를 무시하고 단일하게 취급한 그의 단견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간의 내적, 역사적 긴장관계를 무시하고, 시장 메카니즘을 단지 무기력한 조정의 메카니즘으로만 설정하고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들간의 잠재적 갈등의 가능성을 간과한 점은 심각한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셋째는, 근대성의 위기는 오직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산물로만 보아,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급진화된 계몽의 구상’을 통한 사회주의적 이성의 ‘견결한 수호자’로 불릴 만한 칼리니코스의 입장이 있다. 그는 하등 새로울 것이 없는 제반 포스트 모더니즘의 ‘은어’속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급진화된 계몽’의 구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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