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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열하일기에서 발췌한 경제관련 내용들
Ⅱ. 열하일기를 읽고 나서 (감상문)
Ⅲ. 열하일기의 여정
Ⅳ. 열하일기의 탄생배경
Ⅱ. 열하일기를 읽고 나서 (감상문)
Ⅲ. 열하일기의 여정
Ⅳ. 열하일기의 탄생배경
본문내용
그 순간에 충실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태도라고 할까. 만날 때 이미 헤어짐을 두려워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 열기를 주저하며 다시 세상과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더 쌓아올리는 요즘 사람들, 적어도 내 태도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안 그런 척 하면서 주고받음을 계산하고 예의라는 이름으로 피상적인 사귐만을 고집하는, 무엇보다 더 많이 마음을 여는 사람이 더 많이 다친다는 그야말로 ‘현대적인 잠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들을 본다면, 그는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에이 비루한 것들, 차라리 청심환이나 조선부채만 보고 달려드는 뙤놈들을 사귀는 것이 훨씬 낫겠구먼~’라고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선인 박지원과 함께 19세기 청나라를 여행한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음을 밝힌다. 여행이 재미있을수록 질투심을 참아내느라 사실 조금 힘들었다. 19세기가 부러워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여전히 나는 이 땅에 두 발 디디고 서 있으며 내 앞에는 더 많은 낯선 길들이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저 길 너머에 ‘내가 모르는’ 그리고 ‘나를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니 이제 ‘눈부신 낯섦’을 찾아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우연히 하지만 운명처럼 만나게 될 ‘그 무엇’을 기대하며 말이다. 그 때가 되면 저 앞에서 사람 좋게 웃고 있을 박지원을 향해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Ⅲ. 열하일기의 여정
이 부분은 비록 교수님께서 채점기준에 포함시키시지 않은 부분이나 조금이나마 제 성의를 보여드리고자 적어보았습니다.
열하일기는 1780년 5월 25일부터 1780년 10월 27일까지 있었던 사행단의 여정 중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부터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까지, 날짜로는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일까지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Ⅳ. 열하일기의 탄생배경
이 부분도 역시 교수님께서 채점기준에 포함시키시지 않은 부분이나 조금이나마 제 성의를 보여드리고자 적어보았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영조 13년(1737년) 서울 서소문 밖 야동(冶洞)에서 노론 명문가 박사유의 막내로 태어났다. 열 여섯. 이팔청춘에 진주 이씨와 결혼한 후, 장인어른(이보천)과 처삼촌(이양천)의 지도 하에 학업에 정진했다. 처가 역시 노론 학통을 계승한 명문가, 한마디로 출신성분은 '빵빵한' 편. 하지만, 양쪽 집안 모두 '청렴'을 가문의 영광으로 내거는 바람에 평생 가난이 떠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연암은 젊은 시절부터 시대의 주류를 빗겨가는 삶을 선택한다.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이라는 코스에서 스스로 탈주해 버렸던 것이다. 그가 과거를 포기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개입했을 것이다. 당쟁으로 얼룩진 정국, 아수라장으로 변한 과거시험장, 절친한 친구들의 정치적 희생 등등. 그리고 아마 체질적으로 격식에 갇히는 삶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과거를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연암의 젊은 날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요즘으로 치자면 말 그대로 한량에 백수인 셈인데, 집안이 가난하기까지 했으니 제대로 '놀' 팔자도 못 된 셈이다. 이렇게 부도, 명예도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그의 30대를 생애 가장 빛나는 시절로 만들어 준 결정적인 사건을 만나게 된다. 바로 언제나 함께 웃고 함께 울어주는 벗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백탑은 파고다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말한다. 당시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이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북학파의 핵심 멤버인 박제가와 이덕무, 천재 과학자이자 음악가인 홍대용, 괴짜 발명꾼 정철조, 조선 최고의 창검술을 자랑한 백동수 등이 그의 자랑스러운 친구들이었다. 삼십대 중반 즈음, 연암은 전의감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이 모임을 이끌었다. 연암과 거의 친구들은 매일 밤 한곳에선 풍류를, 다른 한편에선 명상을 ,또 한쪽에선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벗이 있었기에 진정 행복했고, 벗이 있었기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백탑에서의 빛나는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776년, 우여곡절 끝에 정조임금이 즉위하게 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홍국영의 세도가 시작되면서 자신의 반대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갔는데, 그 불똥이 급기야 연암에게도 튀게 된 것이다. 때마침 집안의 사정으로 먹고살기도 막막해진 연암은 도주하듯 개성 부근에 있는 '연암골'로 들어가야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마흔 두 살 즈음. 2년 뒤, 홍국영의 실각과 더불어 연암은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만, 옛 친구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벗과의 교류도 세월의 무상함을 피할 수는 없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인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둔다고 했던가. 바로 이 시기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열하일기』가 탄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780년, 울울한 심정으로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를 염원하던 차,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연암을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정식 수행단이 아니라 일종의 '꼽사리' 여행자인 채. 그의 생애 가장 큰 행운이자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인 '중국 여행'은 이렇게 우연하게 시작된다.
『연암집』에 수록된 『열하일기』
열하일기는 총 2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7권은 여정을 시간 흐름에 따라 정리하는 편년체 방식으로 쓰여져 있고, 8~26권은 여정과는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쓰여진 기사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질」이나 「허생전」, 그리고 '오천 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라 일컬어지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같은 글들이 바로 후자에 속하는 글들이다. 책을 내자, 천고에 드문 문장이라며 열광하는 '폐인'들도 많았지만, 책을 불태워버려야 한다며 난리를 떠는 '안티 팬'들도 적지 않았다. 급기야 1792년, 정조는 문체반정을 주도하면서 문체를 어지럽힌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는 그저 중원천지에서 마주친 '말과 사물'들의 웅성거림을 세상에 전달한 전령사였을 뿐인 것을.
조선인 박지원과 함께 19세기 청나라를 여행한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음을 밝힌다. 여행이 재미있을수록 질투심을 참아내느라 사실 조금 힘들었다. 19세기가 부러워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여전히 나는 이 땅에 두 발 디디고 서 있으며 내 앞에는 더 많은 낯선 길들이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저 길 너머에 ‘내가 모르는’ 그리고 ‘나를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니 이제 ‘눈부신 낯섦’을 찾아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우연히 하지만 운명처럼 만나게 될 ‘그 무엇’을 기대하며 말이다. 그 때가 되면 저 앞에서 사람 좋게 웃고 있을 박지원을 향해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Ⅲ. 열하일기의 여정
이 부분은 비록 교수님께서 채점기준에 포함시키시지 않은 부분이나 조금이나마 제 성의를 보여드리고자 적어보았습니다.
열하일기는 1780년 5월 25일부터 1780년 10월 27일까지 있었던 사행단의 여정 중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부터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까지, 날짜로는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일까지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Ⅳ. 열하일기의 탄생배경
이 부분도 역시 교수님께서 채점기준에 포함시키시지 않은 부분이나 조금이나마 제 성의를 보여드리고자 적어보았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영조 13년(1737년) 서울 서소문 밖 야동(冶洞)에서 노론 명문가 박사유의 막내로 태어났다. 열 여섯. 이팔청춘에 진주 이씨와 결혼한 후, 장인어른(이보천)과 처삼촌(이양천)의 지도 하에 학업에 정진했다. 처가 역시 노론 학통을 계승한 명문가, 한마디로 출신성분은 '빵빵한' 편. 하지만, 양쪽 집안 모두 '청렴'을 가문의 영광으로 내거는 바람에 평생 가난이 떠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연암은 젊은 시절부터 시대의 주류를 빗겨가는 삶을 선택한다.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이라는 코스에서 스스로 탈주해 버렸던 것이다. 그가 과거를 포기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개입했을 것이다. 당쟁으로 얼룩진 정국, 아수라장으로 변한 과거시험장, 절친한 친구들의 정치적 희생 등등. 그리고 아마 체질적으로 격식에 갇히는 삶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과거를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연암의 젊은 날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요즘으로 치자면 말 그대로 한량에 백수인 셈인데, 집안이 가난하기까지 했으니 제대로 '놀' 팔자도 못 된 셈이다. 이렇게 부도, 명예도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그의 30대를 생애 가장 빛나는 시절로 만들어 준 결정적인 사건을 만나게 된다. 바로 언제나 함께 웃고 함께 울어주는 벗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백탑은 파고다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말한다. 당시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이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북학파의 핵심 멤버인 박제가와 이덕무, 천재 과학자이자 음악가인 홍대용, 괴짜 발명꾼 정철조, 조선 최고의 창검술을 자랑한 백동수 등이 그의 자랑스러운 친구들이었다. 삼십대 중반 즈음, 연암은 전의감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이 모임을 이끌었다. 연암과 거의 친구들은 매일 밤 한곳에선 풍류를, 다른 한편에선 명상을 ,또 한쪽에선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벗이 있었기에 진정 행복했고, 벗이 있었기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백탑에서의 빛나는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776년, 우여곡절 끝에 정조임금이 즉위하게 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홍국영의 세도가 시작되면서 자신의 반대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갔는데, 그 불똥이 급기야 연암에게도 튀게 된 것이다. 때마침 집안의 사정으로 먹고살기도 막막해진 연암은 도주하듯 개성 부근에 있는 '연암골'로 들어가야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마흔 두 살 즈음. 2년 뒤, 홍국영의 실각과 더불어 연암은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만, 옛 친구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벗과의 교류도 세월의 무상함을 피할 수는 없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인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둔다고 했던가. 바로 이 시기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열하일기』가 탄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780년, 울울한 심정으로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를 염원하던 차,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연암을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정식 수행단이 아니라 일종의 '꼽사리' 여행자인 채. 그의 생애 가장 큰 행운이자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인 '중국 여행'은 이렇게 우연하게 시작된다.
『연암집』에 수록된 『열하일기』
열하일기는 총 2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7권은 여정을 시간 흐름에 따라 정리하는 편년체 방식으로 쓰여져 있고, 8~26권은 여정과는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쓰여진 기사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질」이나 「허생전」, 그리고 '오천 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라 일컬어지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같은 글들이 바로 후자에 속하는 글들이다. 책을 내자, 천고에 드문 문장이라며 열광하는 '폐인'들도 많았지만, 책을 불태워버려야 한다며 난리를 떠는 '안티 팬'들도 적지 않았다. 급기야 1792년, 정조는 문체반정을 주도하면서 문체를 어지럽힌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는 그저 중원천지에서 마주친 '말과 사물'들의 웅성거림을 세상에 전달한 전령사였을 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