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Rwanda]내전 르완다의 현황 내전시 UN의 역할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르완다[Rwanda]내전 르완다의 현황 내전시 UN의 역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르완다의 기본조사
2. 르완다 내전에 대해
3. 의미및 영향
4. 추후전망
5. 주요일지
6. 고찰
7. 르완다의 현황
8. 내전시 UN의 역할
9. 내전에 대한 요약

본문내용

전략도시로, 09/07 부룬디 정부군이 철수하면서 RCD가 점령. Fizi市는 르완다, 부룬디 반군이 탕가니카호를 통해(콩고정부가 제공하는 고속정을 이용하여) 자국에 침투하는 요충지. RCD-Goma의 지도자 오누숨바는 DR콩고 정부군이 르완다, 부룬디 반군의 군수지원과 작전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비난. 르완다의 Kabarebe장군은 Fizi를 점령한 부대는 탕가니카호의 남서항구 Muliro에서 왔으며, Fizi 인근에는 르완다로 침공하는 후투반군 약 4만명의 일부가 있다고 추정. 9월중순부터 르완다 정부군과 RCD-Goma반군은 콩고동부의 탕가니카호의 Ubwari반도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계획해 왔음. 목적은 부룬디의 FDD(친후투), FNL(친후투), DR콩고의 Mai-Mai(DR콩고 친정부민병대), 르완다의 Ex-Far(구 르완다육군), Interahamwe(후투민병)을 소탕하기 위한 것임.
5. 르완다 대학살, 과연 종족간의 갈등 뿐이었을까?
르완다 대학살. 벌써 그로부터 13년이나 흐른 지금, 르완다의 대학살은 그러한 참극이 언제라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르완다 대학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단지 종족 분리정책의 후환을 말하는 것일까?
분명히 아니다. 르완다 대학살은 우리와 가깝고도 먼, 그러나 언젠가는 있을 수 있는, 끔찍한 참극의 경고였다. 단지 종족 분리정책에 의한 부족간의 갈등,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 옛날 누가 경고 했던 것처럼..
르완다와 부룬디. 인구 증가율이 최대에 이르는 동부 아프리카 중에서도 최대에 이른다. 아프리카, 아니 전 세계에서도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이다. 이토록 인구 과밀인 나라에서 대량학살이 발생했다. 부룬디 대량학살로 수십만이 희생당했고, 르완다 대학살로 백여만의 인구가 전멸했다. 르완다 대학살은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다음에 오는 가장 최대의 대량학살 규모이다. 그리고 표면적인 이유는 \"종족 갈등\", 이 일이 왜 발생한 것일까?
르완다와 부룬디는 85%를 차지하는 후투족과, 15%를 차지하는 투치족이 있다. 이들은 1916년. 벨기에에 의한 식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해 왔다. 그리고 종족간의 갈등은 커녕, 종족간의 혼합이 더욱 이루어 졌다. 그러나, 벨기에는 그런 과거를 존중해 줄 리 만무했다. 그들은 피부색이 옅은 투치족을 후투족보다 더 우수한 종족으로 여겼고, 1930년대 부터는 지난 수백년간 섞여 있었던 두 종족을 갈라놓기 위해 서로 종족을 구별할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게 했고, 따라서 후투족과 투치족은 확실히 나뉘게 된다. 그리고, 식민 통치 기간 동안 늘 투치족이 후투족을 지배해 오다가, 1962년, 부룬디가 독립하자 벨기에의 종족 분리 정책으로 인해 두 부족은 서로 중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투족은 독립을 원했고, 곧 부족간의 대립, 살해로 이어지다가, 드디어 부룬디에서는 투치족 정권이 유지되었다.
르완다와 부룬디. 투치족과 후투족 대립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부룬디에서 후투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투치족이 그들 수십만을 학살시켰다. 반면 르완다에서는 후투족 정권이 성립되고, 이 과정에서 2만여명의 투치족이 전멸했다. 그러자, 르완다에서 투치족은 부룬디로 건너갔고, 투치족은 수차례 공격을 도모했으며, 이는 곧 보복으로 이어졌다.
한편 르완다에서는 잠재되어 있던 환경문제로 인하여 성장을 멈추고, 르완다는 경제 위기를 맞았으며, 남부에 가뭄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위기에 봉착해 있으면서도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집권하고 있던 하비야리마나는 그것을 지속했다.
그러나,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시원찮은\" 행동이었고, 그들은 투치족 대량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투족은 투치족을 두려워 하면서도 중오했다. 반대로 투치족도 후투족을 중오했다. 이것은 투치족이 후투족을 지배했던 것과, 또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데에서 기인하였다. 그러다 1994년 4월 6일. 하비야리마나 대통령과 부룬디의 임시 대통령이 탑승한 정용기가 츠완도의 수도인 키갈리 공항에서 미사일을 맞고 격추되었고, 대통령 일행 모두 죽고 말았다. 이로인해, 양 부족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후투족 극단 주의자들은 후투족 온건파를 살해하고, 모든 언론을 장악했으며, 100만의 투치족에 대한 대학살극을 자행했다. 민간인을 모아 훈련시키고, 무기를 지급하였고, 도로를 봉쇄한 체로, 신분이 확실한 투치족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또 투치족에게 안전한 곳이라 하여 유인한 뒤, 그 곳에서 대학살극을 자행했고, 언론을 이용해 이것을 \"광고\"하기 까지 했다.
르완다는 전국적인 살육 광란에 빠져들었고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80만명에서 100만명에 달하는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들을 살육했다. 후투족들은 투치족의 남자, 여자, 어린이들을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대로 잡아 죽였는데, 대부분 벌채용 칼로 무자비하게 몸을 절단해 죽였다.
무기도 구식화 되어갔으며 군대가 참여하던 것이, 이제는 민병대(?)가 조직되어 머셰티와 곤봉 등, 그리고 벌채용 도구까지 이용되어 잔혹한 광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un평화 유지군이 르완다에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학살이 발생하자 즉시 철군하였으며, 미국도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더 이상 외부에서 이 광란의 연속을 막아주진 않았다. 이제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투치족 반군인 르완다 애국전선(RPF)가 조직되고, RPF는 가는 곳 마다 학살을 중지하고 소수(2~6만)의 보복 학살까지 자행했다. 드디어 7월 18일. RPF는 \"승리\"를 선언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으며 민족 통합에 힘쓰려 했다.
르완다 대학살 희생자 묘역인 키갈리메모리얼센터에 당시 희생자 유골들.
르완다 대학살로 전체 인구 11%에 달하는 80만 투치족이 절멸했다.
대학살이 끝나자, 200만의 르완다인들은 주변 국가로 피신했고, 그 대부분은 후투족이었다. 그리고 13만여명의 르완다인이 투옥되었지만 재판에 회부되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이러한 참극이, 도대체 왜 발생한 것일까.
표면상으로는 분명, 확실한 부족간의 갈등에서 비롯

키워드

  • 가격3,000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11.08.25
  • 저작시기2011.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9724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