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적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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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문

2.오다 노부나가의 카리스마(威)형 리더십

3.도요토미 히데요시 전략가(戰略家)형 리더십

4.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내(忍)형 리더십

5.결론

본문내용

풀었다. 그러고는 즉각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병력을 회군시켰다. 이를 두고 \'질풍신뢰(疾風迅雷)의 대철수\'라고 불렀다. 1577년 10월부터 주고쿠 지방에서 전투에 이골이 난 그의 군단만이 할 수 있는 이동이었다. 무기는 말에 실은 마바리로 보내거나 현지 조달했다. 이에 기동력이 개선되면서 보통의 군단보다 이동 속도가 2~3배 빨라졌는데, 이것이야말로 미츠히데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신속하게 이동해야 할 때는 사무라이들에게 갑옷을 입히지 않고 반라의 옷차림으로 전장으로 말을 몰게 했다. 갑옷은 \'가부토기\'로 불리는 강건한 체구의 하급 무사들에게 대신 입혀서 뒤를 따르도록 했다. 이들은 평소에는 밥을 먹이며 놀고 지내도록 내버려두지만, 여차하면 \'가부토기\'로서 역할을 다하게 했다. 입는 것이 들고 가는 것보다 편리했다. 전선에 도착하면 주인이 와서 자신의 갑옷을 찾아가 무장한다. 그렇게 하면 체력을 충분히 비축해두었다가 전투에 임할 수 있다. 전선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주먹밥(おにぎり)와 물, 짚신 등이 마련되었고, 낙오자를 수용하는 오두막도 세워졌다. 밤이면 화톳불이 낮처럼 주위를 밝혔다. 6월 6일 다카마츠에서 철수하여 몇밤을 꼬박 새워 초스피드의 강행군을 거듭하며 히메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지친 장병들을 위해 히메지에 비축해두었던 금은보화, 양곡을 모조리 풀어 나누어 주었고, 농민들에게도 금은을 뿌려 행군 중의 안전과 물자 보급을 확보했다. 다른 무장이라면 눈곱만큼 나눠줄 금이나 곡물을, 히데요시는 부하와 일반인이 놀랄 정도로 듬뿍 주었다. 이렇게 하면 승리를 거둔 다음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상이 돌아올 것인가를 지레 짐작하며 용기백배한다는 심리를 노린 히데요시의 인재 활용술이었다. 히데요시가 머나먼 전선에서 무사히 철수하여 히메지에 도착한 사실을 알게 된 여러 세력들이 히데요시 측에 합류했다. 그들에게도 노부나가의 생존설을 퍼뜨린 것이 효과가 있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는 진상을 알아내기 어렵기 때문에 위보(僞報)로나마 미츠히데에게 협력하는 것을 방지한 히데요시의 전략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같은해 6월, 모든 노부나가 하의 세력을 포섭한 히데요시는 고립무원의 미츠히데를 야마사키 전투에서 물리쳤다. 양쪽의 승부는 이미 판가름나 있었다. 미츠히데에게는 싸울 무장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로써 이른바 \'미츠히데의 삼일천하\'는 막을 내렸다. 야마사키 전투를 기점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 히데요시의 서열이 비약적으로 올라섰다. 츠모토 요, 조양욱 역,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략적 인간, 경영정신, 초판, 2006,pp59-62
-7),8)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리전의 명수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8-
-내세까지 명분으로 삼아 권력 기반을 다지다: 천황의 취락제(간파쿠의 관저, 간파쿠는 히데요시가 천황을 옹립한 후 올랐던 벼슬, 모든 내정과 군통수권을 가진다) 행차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해 7월, 히데요시는 모든 다이묘들에게 도수령과 해적 금지령을 내렸다. 도수령은 농민이 칼이나 창, 철포 등 무기 소지를 금지하여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내려졌다. 농민의 전투력을 없애버리면 다이묘 이하의 소작지가 확보되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도수령을 다이묘들에게 지시했고, 농민들에게는 무기 반납을 구실도 대불(大佛) 건립 계획을 공표했다. 몰수한 무기는 버리지 않고 대불 건립에 쓸 못이나 걸쇠를 만드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농민들은 현세뿐 아니라 내세의 공덕을 닦는 셈이 된다.
교토의 사원 호코지 대불은 나라의 도다이지 대불보다 약 3배가 높은 16장(약 48m)의 비로자나 부처로 할 예정이었다. 대불이 완성되면 그것을 안치할 대불전과 호코지는 전대미문의 거대한 규모가 되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아내인 네네에게 속셈을 털어놓았다. 「난 말이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다이묘들을 움직여 도수령을 실시했고, 그것을 녹여 대불을 건립하는 데 다이묘들이 힘을 쏟도록 했다네. 다시 말해 요순 시대의 요 임금 고사를 빌려 국토안전, 천하진무, 만민쾌락을 추구하는 거야. 우선 다이묘를 위해 농민의 힘을 약화시키면 저절로 다이묘 세력도 약화된단 말씀이야.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겠는가?」
「전하께서 마음먹는 대로 매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그 덕택에 도요토미 가문은 평안하겠지요.」라고 네네가 대답했다. 히데요시의 아내는 천하통일을 이룬 것에 만족했다.
한편 도수령과 같은 날짜에 내려진 해적 금지령의 3개조는 다음과 같다.
1.해적 행위를 이전부터 금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토나이카이의 이츠키시마에서 도적질하는 배가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었으므로 금지령을 발령한다.
2.\'각 지역 항구의 배 주인과 어부 등 배와 관련이 있는 자\'를 영주가 불러모아 해적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하고, 그것을 다이묘가 모아 제출하도록 한다.
3.앞으로 해적이 나타날 때는 영주가 방심한 것으로 판단하여 그 책임을 물어 봉록을 몰수한다.
해적 금지령에 의해 모은 연판장에는 각 지역의 해상 생활자에 관한 사항이 망라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은 그들을 완전히 장악한 셈이었고, 히데요시는 세토나이카이로부터 규슈에 이르는 해상 교통로를 완전 제패하기에 이르렀다. 해적 금지령은 도요토미 정권의 무역 독점 기반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의 해운권 장악을 실현시켰다. 도수령과 해적 금지령은 히데요시의 기반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히데요시가 조정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미츠히데 토벌의 공적을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간파쿠 자리를 놓고 벌어진 다툼에서 교묘한 심리전으로 간파쿠가 되었고, 그 격식과 권한으로 모든 다이묘들을 복종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출신까지 엉터리로 조작하고, 도요토미 씨(氏)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성씨를 다이묘들에게 하사하여 동족간의 연대감을 지니게 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확립과 낡은 귀족 문벌의 타파를 꾀했던 것이다. 이러한 특유의 정권 확립에 의해 히데요시는 무가뿐 아니라 귀족이나 모든 권력자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힘(전국시대는 하극상의 시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세를 명분으로 그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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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8.25
  • 저작시기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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