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족과 모용부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선비족과 모용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머릿말
Ⅱ.선비족의 기원
Ⅲ.모용부(慕容部)가 세운 국가
Ⅳ.맺음말

본문내용

소국으로 분립 상태가 재현되어, 관중지방에서는 요씨(姚氏)가 후진국(後秦國)을 세우고 관동지방에서는 모용부가 앞뒤로 후연·서연·남연의 여러 왕국을 세웠다. 이 세 연 왕국들의 창건자 모용수(慕容垂,후연), 모용홍(慕容泓,서연), 모용덕(慕容德,남연)은 전연의 모용외·모용황의 직계자손이다. 지친(至親)사이에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분립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이런 대립관계는 각 나라 사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 안의 모용부안에서도 상호 반목과 상잔을 편치고 있었던 것이 공통의 특징이다. 후연의 모용수는 전연의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로서 황을 이은 준(儁)대에 봉왕(封王)이 되었으나 권신 모용평에 밀려 전진 부견에게 망명하였다. 이후 부견이 남벌하여 비수(肥水)에서 동진에게 대패하였을 때(383) 모용부를 주력으로 하는 선비족 군단을 거느리고 참전하였던 모용수는 부상한 부견을 지켜 그를 낙양으로 철수할 수 있게 하였다. 도중 부견의 허가를 받아 옛 도읍지인 업을 찾았을 때, 때마침 업도에 반란이 일어나자 모용수는 이 틈을 타서 하북 각지의 호족 세력을 결합해서 형인 모용준이 즉위하였던 곳인 중산에서 즉위하여 연국을 재흥하였다(384). 사가는 이를 후연국이라고 한다. 모용수는 문무에 뛰어난 인물로 건국하자 법제를 정리하고 질서를 회복하며 백성들에게 부역을 감면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하북 산동에 일시 평화가 다시 깃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후연국은 회수(淮水) 이북의 하북·산동·하남 북부 및 산서 남부를 영유하고 다시 그는 아들 농(農)으로 하여금 옛 도읍지인 용성을 거점으로 하여 요하(遼河)의 동서지구(요서·요동)를 경략케 하여 그 위세가 미치는 곳은 전연시대보다 더 넓었다. 모용수가 재위 13년에 죽자(396), 세자인 모용보(慕容寶)가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그 아버지와 같은 역량도 없고 통솔의 재간도 없는 데다 그위에 시운도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인접하고 있는 산서 북부의 대국(代國)에서 같은 선비계인 탁발부의 탁발규(북위 태조 도무제)가 나타나서 그 욱일승천의 기세는 감히 당할 수 없을 만큼 등등하였다. 이미 모용수는 그 만년에 여러 곳에서 탁발부에게 패전을 거듭하였고, 모용보는 동남쪽의 거록에서 대패하여 내홍(內訌)이 일어나 국도인 중산을 포기하고 북으로 달아나서 고도인 요서의 용성(龍城)에 피난하였으나 여기에서 살해되고 서장자(庶長子)인 성(盛)이 반도들을 진압하여 자리를 이어받아 국세 만회에 힘
  • 가격2,0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1.10.13
  • 저작시기2011.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0797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