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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우마이야조(661~750)
1) 우마이야 왕조의 역사와 사회
(1) 우마이야 왕조 개관
(2) 우마이야 왕조의 역사
(3) 우마이야 왕조의 사회
2) 우마이야 왕조의 문화
(1) 건축
(2) 서예
(3) 회화
(4) 장식 예술
(5) 음악
(6) 문학
3) 이베리아 반도의 우마위야 왕조
Ⅲ. 압바스 조(750-945)
1) 압바스 왕조 개관
(1) 압바스 왕조 전반
(2) 압바스 왕조의 통치 제도
(3) 압바스 왕조의 사회
2) 압바스조 전기(750∼945)
/후기(945∼1258)
(1) 압바스조 전기(750∼945)
(2) 압바스조 후기(945∼1258)
3) 압바스 왕조의 문화
(1) 개관 및 특징
(2) 압바스조 정치 사상
(3) 문학
(4) 과학
(5) 천문학과 수학
(6) 광학과 연금술
(7) 의학
(8) 건축
(9) 도예 및 공예
Ⅳ. 결론
Ⅱ. 우마이야조(661~750)
1) 우마이야 왕조의 역사와 사회
(1) 우마이야 왕조 개관
(2) 우마이야 왕조의 역사
(3) 우마이야 왕조의 사회
2) 우마이야 왕조의 문화
(1) 건축
(2) 서예
(3) 회화
(4) 장식 예술
(5) 음악
(6) 문학
3) 이베리아 반도의 우마위야 왕조
Ⅲ. 압바스 조(750-945)
1) 압바스 왕조 개관
(1) 압바스 왕조 전반
(2) 압바스 왕조의 통치 제도
(3) 압바스 왕조의 사회
2) 압바스조 전기(750∼945)
/후기(945∼1258)
(1) 압바스조 전기(750∼945)
(2) 압바스조 후기(945∼1258)
3) 압바스 왕조의 문화
(1) 개관 및 특징
(2) 압바스조 정치 사상
(3) 문학
(4) 과학
(5) 천문학과 수학
(6) 광학과 연금술
(7) 의학
(8) 건축
(9) 도예 및 공예
Ⅳ. 결론
본문내용
자였다. 또, 아랍계통이지만 기독교도나 유대교도였기 때문에 이슬람에 늦게 개종해서 아랍 지배계급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도 이 개념에 포함되었다.
이 개념에는 딤미(Dhimmi)로 알려진 비무슬림은 포함되지 않았다. 비무슬림은 고율의 인두세(Jiztya)와 토지세(Khar j)를 납부해야 했다. 본래 이 딤미는 \'성서의 추종자\'인 아흘 알 키탑(Ahl al-Kit b)과 동일한 개념이었다. 성서의 추종자는 본래 기독교와 유대교도 등이 있고, 이들은 이슬람법에 따라 고율의 인두세를 몰고, 무슬림의 집단행사에 방해만 하지 않으면 보호받을 수 있게 하였다(쿠란 9장 29절). 또 성서의 추종자로 간주되지 않는 배화교도(Zoroaster)들인 이란인에게도 관용을 보여 편의상 딤미 개념에 포함시켰다.
마왈리는 아랍인의 암사르 근처에 몰려와 외곽 도시를 이루어 상류층인 아랍인의 필요에 따라 날품팔이, 상인, 가구 수리 및 세공인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같은 이슬람 교도로서 그들은 이론상으로는 아랍인과 동등했으므로 경제거,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였다. 이 평등권은 우마이야조 아래서는 달성되지 않았다. 일부 마왈리 출신 토지 소유자는 이슬람 국가에 바친 공헌 때문에 무슬림으로서의 세율만 지불하였으나, 대부분은 딤미와 같은 세율을 납부하였다.
압둘 말리크의 통치 때까지 이슬람 정부는 실지로 비아랍인이 이슬람에 개종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말리는 편이었다. 또, 국가의 세입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를 회복하기 위해 마왈리들을 도시에서 쫓아내어 그들의 옛 농토로 돌려보내려고 애썼다. 마왈리는 무슬림군에 편성되어 아랍사람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후라산(Khur s n)과 아프리카 서북부와 같은 제국의 변경 지방에서 영역의 확장을 도모하는데 필요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주로 步兵으로서 싸웠으며, 대우는 騎兵으로 복무하는 아랍인에 비하여 훨씬 떨어졌다. 마왈리들이 품고 있는 열등감과 불만은 당시의 아랍문헌 속에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아랍 여인과 마왈리의 결혼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파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왈리의 수는 급속히 증가하여 아랍인의 수를 능가하였다. 그들은 주로 암사르의 외곽지대에 대규모로 정착하였고 아랍인과의 접촉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자기들의 정치적 중요성, 문화적인 우월성 및 군사적 분야에의 참여도를 인식하게 되어 위험스러운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의 주된 불만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우마이야 국가의 구조는 소수의 아랍인이 세금을 내는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한다는 전제 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마왈리에게 同等權을 부여하는 것은 곧 세입의 감소와 동시에 세출의 증가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곧 국가구조 전체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비록 마왈리와 아랍인의 구분이 아랍과 비아랍인이란 인종적 구분과 일치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사회적인 대립이지 결코 민족적인 대립은 아니었다. 디완(Diw n, 인명부, 즉 연금 대상자)에 기재되어 있지 않는 이라크와 바레인의 아랍 하류층도 본이 아니게 마왈리 신분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도 마찬가지였다.
④ 시아 운동
마왈리들의 불만은 시아(Shi\'a), 또는 알리의 당(Shi\'at \'Ali)으로 알려진 종교운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나타났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후손들이 칼리프임을 주장함에 따라 그들 주위에 몰려든 지지자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최초에는 순전히 아랍인이 일으킨 운동이었으며, 또 정치적인 활동이었다. 칼리프 알리가 수도를 메디나에서 이라크의 쿠파로 옮겼으나, 뒤에 우마이야조가 다시 시리아로 이동했기 때문에 시아파는 이라크 남부의 愛鄕主義者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후세인이 카르발라에 학살되자 시아파는 아랍인만의 파당으로서는 정권장악이 불가능함을 인식하여 이슬람의 宗派로서의 지위를 다지게 되었다.
시아파의 선전요원은 일반 대중, 특히 마왈리의 불만을 불러 일으키는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또, 세습제의 관습에 젖은 비아랍계의 무슬람에게는 예언자의 후손이 정당한 후계자, 즉 칼리프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세습제에 익숙하지 못한 아랍인에게보다 그 호소력이 훨씬 더 컸다. 시아 이슬람은 본질적으로 국가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즉, 국가와 기존 질서에 영합하는 것은 이슬람교의 주류파, 즉 순니(Sunni, 전통주의자)에 자동적으로 속하게 되었다.
반대파는 비아랍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불안한 兵營도시이며 혁명적 시아파의 발생지 쿠파에서는 아랍인들이 시초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아 교리를 이란에 처음 가져온 사람은 쿠파의 아랍인이었다. 그 곳의 병영도시인 콤市(Qumm市)는 본래 쿠파市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시아파의 근거지가 된 것이다.
시아파가 이끄는 저항운동은 곧 아랍인에 대한 민족적 반항이라기보다 오히려 교리상의 論点과 그에 따른 국가관을 지닌 추종자의 아랍 상류층에 대한 사회적인 반항이었다. 우마이야조의 지지세력도 오직 아랍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이란의 봉건귀족들 가운데 약간은 이슬람에 개종하여 정복자와 협력한 댓가로 경제적, 사회적 특권과 위신을 그대로 누리고 있었다. 더우기, 그들의 정치적 권력이 일시적으로 쇠퇴한 데 대해서는 체념하였으므로 비교적 아랍국가에 협조적이었다. 그들은 개종할 때에도 배화교에서 정통 이슬람을 택하였다.
그러나, 이슬람화된 이란의 일반 서민, 특히 농민들은 아직도 똑같은 상대인 옛 지주와 맞서고 있었으므로, 배화교 대신에 이슬람의 재야세력인 시아주의를 택하였다. 그들의 반대는 아랍인이거나 이란인이거나 관계없이 지배층인 귀족에게 향한 것이었다.
비아랍계인 마왈리는 시아 교리가 더욱 적극적이고, 또 단호한 면을 가졌기 때문에 이에 끌렸다. 그들은 이 시아 교리에 그들의 옛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및 배화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여러 관념을 첨가하였다. 이 관념 중에 하나는 마흐디(Mahdi, 올바르게 인도된 사람) 사상이다. 이 마흐디 사상은 순수한 정치적 지도자像에서 시작되었으나, 구세주적인 종교 지도자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 독특한 현상이 처으
이 개념에는 딤미(Dhimmi)로 알려진 비무슬림은 포함되지 않았다. 비무슬림은 고율의 인두세(Jiztya)와 토지세(Khar j)를 납부해야 했다. 본래 이 딤미는 \'성서의 추종자\'인 아흘 알 키탑(Ahl al-Kit b)과 동일한 개념이었다. 성서의 추종자는 본래 기독교와 유대교도 등이 있고, 이들은 이슬람법에 따라 고율의 인두세를 몰고, 무슬림의 집단행사에 방해만 하지 않으면 보호받을 수 있게 하였다(쿠란 9장 29절). 또 성서의 추종자로 간주되지 않는 배화교도(Zoroaster)들인 이란인에게도 관용을 보여 편의상 딤미 개념에 포함시켰다.
마왈리는 아랍인의 암사르 근처에 몰려와 외곽 도시를 이루어 상류층인 아랍인의 필요에 따라 날품팔이, 상인, 가구 수리 및 세공인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같은 이슬람 교도로서 그들은 이론상으로는 아랍인과 동등했으므로 경제거,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였다. 이 평등권은 우마이야조 아래서는 달성되지 않았다. 일부 마왈리 출신 토지 소유자는 이슬람 국가에 바친 공헌 때문에 무슬림으로서의 세율만 지불하였으나, 대부분은 딤미와 같은 세율을 납부하였다.
압둘 말리크의 통치 때까지 이슬람 정부는 실지로 비아랍인이 이슬람에 개종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말리는 편이었다. 또, 국가의 세입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를 회복하기 위해 마왈리들을 도시에서 쫓아내어 그들의 옛 농토로 돌려보내려고 애썼다. 마왈리는 무슬림군에 편성되어 아랍사람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후라산(Khur s n)과 아프리카 서북부와 같은 제국의 변경 지방에서 영역의 확장을 도모하는데 필요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주로 步兵으로서 싸웠으며, 대우는 騎兵으로 복무하는 아랍인에 비하여 훨씬 떨어졌다. 마왈리들이 품고 있는 열등감과 불만은 당시의 아랍문헌 속에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아랍 여인과 마왈리의 결혼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파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왈리의 수는 급속히 증가하여 아랍인의 수를 능가하였다. 그들은 주로 암사르의 외곽지대에 대규모로 정착하였고 아랍인과의 접촉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자기들의 정치적 중요성, 문화적인 우월성 및 군사적 분야에의 참여도를 인식하게 되어 위험스러운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의 주된 불만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우마이야 국가의 구조는 소수의 아랍인이 세금을 내는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한다는 전제 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마왈리에게 同等權을 부여하는 것은 곧 세입의 감소와 동시에 세출의 증가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곧 국가구조 전체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비록 마왈리와 아랍인의 구분이 아랍과 비아랍인이란 인종적 구분과 일치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사회적인 대립이지 결코 민족적인 대립은 아니었다. 디완(Diw n, 인명부, 즉 연금 대상자)에 기재되어 있지 않는 이라크와 바레인의 아랍 하류층도 본이 아니게 마왈리 신분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도 마찬가지였다.
④ 시아 운동
마왈리들의 불만은 시아(Shi\'a), 또는 알리의 당(Shi\'at \'Ali)으로 알려진 종교운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나타났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후손들이 칼리프임을 주장함에 따라 그들 주위에 몰려든 지지자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최초에는 순전히 아랍인이 일으킨 운동이었으며, 또 정치적인 활동이었다. 칼리프 알리가 수도를 메디나에서 이라크의 쿠파로 옮겼으나, 뒤에 우마이야조가 다시 시리아로 이동했기 때문에 시아파는 이라크 남부의 愛鄕主義者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후세인이 카르발라에 학살되자 시아파는 아랍인만의 파당으로서는 정권장악이 불가능함을 인식하여 이슬람의 宗派로서의 지위를 다지게 되었다.
시아파의 선전요원은 일반 대중, 특히 마왈리의 불만을 불러 일으키는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또, 세습제의 관습에 젖은 비아랍계의 무슬람에게는 예언자의 후손이 정당한 후계자, 즉 칼리프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세습제에 익숙하지 못한 아랍인에게보다 그 호소력이 훨씬 더 컸다. 시아 이슬람은 본질적으로 국가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즉, 국가와 기존 질서에 영합하는 것은 이슬람교의 주류파, 즉 순니(Sunni, 전통주의자)에 자동적으로 속하게 되었다.
반대파는 비아랍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불안한 兵營도시이며 혁명적 시아파의 발생지 쿠파에서는 아랍인들이 시초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아 교리를 이란에 처음 가져온 사람은 쿠파의 아랍인이었다. 그 곳의 병영도시인 콤市(Qumm市)는 본래 쿠파市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시아파의 근거지가 된 것이다.
시아파가 이끄는 저항운동은 곧 아랍인에 대한 민족적 반항이라기보다 오히려 교리상의 論点과 그에 따른 국가관을 지닌 추종자의 아랍 상류층에 대한 사회적인 반항이었다. 우마이야조의 지지세력도 오직 아랍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이란의 봉건귀족들 가운데 약간은 이슬람에 개종하여 정복자와 협력한 댓가로 경제적, 사회적 특권과 위신을 그대로 누리고 있었다. 더우기, 그들의 정치적 권력이 일시적으로 쇠퇴한 데 대해서는 체념하였으므로 비교적 아랍국가에 협조적이었다. 그들은 개종할 때에도 배화교에서 정통 이슬람을 택하였다.
그러나, 이슬람화된 이란의 일반 서민, 특히 농민들은 아직도 똑같은 상대인 옛 지주와 맞서고 있었으므로, 배화교 대신에 이슬람의 재야세력인 시아주의를 택하였다. 그들의 반대는 아랍인이거나 이란인이거나 관계없이 지배층인 귀족에게 향한 것이었다.
비아랍계인 마왈리는 시아 교리가 더욱 적극적이고, 또 단호한 면을 가졌기 때문에 이에 끌렸다. 그들은 이 시아 교리에 그들의 옛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및 배화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여러 관념을 첨가하였다. 이 관념 중에 하나는 마흐디(Mahdi, 올바르게 인도된 사람) 사상이다. 이 마흐디 사상은 순수한 정치적 지도자像에서 시작되었으나, 구세주적인 종교 지도자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 독특한 현상이 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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