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 1 부 웨스트팔리아로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제 2 부 프랑스 혁명에서 1870년까지
제 3 부 1870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제 4 부 제1차 세계대전에서 20세기 중엽까지
제 2 부 프랑스 혁명에서 1870년까지
제 3 부 1870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제 4 부 제1차 세계대전에서 20세기 중엽까지
본문내용
다. 그러나 \'파스켄디\'회칙으로 인해 \'현대주의\'이단을 정식으로 정의하고 정죄하였습니다, 파이우스 교황은 1910년 \'현대주의\'잔재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반현대주의 서약을 강행하였습니다. 이 서약의 내용은 \'파스켄티\'회칙들에 들어있는 정죄조항들을 전면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과 교사들은 이 서약을 하든지 아니면 그 직책을 박탈당했습니다.
제24장 프로테스탄트 선교, 1796~1914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프로테스탄트는 주로 북서 유럽 주민들의 종교로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와이즈만 추기경은 프로테스탄트가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당시 영어사용 복음주의자들에 의한 선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확장은 제1차 세계대전시까지 모든 기독교 선교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까지는 영국이 이러한 노력의 선봉에 서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채 십 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이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 20세기에 들어와 진정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에큐메니칼한 세계적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복음주의 선교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케리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1792년에는 한 영국 침례교도 협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795년에는 런던 선교협회가 형성되었는데, 런던 선교협회의 열성들은 대륙의 새로운 발전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세기의 처음 두 세대들은 기초를 쌓은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 기지가 정착되었고, 현지 언어를 익혔으며, 성경을 번역하고, 현지 당국과의 접촉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지막 제3분기에 들어서서 상당한 결과를 목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숫자가 상당히 증가하고, 자금들도 넉넉해졌으며, 선교협회들의 숫자가 증가함과 정치적 변화로 말미암아 복음전파의 기회가 보다 많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세계 전역에서 프로테스탄트주의는 사회개혁, 교육, 의료, 기타 분야에서 로마 가톨릭보다 더 많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변화 상태에 있었던 문화들에도 공헌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주의 역시 시대의 제한성을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양한 프로테스탄트의 선교 사역을 종합하고 조정해야 할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들을 보내는 국가들이나 이들을 받아들이는 국가들에서는 일련의 회의들을 개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회의들은 1910년의 에든버러 총회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는데, 바로 이 회의에서 선교사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재25장 로마 가톨릭의 선교, 1814~1914
복고시대에 로마 가톨릭 선교의 부흥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프로테스탄트 측보다는 약간 떨어지는 한 세대 이후의 사건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아일랜드의 이민들이 상당수 영국, 미합중국, 캐나다 등지로 이주하여 이 국가들에서 놀랄 만한 로마 가톨릭 세력의 신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후 로마 가톨릭주의는 선교 대상 지역에서의 종교적 원숙성을 보다 더 강조하였습니다. 칼을 들이대고 집단적 개종을 강요하는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개종자들은 개인별 혹은 가족별로 들어왔으며, 이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로마 가톨릭주의의 의미에 관하여 무언가를 알도록 기대되었습니다.
16, 17, 18세기들을 통해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둔 지역은 라틴 아메리카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19세기의 확장기에 가장 성공적이지 못했던 지역이 바로 라틴 아메리카였으며, 실질적으로 신자의 수효 감소까지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곳이 피정복지였다는 데 있었던 같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기독교도 인디언들을, 비록 너그럽게 대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역시 농노로 취급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은 탐욕적이고 호색적이며 고루하였고 평신도들은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였고 미신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갈등들이 더 노골적이 되었습니다.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었는데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교회는 대지주들과 결탁하여, 토지개혁을 반대하고, 십일조를 폐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방해하였습니다. 빈곤한 인디언들의 경제적, 교육적 생활을 개선하고자 하는 운동들은 교회당국에 의하여 반대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가 1915년까지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야 이곳의 로마 가톨릭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교육적, 복음적, 사회적 사역을 시행하였는데,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대한 경쟁 때문이었습니다.
제26장 19세기의 동방정교
19세기 이전까지의 정교의 역사는 러시아인들이 가장 우위를 점하였습니다. 소아시아 지방과 이집트에 있는 이들의 숫자는 보잘것없었습니다.
러시아 정교를 보다 면밀하게 분석하고자 할 때 우리들은 두 가지 해석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러시아 교회는 기독교권 내의 중요한 교단들 가운데 가장 지적으로 후진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주로 그림이나 조각 등 시각적인 형상을 통해 이들에게 접근하고 계몽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교적인 회화들과 건축물들, 장엄한 합창음악 그리고 화려한 예배의식들이 마련되었습니다. 러시아 교회는 일상생활의 예식, 가족 단위와 집단 단위의 장려한 전통적 예식을 강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학적 관심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흔히 유대교와 비교되었습니다. 러시아 내 기독교 지성인들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19세기에 들어서까지도 이곳 본토의 신학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러시아 기독교가 침묵을 지켰던 두 번째 이유는 전체 교회 구조는 로마노프 왕조라는 병거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스스로의 의사를 발표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지지 못했으며, 자치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나긴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사상에 대항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게 되었습니다. 이 세대에 나타난 정교 신학의 중흥은 그 후 특히
제24장 프로테스탄트 선교, 1796~1914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프로테스탄트는 주로 북서 유럽 주민들의 종교로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와이즈만 추기경은 프로테스탄트가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당시 영어사용 복음주의자들에 의한 선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확장은 제1차 세계대전시까지 모든 기독교 선교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까지는 영국이 이러한 노력의 선봉에 서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채 십 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이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 20세기에 들어와 진정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에큐메니칼한 세계적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복음주의 선교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케리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1792년에는 한 영국 침례교도 협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795년에는 런던 선교협회가 형성되었는데, 런던 선교협회의 열성들은 대륙의 새로운 발전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세기의 처음 두 세대들은 기초를 쌓은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 기지가 정착되었고, 현지 언어를 익혔으며, 성경을 번역하고, 현지 당국과의 접촉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지막 제3분기에 들어서서 상당한 결과를 목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숫자가 상당히 증가하고, 자금들도 넉넉해졌으며, 선교협회들의 숫자가 증가함과 정치적 변화로 말미암아 복음전파의 기회가 보다 많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세계 전역에서 프로테스탄트주의는 사회개혁, 교육, 의료, 기타 분야에서 로마 가톨릭보다 더 많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변화 상태에 있었던 문화들에도 공헌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주의 역시 시대의 제한성을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양한 프로테스탄트의 선교 사역을 종합하고 조정해야 할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들을 보내는 국가들이나 이들을 받아들이는 국가들에서는 일련의 회의들을 개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회의들은 1910년의 에든버러 총회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는데, 바로 이 회의에서 선교사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재25장 로마 가톨릭의 선교, 1814~1914
복고시대에 로마 가톨릭 선교의 부흥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프로테스탄트 측보다는 약간 떨어지는 한 세대 이후의 사건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아일랜드의 이민들이 상당수 영국, 미합중국, 캐나다 등지로 이주하여 이 국가들에서 놀랄 만한 로마 가톨릭 세력의 신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후 로마 가톨릭주의는 선교 대상 지역에서의 종교적 원숙성을 보다 더 강조하였습니다. 칼을 들이대고 집단적 개종을 강요하는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개종자들은 개인별 혹은 가족별로 들어왔으며, 이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로마 가톨릭주의의 의미에 관하여 무언가를 알도록 기대되었습니다.
16, 17, 18세기들을 통해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둔 지역은 라틴 아메리카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19세기의 확장기에 가장 성공적이지 못했던 지역이 바로 라틴 아메리카였으며, 실질적으로 신자의 수효 감소까지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곳이 피정복지였다는 데 있었던 같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기독교도 인디언들을, 비록 너그럽게 대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역시 농노로 취급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은 탐욕적이고 호색적이며 고루하였고 평신도들은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였고 미신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갈등들이 더 노골적이 되었습니다.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었는데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교회는 대지주들과 결탁하여, 토지개혁을 반대하고, 십일조를 폐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방해하였습니다. 빈곤한 인디언들의 경제적, 교육적 생활을 개선하고자 하는 운동들은 교회당국에 의하여 반대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가 1915년까지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야 이곳의 로마 가톨릭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교육적, 복음적, 사회적 사역을 시행하였는데,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대한 경쟁 때문이었습니다.
제26장 19세기의 동방정교
19세기 이전까지의 정교의 역사는 러시아인들이 가장 우위를 점하였습니다. 소아시아 지방과 이집트에 있는 이들의 숫자는 보잘것없었습니다.
러시아 정교를 보다 면밀하게 분석하고자 할 때 우리들은 두 가지 해석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러시아 교회는 기독교권 내의 중요한 교단들 가운데 가장 지적으로 후진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주로 그림이나 조각 등 시각적인 형상을 통해 이들에게 접근하고 계몽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교적인 회화들과 건축물들, 장엄한 합창음악 그리고 화려한 예배의식들이 마련되었습니다. 러시아 교회는 일상생활의 예식, 가족 단위와 집단 단위의 장려한 전통적 예식을 강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학적 관심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흔히 유대교와 비교되었습니다. 러시아 내 기독교 지성인들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19세기에 들어서까지도 이곳 본토의 신학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러시아 기독교가 침묵을 지켰던 두 번째 이유는 전체 교회 구조는 로마노프 왕조라는 병거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스스로의 의사를 발표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지지 못했으며, 자치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나긴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사상에 대항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게 되었습니다. 이 세대에 나타난 정교 신학의 중흥은 그 후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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