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한국 전쟁의 배경
2. 한국전쟁의 의의
3. 한국전쟁의 개관
4. 결 론
2. 한국전쟁의 의의
3. 한국전쟁의 개관
4. 결 론
본문내용
새로운 힘의 변형을 유도할 목적으로 전쟁수행을 위한 군사적 원조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소련이 한반도 정책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던 것은 일본과 중국에서의 상황 변화였다. 그러나 이런 소련의 요구는 미국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러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안정성에 스탈린은 한반도, 특히 북한지역에 사회주의 정권을 설치할 준비를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북한정권이 1948년에 수립되었다. 이러 스탈린은 김일성의 무력 통일론을 지지하고 중국의 모택동과 함께 북한이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제반 물적, 인적자원을 지원하였다. 한국 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을 3시기로 알아보았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으로 휴전협정의 성사로 전쟁은 끝이 났다. 이렇게 소련은 전쟁준비단계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시점까지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5)한국전쟁의 성격과 결과
625전쟁 기간 중 한국 정부의 요청과 유엔헌장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지원부대가 한국을 지원하여 참전하였다. 반면 중공군과 소련 공군 및 당시 동구권 국가의 의료지원부대가 북한을 지원하였다. 따라서, 625전쟁은 내전으로 시작되어 20여개국의 전투부대가 격돌하는 국제전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같은 6 25전쟁의 결과와 성격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625전쟁은 분명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구조하에서 치러진 내전과 국제전의 양면성을 지녔으며, 무기 체계면에서는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재래식 전쟁이었고, 지역적으로는 한반도에 국한된 국지전이었다.
또한 내전 관점에서는 총력전이었고 국제전 관점에서는 제한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3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38도선이 휴전선으로 바뀌어 약간 변형된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둘째, 625전쟁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싸움이었다.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승리하였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싸웠으며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도 한국을 지원하였다. 결과적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은 공산주의 침략을 격퇴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셋째, 625전쟁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국가와 민족의 파괴와 시련의 과정이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약 50여만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공산군의 사상자는 150~200만명에 이르었다. 전쟁기간 중 남한에서만도 약 250만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발생하였고,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공산주의 치하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죽음을 무릅쓴 탈출을 하여 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마지막으로, 625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그 상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 쌍방은 정전회담에서일단 교전행위를 중단하는 휴전을 하고 3개월 이내에 정치회담을 개최하여 휴전체제를 평화 제체로 전환하기로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그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4. 결 론
전쟁은 파괴이다. 전쟁은 고귀한 인명과 재산을 파괴한다. 전쟁은 기존 질서와 가치 또한 파괴한다. 한국 전쟁은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질서를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지주 계급 대신 신흥 자본주의를 이 땅에 대두시켰으며 전쟁은 국토와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온 국민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이 고통 속에 고난을 타개하려는 굳센 의지가 불타올랐으며 허리띠를 졸라맨 온 국민의 노력은 세계가 놀라는 한강변의 기적을 낳았다. 전 세계에서 같은 기간 중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대한민국이 기록 한 것도 전쟁을 치룬 민족이 낳은 굳센 재건의 의지, 그것이 아니었던가! 전쟁은 또한 어떤 일이 있어도 국가의 안전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철저한 안보의식을 국민의 뇌리에 깊이 심어 주었다. 따라서, 국토방위는 한국인에게는 성스러운 영역으로서 그 누구도, 그 어떤 나라도 안보 의식에서 한국인을 능가할 나라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계는 엄청나게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체가 지닌 모순으로 스스로 멸망하리라고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본주의는 놀라운 자기 치유 능력으로 기술 개혁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한편 인류에게 빵과 행복을 약속했던 공산주의는 지나친 관료주의와 인위적 통제 경제의 비능률성 등의 자체 모순으로 삐꺽이기, 시작하더니 소련의 개혁과 개방정책과 더불어 공산 세계는 순식간에 허물어 졌다. 이제 역사는 인류에게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이념 시대는 끝났다고! 분단의 시대도 끝났다고! 그러나 국제 정세의 흐름이 어떻든 이 땅의 허리에는 휴전선의 철조망이 엄연히 자리잡고 있으며 그 분단의 장벽이 언제 허물릴지 그 누구도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 전쟁의 악몽은 아직도 이렇게 우리 민족의 어깨에 멍에처럼 지워져 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개혁과 개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수십 년을 외쳐 온 남조선 해방, 수십년 북한 주민을 세뇌시켜 온 김일성에 대한 숭배, 세계 공산국가 유일 의 김일성-김정일의 권력 세습, 북한전역을 병영화, 요새화 하여 온 주민의 눈, 귀, 입을 막고 오직 당과 김정일에게의 충성만을 강요하여 온 북한 정권으로서는 개방이란 곧 공산주의의 종말이오. 정권의 종말을 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북한도 격변하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인가 변신의 노력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입니다. 언젠가 이룩해야만 할 통일 - 북한도 우리조국의 일부요 북한 주민도 우리 동포라면 우리는 가슴을 활짝 열고 달려가 그들을 뜨겁게 포옹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결코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그 결과인 휴전선이 엄연히 버티고 있는 오늘의 현실, 북한…그들은 분명 우리의 형제인 것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슬픈 운명적 형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리포트를 통해서 한반도의 운명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 한국전쟁에 대해서 처음으로 심각한 고찰을 하게 되어서 정말 뿌듯하고 주제선택에 후회가 없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교수님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또한 전쟁당시 어린나이에 전선에 뛰어든 수많은 학도병들과 장렬히 전사한 선조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
이러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안정성에 스탈린은 한반도, 특히 북한지역에 사회주의 정권을 설치할 준비를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북한정권이 1948년에 수립되었다. 이러 스탈린은 김일성의 무력 통일론을 지지하고 중국의 모택동과 함께 북한이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제반 물적, 인적자원을 지원하였다. 한국 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을 3시기로 알아보았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으로 휴전협정의 성사로 전쟁은 끝이 났다. 이렇게 소련은 전쟁준비단계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시점까지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5)한국전쟁의 성격과 결과
625전쟁 기간 중 한국 정부의 요청과 유엔헌장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지원부대가 한국을 지원하여 참전하였다. 반면 중공군과 소련 공군 및 당시 동구권 국가의 의료지원부대가 북한을 지원하였다. 따라서, 625전쟁은 내전으로 시작되어 20여개국의 전투부대가 격돌하는 국제전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같은 6 25전쟁의 결과와 성격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625전쟁은 분명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구조하에서 치러진 내전과 국제전의 양면성을 지녔으며, 무기 체계면에서는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재래식 전쟁이었고, 지역적으로는 한반도에 국한된 국지전이었다.
또한 내전 관점에서는 총력전이었고 국제전 관점에서는 제한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3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38도선이 휴전선으로 바뀌어 약간 변형된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둘째, 625전쟁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싸움이었다.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승리하였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싸웠으며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도 한국을 지원하였다. 결과적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은 공산주의 침략을 격퇴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셋째, 625전쟁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국가와 민족의 파괴와 시련의 과정이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약 50여만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공산군의 사상자는 150~200만명에 이르었다. 전쟁기간 중 남한에서만도 약 250만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발생하였고,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공산주의 치하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죽음을 무릅쓴 탈출을 하여 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마지막으로, 625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그 상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 쌍방은 정전회담에서일단 교전행위를 중단하는 휴전을 하고 3개월 이내에 정치회담을 개최하여 휴전체제를 평화 제체로 전환하기로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그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4. 결 론
전쟁은 파괴이다. 전쟁은 고귀한 인명과 재산을 파괴한다. 전쟁은 기존 질서와 가치 또한 파괴한다. 한국 전쟁은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질서를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지주 계급 대신 신흥 자본주의를 이 땅에 대두시켰으며 전쟁은 국토와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온 국민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이 고통 속에 고난을 타개하려는 굳센 의지가 불타올랐으며 허리띠를 졸라맨 온 국민의 노력은 세계가 놀라는 한강변의 기적을 낳았다. 전 세계에서 같은 기간 중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대한민국이 기록 한 것도 전쟁을 치룬 민족이 낳은 굳센 재건의 의지, 그것이 아니었던가! 전쟁은 또한 어떤 일이 있어도 국가의 안전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철저한 안보의식을 국민의 뇌리에 깊이 심어 주었다. 따라서, 국토방위는 한국인에게는 성스러운 영역으로서 그 누구도, 그 어떤 나라도 안보 의식에서 한국인을 능가할 나라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계는 엄청나게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체가 지닌 모순으로 스스로 멸망하리라고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본주의는 놀라운 자기 치유 능력으로 기술 개혁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한편 인류에게 빵과 행복을 약속했던 공산주의는 지나친 관료주의와 인위적 통제 경제의 비능률성 등의 자체 모순으로 삐꺽이기, 시작하더니 소련의 개혁과 개방정책과 더불어 공산 세계는 순식간에 허물어 졌다. 이제 역사는 인류에게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이념 시대는 끝났다고! 분단의 시대도 끝났다고! 그러나 국제 정세의 흐름이 어떻든 이 땅의 허리에는 휴전선의 철조망이 엄연히 자리잡고 있으며 그 분단의 장벽이 언제 허물릴지 그 누구도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 전쟁의 악몽은 아직도 이렇게 우리 민족의 어깨에 멍에처럼 지워져 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개혁과 개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수십 년을 외쳐 온 남조선 해방, 수십년 북한 주민을 세뇌시켜 온 김일성에 대한 숭배, 세계 공산국가 유일 의 김일성-김정일의 권력 세습, 북한전역을 병영화, 요새화 하여 온 주민의 눈, 귀, 입을 막고 오직 당과 김정일에게의 충성만을 강요하여 온 북한 정권으로서는 개방이란 곧 공산주의의 종말이오. 정권의 종말을 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북한도 격변하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인가 변신의 노력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입니다. 언젠가 이룩해야만 할 통일 - 북한도 우리조국의 일부요 북한 주민도 우리 동포라면 우리는 가슴을 활짝 열고 달려가 그들을 뜨겁게 포옹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결코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그 결과인 휴전선이 엄연히 버티고 있는 오늘의 현실, 북한…그들은 분명 우리의 형제인 것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슬픈 운명적 형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리포트를 통해서 한반도의 운명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 한국전쟁에 대해서 처음으로 심각한 고찰을 하게 되어서 정말 뿌듯하고 주제선택에 후회가 없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교수님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또한 전쟁당시 어린나이에 전선에 뛰어든 수많은 학도병들과 장렬히 전사한 선조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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