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며
1. 쿠바 초기 스페인의 점령과 원주민의 소멸
2. 10년 전쟁과 그 후
3. 쿠바혁명
4. 대표적 이민
(가) 쿠바 상황에 따른 이민
(나) 미국으로의 이민
(다) 멕시코로의 이민
(라) 이스라엘로의 이민
5. 미국과 쿠바의 관계 (법률중심)
6. 현재 상황
1. 쿠바 초기 스페인의 점령과 원주민의 소멸
2. 10년 전쟁과 그 후
3. 쿠바혁명
4. 대표적 이민
(가) 쿠바 상황에 따른 이민
(나) 미국으로의 이민
(다) 멕시코로의 이민
(라) 이스라엘로의 이민
5. 미국과 쿠바의 관계 (법률중심)
6. 현재 상황
본문내용
각 바티스타 정부에 무기 공급을 중단했다. 갑작스럽게 미국의 원조가 끊기자 바티스타는 1959년 1월 1일 황급히 쿠바를 탈출했다. 카스트로와 혁명전사들은 민중의 환호 속에 아바나에 입성했고, 쿠바대혁명은 영광스럽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59년부터 1993년까지 약 120만명의 쿠바인(현재 인구의 10%)이 미국을 향해 쿠바를 떠났다. 주로 이들은 작은 보트나 허술한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 1980년 4월 6일 일요일, 1만여명의 쿠바인들이 정치적 피난처를 찾아서 아바나 주재 페루 대사관에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4월 7일 월요일, 쿠바 정부는 페루 대사관으로 망명하려한 쿠바인들의 이주를 허락하였다. 4월 16일 5백명의 쿠바 시민들이 코스타 리카를 향해 페루 대사관을 출발하였다. 4월 21일, 많은 쿠바인들이 개인 보트를 타고 마이애미에 도착하기 시작하였으나 4월 23일 미국 주 정부는 이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보트 탈출 행렬은 계속되었다. 카스트로가 누구든지 나라를 떠나고 싶다면 마리엘 항을 통해서 그렇게 하라고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 이민 행렬은 \"마리엘 보트리프트\"(영어: Mariel boatlift)로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6월 15일 배의 행렬이 멈출 때까지 12만5천명의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4. 대표적 이민
(가) 쿠바 이민 상황
아메리카의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는 냉전 시대를 거치는 동안 미국과의 긴장된 관계를 유지해온 반면, 구소련과는 경제적,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불어 닥친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태풍은 쿠바 경제의 핵인 사탕수수와 담배 산업을 마비시켰으며, 이후 1989년 구소련의 경제 원조 삭감 조처 등은 쿠바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비쳤다.
1980년 1만 명의 쿠바인들이 하바나에 있는 페루 대사관에 침입한 이래 계속되는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체불과 공장 가동의 연료 부족, 모든 공공 기관의 서비스는 중단되고 폐쇄되는 상황은 쿠바인들의 탈출을 급증시켰는데 난민이 가장 많았을 때 쿠바는 전체 인구의 15%를 잃었다고 한다.
카스트로는 쿠바혁명 초기부터 혁명을 이해하고 원하는 사람만 머물 수 있는 정책을 추진했다. 쿠바 혁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쿠바 밖으로 자유로이 갈 수 있도록 했다. 미국은 쿠바인에 대해 공식적인 비자발급은 제한하면서도 해상을 통해 불법 입국한 쿠바인들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다. 1980년 쿠바 정부가 주민들의 탈출제한을 철폐하자 단 6개월 만에 12만 5000명의 난민이 미국으로 해상 탈출하였다. 또, 1994년 보트피플 대량 탈출 사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쿠바의 아나바 항이나 인근의 바닷가에서 나무상자나 스티로폼으로 만든 뗏목을 타고 해류에 의지해 미국의 마이애미로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탈출에 성공할 경우에는 미국의 “쿠바 민주화 지원법”으로 망명자들에게 1년 체류 후 합법적인 영주권을 발급하고, 생활지원금을 지원한다. 이때는 혁명초기처럼 정치적 난민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발생하였다. 쿠바를 탈출한 망명자가 해안에서 체포되었을 경우에는 쿠바 정부차원의 제제나 체벌은 전혀 없다고 한다. 쿠바인들은 이들을 매국노나 조국의 반역자, 배반자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 미국으로의 이민
미국 해안가의 에스모르 보호소 등의 난민 수용소에서 쿠바인들은 최악의 처우와 세균과 해충에 방치되어 있다. 최근까지도 이런 상황은 계속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쿠바 난민들은 감옥 같은 보호소에서 가혹 행위를 경험한 뒤 강제 추방되거나 절차상 문제를 이유로 본국으로의 송환도 거부당한 채 악몽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미국 해안 경계 부근의 보호소에서 받는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로 인해 많은 쿠바인들이 끔찍한 가난과 본국의 처벌이 기다리는 데도 불구하고 그 쿠바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쿠바난민의 수용에 긍정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92년 이후부터 5만 명이 넘는 난민 행렬에 난색을 표명했고 미국으로 향한 \'보트 피플\' 대부분을 되돌려 보내거나 해상 봉쇄를 단행했다. 이같은 미국 행정부의 대응은 아이티로부터 온 1만4천명의 난민들에게 적용된 것과 같은 조처였다. 그러나 수많은 난민들의 생사를 건 미국행은 클린턴 행정부를 정치적 딜레마에 봉착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난민 탈출의 방관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금수 조치 철회를 유도하려는 카스트로의 정치적 전략으로도 이해된다.
이 같은 다량 탈출사태는 쿠바의 현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증거로 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쿠바가 처한 극심한 경제난을 지적하고자 한다. 쿠바는 59년 혁명 이후 사회주의 블록, 특히 소련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를 유지해 왔다. 혁명 직후 이른바 “전범재판”이라는 이름 하에서 무려 6백 명에 달하는 전 정권 요원을 처형하는 한편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나카라과, 파나마 등 주변국 반정부 세력들의 게릴라전을 지원함으로써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극도로 자극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 쿠바 외교관계 단절, 존 F케네디 대통령 시대의 미사일 위기로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특히 62년 당시 소련 공산당 제21서기 니키타 후루키초프는 케네디의 강경대응에 굴복, 쿠바에 구축한 소련의 미사일 기지의 파괴명령을 내림으로써 세계를 파국으로 이끌 것으로 우려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약 3개월 만에 종식됐다.
주민생활은 식량, 생필품을 배급제에 의존하고 있으나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에너지 부족으로 인한 전력난으로 수도 아바나에서는 정전이 하루 10시간을 넘고 있다. 극도의 생활고는 주민들의 탈출로 나타났다. 그러나 결심만 하면 이 같은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카스트로였다. 그는 8월 11일 밤 느닷없이 tv에 나와 쿠바의 난민 탈출을 부추기는 장본인은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래 30년이 넘도록 쿠바에 대해 경제제재를 지속하는 미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소원대로 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역설했다. 그의 이례적인 TV연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히마르 항은 14년 전의 마리에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59년부터 1993년까지 약 120만명의 쿠바인(현재 인구의 10%)이 미국을 향해 쿠바를 떠났다. 주로 이들은 작은 보트나 허술한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 1980년 4월 6일 일요일, 1만여명의 쿠바인들이 정치적 피난처를 찾아서 아바나 주재 페루 대사관에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4월 7일 월요일, 쿠바 정부는 페루 대사관으로 망명하려한 쿠바인들의 이주를 허락하였다. 4월 16일 5백명의 쿠바 시민들이 코스타 리카를 향해 페루 대사관을 출발하였다. 4월 21일, 많은 쿠바인들이 개인 보트를 타고 마이애미에 도착하기 시작하였으나 4월 23일 미국 주 정부는 이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보트 탈출 행렬은 계속되었다. 카스트로가 누구든지 나라를 떠나고 싶다면 마리엘 항을 통해서 그렇게 하라고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 이민 행렬은 \"마리엘 보트리프트\"(영어: Mariel boatlift)로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6월 15일 배의 행렬이 멈출 때까지 12만5천명의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4. 대표적 이민
(가) 쿠바 이민 상황
아메리카의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는 냉전 시대를 거치는 동안 미국과의 긴장된 관계를 유지해온 반면, 구소련과는 경제적,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불어 닥친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태풍은 쿠바 경제의 핵인 사탕수수와 담배 산업을 마비시켰으며, 이후 1989년 구소련의 경제 원조 삭감 조처 등은 쿠바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비쳤다.
1980년 1만 명의 쿠바인들이 하바나에 있는 페루 대사관에 침입한 이래 계속되는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체불과 공장 가동의 연료 부족, 모든 공공 기관의 서비스는 중단되고 폐쇄되는 상황은 쿠바인들의 탈출을 급증시켰는데 난민이 가장 많았을 때 쿠바는 전체 인구의 15%를 잃었다고 한다.
카스트로는 쿠바혁명 초기부터 혁명을 이해하고 원하는 사람만 머물 수 있는 정책을 추진했다. 쿠바 혁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쿠바 밖으로 자유로이 갈 수 있도록 했다. 미국은 쿠바인에 대해 공식적인 비자발급은 제한하면서도 해상을 통해 불법 입국한 쿠바인들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다. 1980년 쿠바 정부가 주민들의 탈출제한을 철폐하자 단 6개월 만에 12만 5000명의 난민이 미국으로 해상 탈출하였다. 또, 1994년 보트피플 대량 탈출 사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쿠바의 아나바 항이나 인근의 바닷가에서 나무상자나 스티로폼으로 만든 뗏목을 타고 해류에 의지해 미국의 마이애미로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탈출에 성공할 경우에는 미국의 “쿠바 민주화 지원법”으로 망명자들에게 1년 체류 후 합법적인 영주권을 발급하고, 생활지원금을 지원한다. 이때는 혁명초기처럼 정치적 난민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발생하였다. 쿠바를 탈출한 망명자가 해안에서 체포되었을 경우에는 쿠바 정부차원의 제제나 체벌은 전혀 없다고 한다. 쿠바인들은 이들을 매국노나 조국의 반역자, 배반자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 미국으로의 이민
미국 해안가의 에스모르 보호소 등의 난민 수용소에서 쿠바인들은 최악의 처우와 세균과 해충에 방치되어 있다. 최근까지도 이런 상황은 계속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쿠바 난민들은 감옥 같은 보호소에서 가혹 행위를 경험한 뒤 강제 추방되거나 절차상 문제를 이유로 본국으로의 송환도 거부당한 채 악몽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미국 해안 경계 부근의 보호소에서 받는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로 인해 많은 쿠바인들이 끔찍한 가난과 본국의 처벌이 기다리는 데도 불구하고 그 쿠바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쿠바난민의 수용에 긍정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92년 이후부터 5만 명이 넘는 난민 행렬에 난색을 표명했고 미국으로 향한 \'보트 피플\' 대부분을 되돌려 보내거나 해상 봉쇄를 단행했다. 이같은 미국 행정부의 대응은 아이티로부터 온 1만4천명의 난민들에게 적용된 것과 같은 조처였다. 그러나 수많은 난민들의 생사를 건 미국행은 클린턴 행정부를 정치적 딜레마에 봉착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난민 탈출의 방관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금수 조치 철회를 유도하려는 카스트로의 정치적 전략으로도 이해된다.
이 같은 다량 탈출사태는 쿠바의 현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증거로 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쿠바가 처한 극심한 경제난을 지적하고자 한다. 쿠바는 59년 혁명 이후 사회주의 블록, 특히 소련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를 유지해 왔다. 혁명 직후 이른바 “전범재판”이라는 이름 하에서 무려 6백 명에 달하는 전 정권 요원을 처형하는 한편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나카라과, 파나마 등 주변국 반정부 세력들의 게릴라전을 지원함으로써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극도로 자극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 쿠바 외교관계 단절, 존 F케네디 대통령 시대의 미사일 위기로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특히 62년 당시 소련 공산당 제21서기 니키타 후루키초프는 케네디의 강경대응에 굴복, 쿠바에 구축한 소련의 미사일 기지의 파괴명령을 내림으로써 세계를 파국으로 이끌 것으로 우려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약 3개월 만에 종식됐다.
주민생활은 식량, 생필품을 배급제에 의존하고 있으나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에너지 부족으로 인한 전력난으로 수도 아바나에서는 정전이 하루 10시간을 넘고 있다. 극도의 생활고는 주민들의 탈출로 나타났다. 그러나 결심만 하면 이 같은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카스트로였다. 그는 8월 11일 밤 느닷없이 tv에 나와 쿠바의 난민 탈출을 부추기는 장본인은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래 30년이 넘도록 쿠바에 대해 경제제재를 지속하는 미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소원대로 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역설했다. 그의 이례적인 TV연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히마르 항은 14년 전의 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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