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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근대의 시작과 3.1운동
항일투쟁의 심화
일본 제국주의의 발흥과 해방
해방과 좌우 갈등
좌우 갈등의 심화와 분단정부 수립
한국전쟁의 발발
이승만 정권의 정치와 경제
4.19와 5.16 한국의 두 가지 ‘혁명’
5.16 군사쿠테타와 박정희 정권의 수립
박정희 경제개발계획의 기원
유신체제, 서울의 봄, 광주민중항쟁
전두환의 정권의 강압통치와 87년 6월 항쟁, 6공화국의 출범
근대의 시작과 3.1운동
항일투쟁의 심화
일본 제국주의의 발흥과 해방
해방과 좌우 갈등
좌우 갈등의 심화와 분단정부 수립
한국전쟁의 발발
이승만 정권의 정치와 경제
4.19와 5.16 한국의 두 가지 ‘혁명’
5.16 군사쿠테타와 박정희 정권의 수립
박정희 경제개발계획의 기원
유신체제, 서울의 봄, 광주민중항쟁
전두환의 정권의 강압통치와 87년 6월 항쟁, 6공화국의 출범
본문내용
승만: 반민법이 통과되자 \"지금은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할 시기가 아니다.\"(1948년 9월 15일자 <조선중앙일보>·<자유신문>)며 반민특위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임.
(2)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난입해 특경대원 40여명을 연행하는 폭력사태.
(3) 국회프락치사건
- 1949년 제헌국회 내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로 몰려 대거 구속된 사건. 1차 프락치사건에서는 이문원·최태규·이구수·황윤로 의원이 구속되었다. 죄명은 국가보안법(1948년 12월 1일 제정) 위반.
(4)김구 암살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에 의해 1949년 6월 26일 권총으로 사망
암살배후에 대해서는 밝혀진바 없음,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 주요암살배후자로는 당시 국방장관인 신승모로 생각됨.
안두희는 범행 48일만에 2계급이나 특진함
김구는 해방초기에는 친일파 청산에 미온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1948년부터는 적극적으로 친일파 척결을 주장.
한국전쟁의 발발
1. 한국 전쟁의 기원론
(1)1970년 이전 전통주의
스탈린 주도설 혹은, 소련·중국 공모설이 지배적임.
①스탈린 주도설:
-소련을 향해 가중되는 유럽의 압력을 아시아로 분산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
-미일 평화협상을 막기 위해 개전했다는 ‘ 미일조약 견제설’
-남한이 허점을 보여 공격했다는 ‘허점 공격설’
-소련이 한반도의 부동항을 얻으려는 욕심에서 개전했다는 설
소련 중국 공모설- 대한민국의 공식입장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한인병사들을 북한에 귀한시켜 북한군의 병력을 증강시켰다는 주장
-마우쩌둥의 모스크바 방문(1949. 12~ 1950. 2) 기간에 전쟁개전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합의가 있었을 것이다.
(2)1970~1980년대 수정주의:
-미국과 남한이 공모하여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남침 유도설.
-1950년 6월 25일 아침에 한국군이 해주를 점령하였고 이것이 북한의 대대적인 저항을 받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설.
-이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정확한 문건이 공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가 가설적이 추측적.
-1980년대 미국자료의 공계와 수정주의의 확산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자료와 북한의 노획문서가 공개됨으로써 연구 경향의 확대.
부르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남침 유도영 선제 북침설을 주장.
(3)1990년대 러시아 자료의 공개와 전통주의의 재등장
남침에 대한 확신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남한의 해주공격설이 불가능, 한국군 수뇌부는 준비된 방어계획에 따라 해주 공격을 내렸지만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음, 북한의 공세가 압도적이어서 반격은커녕 철수도 할 수 없었다고 함.
2. 한국전쟁의 발발 이전 상황
(1)양국 지도층의 적개심 확산
김일성은 자신의 항일투쟁의 신화를 바탕으로 계승하고 있으며, ‘친일파 친미파 매국노들이 득실거리는 남조선’을 ‘미제’의 지배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복음주의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음.
김일성: 스탈린 동무, 현재의 정세에 비추어볼 때 군사적 수단을 통하여 전국을 해방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또 가능하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남반부의 반동세력들은 평화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북침하기에 스스로 강하다고 스스로 판단할 때까지 조국의 영구분달을 획책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의 군대가 보다 강하며, 이에 덧붙여 우리는 남측 내의 강력한 유격대 운동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친미 정권을 경멸하는 남쪽 주민들도 분명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김일성이 지휘하는 북한정부대표단과 스탈린간의 대화록)
이승만 역시 북한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음
이승만: 북한의 무장국민들이 매일 38선을 넘어와 살인 방화하며 지하공작분자들이 이남의 각처에 헤져서 살인 방화를 하고 돌아다니며 난장판을 맨들어 놓았다.
나는 지금 북한에 있는 우리의 충성스러운 공산군과 합세하여 평양에 있는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우리가 공격조치를 취하는데 가장 좋은 심리적 호기라고 강하게 느끼고 있다. 우리는 김일성 부하들을 산악지역으로 몰아내 거기에서 그들을 점차 굶겨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 우리의 방위선이 강화될 것이 틀림없다(이승만이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
(2) 38선을 중심으로 한 빈번한 충돌.
1948년 만하더라도 비정규적인 충돌이 잦았으나 1949년에 접어들면서 정규군이 투입되었고 때에 따라서는 연대급 병력까지 동원되었음.
1949 5.4 개성 송악산 전투 등등 각종 전투가 상당수 나타남.
①원인: 미소 양군이 1948년 10월부터 38선을 떠났기 때문에, 한국군이 진지구축과 원한에 대한 해결을 위해 공세적으로 공격하고자 하였으며 북한도 전략적 요충지였던 옹진반도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음
옹진
청단
연안백천
개성
포천
춘천
원대리
주문진
합계
적출현
95
49
41
126
43
112
42
55
563
적참천
31637
3007
2652
19729
2000
5424
4070
2106
70625
아참전
16518
2008
1584
14130
1793
2651
5000
2119
45803
② 적대적인 공격을 북한과 남한 모두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였음
북한: 대대적인 선전과 소련의 지원 획득
스탈린에게 북한은 평화적 통일과 안정을 바라는 반면 남한은 무력에 의한 도발행위를 지속하고 있다는 평화선전 공세를 제기할 수 있는 기회
남한의 공격 혹은 공격에 대한 과정스러운 보고를 통해 자연스레 북한의 무장 강화의 필요성을 제기
실제로 스티코프 상장의 경우에도 남한이 단시일내에 전면적인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무기지원은 있어야 한다고 보고하였음.
남한: 반공이데올로기 강화
-김일성, 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 1949년 2월 22일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남북 통일을 구상하고 이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을 생각이었음.
스탈린: 38선 몇몇 지점에 남한이 침투해 점령한 후 돌아간 것이 사실인가?
김일성: 강원도 38선에서 남쪽과 접전이 있었다. 북쪽 경찰이 무장이 소홀했다. 정규부대가 도착해
(2)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난입해 특경대원 40여명을 연행하는 폭력사태.
(3) 국회프락치사건
- 1949년 제헌국회 내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로 몰려 대거 구속된 사건. 1차 프락치사건에서는 이문원·최태규·이구수·황윤로 의원이 구속되었다. 죄명은 국가보안법(1948년 12월 1일 제정) 위반.
(4)김구 암살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에 의해 1949년 6월 26일 권총으로 사망
암살배후에 대해서는 밝혀진바 없음,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 주요암살배후자로는 당시 국방장관인 신승모로 생각됨.
안두희는 범행 48일만에 2계급이나 특진함
김구는 해방초기에는 친일파 청산에 미온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1948년부터는 적극적으로 친일파 척결을 주장.
한국전쟁의 발발
1. 한국 전쟁의 기원론
(1)1970년 이전 전통주의
스탈린 주도설 혹은, 소련·중국 공모설이 지배적임.
①스탈린 주도설:
-소련을 향해 가중되는 유럽의 압력을 아시아로 분산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
-미일 평화협상을 막기 위해 개전했다는 ‘ 미일조약 견제설’
-남한이 허점을 보여 공격했다는 ‘허점 공격설’
-소련이 한반도의 부동항을 얻으려는 욕심에서 개전했다는 설
소련 중국 공모설- 대한민국의 공식입장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한인병사들을 북한에 귀한시켜 북한군의 병력을 증강시켰다는 주장
-마우쩌둥의 모스크바 방문(1949. 12~ 1950. 2) 기간에 전쟁개전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합의가 있었을 것이다.
(2)1970~1980년대 수정주의:
-미국과 남한이 공모하여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남침 유도설.
-1950년 6월 25일 아침에 한국군이 해주를 점령하였고 이것이 북한의 대대적인 저항을 받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설.
-이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정확한 문건이 공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가 가설적이 추측적.
-1980년대 미국자료의 공계와 수정주의의 확산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자료와 북한의 노획문서가 공개됨으로써 연구 경향의 확대.
부르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남침 유도영 선제 북침설을 주장.
(3)1990년대 러시아 자료의 공개와 전통주의의 재등장
남침에 대한 확신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남한의 해주공격설이 불가능, 한국군 수뇌부는 준비된 방어계획에 따라 해주 공격을 내렸지만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음, 북한의 공세가 압도적이어서 반격은커녕 철수도 할 수 없었다고 함.
2. 한국전쟁의 발발 이전 상황
(1)양국 지도층의 적개심 확산
김일성은 자신의 항일투쟁의 신화를 바탕으로 계승하고 있으며, ‘친일파 친미파 매국노들이 득실거리는 남조선’을 ‘미제’의 지배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복음주의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음.
김일성: 스탈린 동무, 현재의 정세에 비추어볼 때 군사적 수단을 통하여 전국을 해방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또 가능하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남반부의 반동세력들은 평화통일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북침하기에 스스로 강하다고 스스로 판단할 때까지 조국의 영구분달을 획책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의 군대가 보다 강하며, 이에 덧붙여 우리는 남측 내의 강력한 유격대 운동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친미 정권을 경멸하는 남쪽 주민들도 분명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김일성이 지휘하는 북한정부대표단과 스탈린간의 대화록)
이승만 역시 북한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음
이승만: 북한의 무장국민들이 매일 38선을 넘어와 살인 방화하며 지하공작분자들이 이남의 각처에 헤져서 살인 방화를 하고 돌아다니며 난장판을 맨들어 놓았다.
나는 지금 북한에 있는 우리의 충성스러운 공산군과 합세하여 평양에 있는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우리가 공격조치를 취하는데 가장 좋은 심리적 호기라고 강하게 느끼고 있다. 우리는 김일성 부하들을 산악지역으로 몰아내 거기에서 그들을 점차 굶겨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 우리의 방위선이 강화될 것이 틀림없다(이승만이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
(2) 38선을 중심으로 한 빈번한 충돌.
1948년 만하더라도 비정규적인 충돌이 잦았으나 1949년에 접어들면서 정규군이 투입되었고 때에 따라서는 연대급 병력까지 동원되었음.
1949 5.4 개성 송악산 전투 등등 각종 전투가 상당수 나타남.
①원인: 미소 양군이 1948년 10월부터 38선을 떠났기 때문에, 한국군이 진지구축과 원한에 대한 해결을 위해 공세적으로 공격하고자 하였으며 북한도 전략적 요충지였던 옹진반도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음
옹진
청단
연안백천
개성
포천
춘천
원대리
주문진
합계
적출현
95
49
41
126
43
112
42
55
563
적참천
31637
3007
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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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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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적대적인 공격을 북한과 남한 모두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였음
북한: 대대적인 선전과 소련의 지원 획득
스탈린에게 북한은 평화적 통일과 안정을 바라는 반면 남한은 무력에 의한 도발행위를 지속하고 있다는 평화선전 공세를 제기할 수 있는 기회
남한의 공격 혹은 공격에 대한 과정스러운 보고를 통해 자연스레 북한의 무장 강화의 필요성을 제기
실제로 스티코프 상장의 경우에도 남한이 단시일내에 전면적인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무기지원은 있어야 한다고 보고하였음.
남한: 반공이데올로기 강화
-김일성, 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 1949년 2월 22일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남북 통일을 구상하고 이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을 생각이었음.
스탈린: 38선 몇몇 지점에 남한이 침투해 점령한 후 돌아간 것이 사실인가?
김일성: 강원도 38선에서 남쪽과 접전이 있었다. 북쪽 경찰이 무장이 소홀했다. 정규부대가 도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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