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5·18의 배경
1.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
2. 10·26사태이후 정국
Ⅱ.전개과정
1. 5.18 직전의 상황
2. 광주 민주화 운동
Ⅲ. 5.18 그 후
1. 518 이후의 정계변화
2. 518 이후 미국과의 관계
3. 통계
Ⅳ. 5.18 광주민중항쟁을 보는 관점 또는 인식
1. 언론보도
5․18과 민주화
1.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
2. 10·26사태이후 정국
Ⅱ.전개과정
1. 5.18 직전의 상황
2. 광주 민주화 운동
Ⅲ. 5.18 그 후
1. 518 이후의 정계변화
2. 518 이후 미국과의 관계
3. 통계
Ⅳ. 5.18 광주민중항쟁을 보는 관점 또는 인식
1. 언론보도
5․18과 민주화
본문내용
길거리에서 시민들과 군의 충돌은 다음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5월 20일
밤 새도록 학생들은 포고문을 만들어 광주시 전역에 배포를 했고 고등학교는 모두 휴교조치를 당했다. 아침 10시 20분 경,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은 채 심하게 구타당한 사건이 벌어지고 이는 곧 공수부대원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등으로 와전되어 시민들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20일 시위의 분기점은 오후 6시 40분, 금남로에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기 시작하면서이다. 사람들이 뚫지 못했던 군의 저지선은 차량이 밀어붙임으로 해서 뚫려버렸고 이어 시위대 버스가 밀어닥치며 이를 저지하던 경찰 네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언론에서는 이 일련의 광주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 ‘소요 진압과정에서 부상당한 학생은 정성껏 치료를 받았으며 중상자는 없다’라고 방송하여 시민들은 분개, 20일 밤, MBC와 KBS광주사옥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방송이 두절되었고 이어 군에서 교통과 통신 자체를 끊어버렸다.
-5월 21일
20일 밤부터 21일 새벽까지 밤을 새며 방송국 건물이 불탔고 시외전화와 서울등지로 향하는 시외버스가 두절되었으며 공수부대의 총격과 시위대의 선전이 계속되는 사이 아침이 찾아왔다. 그 사이 육군은 20사단이 내려와 증원되었고 아침 10시 10분, 공수대원에게 실탄이 지급되었다. 직후 발표된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에서는 민중항쟁을 ‘불순분자, 간첩, 폭도들의 소행’으로 매도하여 이를 접한 사람들을 흥분케 했다.
도청 앞 금남로를 가득 매운 군중들의 위로 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이 울려 퍼지고, 학생들은 또 그 나름대로 물러서지 말라고 외치며 도청 앞 금남로는 스피커 공방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오후 한시.
갑자기 도청의 사방에 나 있는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를 신호로 실탄을 발급받아있던 공수부대들이 일제히 총탄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시위대는 무장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세시간여 뒤, TNT와 기관총을 탈취한 시위대가 이를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하고 시가전을 전개하게 된다. 결국 오후 5시 30분, 공수부대는 도청을 시민에게 내주고 조선대학교로 철수하게 된다.
-5월 22일
아침부터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이 집결하였다. 거리에는 학생들이 지역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단을 배포하였으며 이는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이성적인 형태로 나타났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군용헬기가 공중에서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고 있었고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전날 희생자들을 위한 헌혈을 부탁하였다.
시 외곽은 완전히 봉쇄되어있었고 이를 빠져나가려 사정하는 시민들에게는 총격이 날아들었다. 시내 곳곳에서 충돌이 계속 이어졌으며 사망 및 부상자는 속출해 갔다.
그 와중에 동아일보에서는 석간으로 광주사태를 보도한 기사를 내보냈지만 검열로 인해 자세한 내막까지는 실을 수가 없었다. 이에 반해 외신에서는 광주 사태를 상당히 비중있게 다뤘다.
또 이어 서울의 계엄사령부는 22일, 5.17조치와 함께 연행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날 발표에서는 김대중이 5.17 이전의 학원소요 및 극렬시위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5월 23일
시민들이 도청을 점령한 이틀째, 학생들은 광주의 질서를 스스로 다잡자는 의미에서 아침 청소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 간밤에 절도와 상해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들은 시위대는 자체적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을 시작하였고 이는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기도 했으나 약 2천 5백여정이나 되는 총기를 수거하여 자체적인 정화를 실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도청 앞에서는 사망자를 찾는 가족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서도 공수부대의 경고 선전물들이 뿌려지고 총기발포가 일어나는 등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한편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은 여야 중신들과 롯데호텔에서 광주사태 수습에 관련한 오찬을 나누며 이를 북한 도발 가능성에 따른 한국의 안보강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북한이 이와같은 도발을 유도할 경우 분쇄할 비상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5월 24일
도청에서는 사태 해결을 위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이어졌다.
이날 오후 1시 20분경, 공수부대가 이동하던 중,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하여 한 학생이 머리에 총탄을 맞았고 군인을
-5월 20일
밤 새도록 학생들은 포고문을 만들어 광주시 전역에 배포를 했고 고등학교는 모두 휴교조치를 당했다. 아침 10시 20분 경,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은 채 심하게 구타당한 사건이 벌어지고 이는 곧 공수부대원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등으로 와전되어 시민들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20일 시위의 분기점은 오후 6시 40분, 금남로에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기 시작하면서이다. 사람들이 뚫지 못했던 군의 저지선은 차량이 밀어붙임으로 해서 뚫려버렸고 이어 시위대 버스가 밀어닥치며 이를 저지하던 경찰 네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언론에서는 이 일련의 광주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 ‘소요 진압과정에서 부상당한 학생은 정성껏 치료를 받았으며 중상자는 없다’라고 방송하여 시민들은 분개, 20일 밤, MBC와 KBS광주사옥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방송이 두절되었고 이어 군에서 교통과 통신 자체를 끊어버렸다.
-5월 21일
20일 밤부터 21일 새벽까지 밤을 새며 방송국 건물이 불탔고 시외전화와 서울등지로 향하는 시외버스가 두절되었으며 공수부대의 총격과 시위대의 선전이 계속되는 사이 아침이 찾아왔다. 그 사이 육군은 20사단이 내려와 증원되었고 아침 10시 10분, 공수대원에게 실탄이 지급되었다. 직후 발표된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에서는 민중항쟁을 ‘불순분자, 간첩, 폭도들의 소행’으로 매도하여 이를 접한 사람들을 흥분케 했다.
도청 앞 금남로를 가득 매운 군중들의 위로 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이 울려 퍼지고, 학생들은 또 그 나름대로 물러서지 말라고 외치며 도청 앞 금남로는 스피커 공방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오후 한시.
갑자기 도청의 사방에 나 있는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를 신호로 실탄을 발급받아있던 공수부대들이 일제히 총탄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시위대는 무장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세시간여 뒤, TNT와 기관총을 탈취한 시위대가 이를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하고 시가전을 전개하게 된다. 결국 오후 5시 30분, 공수부대는 도청을 시민에게 내주고 조선대학교로 철수하게 된다.
-5월 22일
아침부터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이 집결하였다. 거리에는 학생들이 지역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단을 배포하였으며 이는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이성적인 형태로 나타났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군용헬기가 공중에서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고 있었고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전날 희생자들을 위한 헌혈을 부탁하였다.
시 외곽은 완전히 봉쇄되어있었고 이를 빠져나가려 사정하는 시민들에게는 총격이 날아들었다. 시내 곳곳에서 충돌이 계속 이어졌으며 사망 및 부상자는 속출해 갔다.
그 와중에 동아일보에서는 석간으로 광주사태를 보도한 기사를 내보냈지만 검열로 인해 자세한 내막까지는 실을 수가 없었다. 이에 반해 외신에서는 광주 사태를 상당히 비중있게 다뤘다.
또 이어 서울의 계엄사령부는 22일, 5.17조치와 함께 연행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날 발표에서는 김대중이 5.17 이전의 학원소요 및 극렬시위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5월 23일
시민들이 도청을 점령한 이틀째, 학생들은 광주의 질서를 스스로 다잡자는 의미에서 아침 청소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 간밤에 절도와 상해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들은 시위대는 자체적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을 시작하였고 이는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기도 했으나 약 2천 5백여정이나 되는 총기를 수거하여 자체적인 정화를 실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도청 앞에서는 사망자를 찾는 가족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서도 공수부대의 경고 선전물들이 뿌려지고 총기발포가 일어나는 등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한편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은 여야 중신들과 롯데호텔에서 광주사태 수습에 관련한 오찬을 나누며 이를 북한 도발 가능성에 따른 한국의 안보강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북한이 이와같은 도발을 유도할 경우 분쇄할 비상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5월 24일
도청에서는 사태 해결을 위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이어졌다.
이날 오후 1시 20분경, 공수부대가 이동하던 중,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하여 한 학생이 머리에 총탄을 맞았고 군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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