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해방공간기 내재적 역사지향
3. 민족사적 과제와 이승만
1) 일제잔재 청산과 이승만
2) 민족통일정부 수립과 이승만
3) 민족자주 구현과 이승만
4) 민주주의 구현과 이승만
4. 정통성과 이승만
1) 1차 집권을 가져온 5․10선거와 정통성
2) 2차 집권을 가져온 부산정치 파동과 정통성
3) 3차 집권을 가져온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규정 철폐’ 개헌과 정통성
5. 참고문헌
2. 해방공간기 내재적 역사지향
3. 민족사적 과제와 이승만
1) 일제잔재 청산과 이승만
2) 민족통일정부 수립과 이승만
3) 민족자주 구현과 이승만
4) 민주주의 구현과 이승만
4. 정통성과 이승만
1) 1차 집권을 가져온 5․10선거와 정통성
2) 2차 집권을 가져온 부산정치 파동과 정통성
3) 3차 집권을 가져온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규정 철폐’ 개헌과 정통성
5.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 일어난 일들은 조선에 한정된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화란 군이 새공화국을 쳐부수는 것을 돕기 위해 호주와 영국군 병력을 투입시켰고, 중국에서는 ‘붉은 악당’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장개석이 일본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영국군대는 월남 새 공화국과 싸우기 위해 프랑스군이 도착하기까지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을 지휘했다. 사이공 부근에서 일본군들이 영국 완장을 두르고 활보하고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수마트라에서 서울까지 그들의 제국을 되찾는 날이 올 때까지 민중들의 저항운동을 저지시키는 데 일본군을 이용하였다” Herring, George. America\'s Longest War, 2nd ed., (NY: Alfred Knopf, 1986).(강정구, 1997에서 다시 옮김)
\"순수하고 대중적인 혁명이 전쟁 직후의 중국, 인도, 미얀마, 인도차이나, 조선, 말레이지아에서 격동했다... 이들 혁명적 상황의 특징으로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내인성이라는 점,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적, 사회적 혁명이란 것이다. 초기에는 어느 하나도 반미주의 색채를 띠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에 승리한 직후 미국인들은 인도차이나에서는 정통 독립 운동가들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꼭두각시인 난봉꾼 황제 바오 다이(Bao Dai)를 지지하는 책략을 썼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파괴될지도 모를 사유재산제의 독재체재를 구해 내기 위하여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또한 서울에 진주하여 이미 조선에서 권력을 획득하고 있던 갓 태어난 사회주의(비공산주의) 혁명을 진압하고 이승만을 데려와서 경찰국가를 세웠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토착독립정권을 전복하고 네델란드여왕의 복귀를 꿈꾸는 네델란드에 금융 지원과 무기 지원을 수행했고, 태국에서는 전시에 침략군 편에 서도록 이끈 아시아계지도자(Pibul Songrram)를 지지했다. 스페인과 필리핀에서는 침략국에 협력했던 자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정책을 폈다. ...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연합군은 무장 해제된 일본군을 광범하게 이용했다\" Snow, Edgar \"We Stop a Revolution,\" in Edgar Snow, Journey to the Beginning. (NY: Random House, 1958).(강정구, 1997에서 다시 옮김)
위의 분석이 잘 지적한 것처럼 이들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국가는 2차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혁명상황으로 진입하였고 그 혁명은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민족해방혁명의 성격을 공통적으로 띠고 있었다. 식민지 지배의 인적, 물적 구조의 근본적 청산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반제국주의적이었고, 이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주권을 되찾아 민족독립국가 수립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민족해방혁명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의 지배적 이념 지향인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이러한 혁명적 상황은 미국의 대동아시아 외교정책이 맹목적으로 전제하고 있듯이 중국이나 소련의 ‘세계 적화야욕’이나 ‘사회주의혁명의 수출’의 결과라는 외적 요인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식민 지배에서 배태된 내재적 역사경로의 흐름이었다.
이 혁명적 상황의 도래에 대한 내재적 요인은 객관적 조건, 주체적 조건, 국면적 조건으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강정구, 1990: 122-26
우선 객관적 요인을 본다면 첫째, 식민지로부터 이어 받은 경제구조가 사회주의 혁명에 적합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다. 주요산업자본의 93%와 농지의 18%가 일본인 소유였다. 이들 생산수단은 식민 수탈과 착취의 결과물이었으므로 사적소유보다는 사회적소유가 당시의 전민족적 요구였다. 둘째, 해방공간으로 접어들자마자 형성된 계급구조상의 불균형이다. 곧, 일본인 자본가의 지배계급성 상실과 귀환, 또 극소수 조선인 자본가의 지배계급성 상실로 인해 해방공간의 계급구조는 자본가계급이 부재한 노동자계급의 존재와 계급형성이라는 불균형을 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상대적으로 노동계급의 계급역량이 급상승하였다. 해방공간에 활성화되었던 급진적인 노동자 자주관리는 이러한 조건에서 생성될 수 있었다. 지주계급 또한 일정 부분이 일본인이었고 또 토착 조선인 지주의 경우도 지배계급의 속성상 친일 행위로 인하여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가질 수 없었다. 여기에다 국가억압기구의 지원도 받을 수 없어 소작인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계급구조상의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계급구조 불균형은 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바꾸는 사회주의 지향의 혁명조건을 제공하였다. 셋째, 조선인 지주와 자본가는 대부분이 식민통치기간에 저지른 친일행위 때문에 지배계급으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하여 계급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다. 넷째, 조선인 지배계급은 경제적 지배계급으로서의 계급적 역할은 어느 정도 일본인과 공유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 지배계급의 역할은 허용 받지 못하였으므로 해방과 더불어 국가억압기구를 장악할 수 없어 과도기에 국가기구의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 때문에 조선은 기존의 사회경제구조를 재생산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갖추지 못하여 혁명상황에 진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그 혁명 또한 사회주의 지향적이었다.
다음으로 주체적 조건을 살펴보겠다. 첫째, 식민지 통치기간동안 활성화되었던 노동자 농민의 계급투쟁과 민족해방투쟁으로 노동자농민의 계급역량이 성숙하고 급진화되었다. 커밍스의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1930년대의 적색농조 및 적색노조운동이 활성화되었던 지역이 해방공간에서도 자생적 지방통치기구인 인민위원회가 활발하였던 사실은 이들의 계급역량과 급진성이 해방공간으로 전승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둘째, 식민통치기간에 전개된 민족해방투쟁에서 사회주의자인 급진민족주의자들이 우익인 민족주의자를 압도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주도 집단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정통성의 바탕 아래 사회주의 세력이 해방공간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실제로 토착 자생의 권력체인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인민공화국에서 이들 사회주의 지향의 급진민족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셋째, 해방공간의 조선농민은 더 이상 전통적인 지주-소작의 보호자적 연계 속에
\"순수하고 대중적인 혁명이 전쟁 직후의 중국, 인도, 미얀마, 인도차이나, 조선, 말레이지아에서 격동했다... 이들 혁명적 상황의 특징으로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내인성이라는 점,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적, 사회적 혁명이란 것이다. 초기에는 어느 하나도 반미주의 색채를 띠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에 승리한 직후 미국인들은 인도차이나에서는 정통 독립 운동가들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꼭두각시인 난봉꾼 황제 바오 다이(Bao Dai)를 지지하는 책략을 썼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파괴될지도 모를 사유재산제의 독재체재를 구해 내기 위하여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또한 서울에 진주하여 이미 조선에서 권력을 획득하고 있던 갓 태어난 사회주의(비공산주의) 혁명을 진압하고 이승만을 데려와서 경찰국가를 세웠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토착독립정권을 전복하고 네델란드여왕의 복귀를 꿈꾸는 네델란드에 금융 지원과 무기 지원을 수행했고, 태국에서는 전시에 침략군 편에 서도록 이끈 아시아계지도자(Pibul Songrram)를 지지했다. 스페인과 필리핀에서는 침략국에 협력했던 자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정책을 폈다. ...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연합군은 무장 해제된 일본군을 광범하게 이용했다\" Snow, Edgar \"We Stop a Revolution,\" in Edgar Snow, Journey to the Beginning. (NY: Random House, 1958).(강정구, 1997에서 다시 옮김)
위의 분석이 잘 지적한 것처럼 이들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국가는 2차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혁명상황으로 진입하였고 그 혁명은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민족해방혁명의 성격을 공통적으로 띠고 있었다. 식민지 지배의 인적, 물적 구조의 근본적 청산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반제국주의적이었고, 이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주권을 되찾아 민족독립국가 수립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민족해방혁명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의 지배적 이념 지향인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이러한 혁명적 상황은 미국의 대동아시아 외교정책이 맹목적으로 전제하고 있듯이 중국이나 소련의 ‘세계 적화야욕’이나 ‘사회주의혁명의 수출’의 결과라는 외적 요인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식민 지배에서 배태된 내재적 역사경로의 흐름이었다.
이 혁명적 상황의 도래에 대한 내재적 요인은 객관적 조건, 주체적 조건, 국면적 조건으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강정구, 1990: 122-26
우선 객관적 요인을 본다면 첫째, 식민지로부터 이어 받은 경제구조가 사회주의 혁명에 적합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다. 주요산업자본의 93%와 농지의 18%가 일본인 소유였다. 이들 생산수단은 식민 수탈과 착취의 결과물이었으므로 사적소유보다는 사회적소유가 당시의 전민족적 요구였다. 둘째, 해방공간으로 접어들자마자 형성된 계급구조상의 불균형이다. 곧, 일본인 자본가의 지배계급성 상실과 귀환, 또 극소수 조선인 자본가의 지배계급성 상실로 인해 해방공간의 계급구조는 자본가계급이 부재한 노동자계급의 존재와 계급형성이라는 불균형을 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상대적으로 노동계급의 계급역량이 급상승하였다. 해방공간에 활성화되었던 급진적인 노동자 자주관리는 이러한 조건에서 생성될 수 있었다. 지주계급 또한 일정 부분이 일본인이었고 또 토착 조선인 지주의 경우도 지배계급의 속성상 친일 행위로 인하여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가질 수 없었다. 여기에다 국가억압기구의 지원도 받을 수 없어 소작인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계급구조상의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계급구조 불균형은 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바꾸는 사회주의 지향의 혁명조건을 제공하였다. 셋째, 조선인 지주와 자본가는 대부분이 식민통치기간에 저지른 친일행위 때문에 지배계급으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하여 계급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다. 넷째, 조선인 지배계급은 경제적 지배계급으로서의 계급적 역할은 어느 정도 일본인과 공유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 지배계급의 역할은 허용 받지 못하였으므로 해방과 더불어 국가억압기구를 장악할 수 없어 과도기에 국가기구의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 때문에 조선은 기존의 사회경제구조를 재생산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갖추지 못하여 혁명상황에 진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그 혁명 또한 사회주의 지향적이었다.
다음으로 주체적 조건을 살펴보겠다. 첫째, 식민지 통치기간동안 활성화되었던 노동자 농민의 계급투쟁과 민족해방투쟁으로 노동자농민의 계급역량이 성숙하고 급진화되었다. 커밍스의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1930년대의 적색농조 및 적색노조운동이 활성화되었던 지역이 해방공간에서도 자생적 지방통치기구인 인민위원회가 활발하였던 사실은 이들의 계급역량과 급진성이 해방공간으로 전승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둘째, 식민통치기간에 전개된 민족해방투쟁에서 사회주의자인 급진민족주의자들이 우익인 민족주의자를 압도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주도 집단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정통성의 바탕 아래 사회주의 세력이 해방공간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실제로 토착 자생의 권력체인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인민공화국에서 이들 사회주의 지향의 급진민족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셋째, 해방공간의 조선농민은 더 이상 전통적인 지주-소작의 보호자적 연계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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