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본론
1. 노동운동 발생배경
1) 사회주의 보급
2) 1910년대 노동자상태
2. 1920 년대 전국적 노동 조직의 성립과 전개활동
1) 조선노동공제회
2) 노동대회
3) 조선노동연맹회
4) 원산총파업
5) 조선노농총동맹
3. 1930년대 당 재건운동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4.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의 노동운동
Ⅲ. 연구성과
Ⅳ. 맺음말
Ⅴ. 참고자료
Ⅱ. 본론
1. 노동운동 발생배경
1) 사회주의 보급
2) 1910년대 노동자상태
2. 1920 년대 전국적 노동 조직의 성립과 전개활동
1) 조선노동공제회
2) 노동대회
3) 조선노동연맹회
4) 원산총파업
5) 조선노농총동맹
3. 1930년대 당 재건운동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4.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의 노동운동
Ⅲ. 연구성과
Ⅳ. 맺음말
Ⅴ. 참고자료
본문내용
양전쟁~ 해방까지의 당재건운동
o 경성콤그룹은 1940년 겨울에서 1941년 겨울 사이에 세차래 걸쳐 대규모로 검거되었지만, 약하나마 조직선을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요 관련자들이 탈출 또는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에는 어느 정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최고 지도자인 박헌영동무는 어디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 이위상 두 동무는 함남으로 갔다가 다시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었다“
o 1943년 자유와 독립그룹(이승엽 김일수 등) 1944년 서울지역의 공산주의자 협의회(이정윤 서중석 등)가 있었다.
사례 1) 박헌영 김단야 등 당재건운동가들의 노선(1929-32년)
(기관지) 콤뮤니스트는 무장봉기는 기예(art)이며 최후의 가장 높은 단계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객관적 상황과 주관적 준비가 성숙할 것을 요구한다. 콤뮤니스트는 승리를 위한 길은 투쟁과 조선공산당의 지도와 깃발 주위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의 광범한 대중의 혁명적 무장봉기임을 선언한다.
국내에서 조선 빨치산 부대와 결합하려는 지원자들을 재생산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만주의 지원자들과 협동할 수 있는 만주 국경지대에 빨치산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이들은 빨치산 투쟁을 반제국주의투쟁이나 농민들의 반봉건투쟁과 연결시키려 했다. 이들은 이미 1931년에 국내에서 빨치산투쟁의 서곡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앞으로 그러한 빨치산투쟁을 발전시키고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내에서 ‘혁명적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을 중심 사업으로 잡았으며, 거기에 빨치산투쟁을 결합해야 한다는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혁명적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면 공장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농촌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례 2) 1943년 ‘김종백 부대’
일제의 징병` 징용 소동이 극에 달하고 있던 1943년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백운동, 요즘 사람들이 물놀이하러 잘 가는 백운계곡에 징병` 징용을 거부한 80여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전시체제로 돌입해 최후 발악을 하고 있던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활동을 펼치기 위해 부대를 조직했다. 최고 책임지는 노동자 출신인 김종백, 조직부장은 연희전문 학생으로 김태준 선생의 지도 아래 학생운동을 해온 정준섭, 선전부장은 그의 동생 정기섭(당시 일본 대정대 재학중), 군사부장은 과거에 일본군에 몸담아 군사지식이 있는 염윤구가 맡았다.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 월간 말, 69-70쪽.
참고) 김태준; 경성콤그룹 인민전선부 담당자, 1944년 11월 중국 조선인 무장부대와 연계를 맺기 위해 연안으로 갔다. 해방후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경성대학에 복직, ‘국대안반대사건’으로 해임, 재건 공산당의 중앙위원, 문화부장, 49년 처형
Ⅳ. 연구성과
한국 사회에서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이 지니는 의미와 비중이나, 70년대 이후 이 주제에 대한 연구들에 비해 본다면 식민지시기에 대한 연구 성과는 예상외로 많지 않은 편이다. 나아가서 이 주제의 노동 운동에 집중되어왔으며, 노동자의 상태나 의식 및 일상생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 시기 노동 운동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단일한 파업 사례나 운동 조직과 같은 대표적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여왔다. ‘사건’의 전반적인 경과를 서술하는 데 치중하는 이러한 방식은 사례 자체를 개별 고립적으로 파악ㅎ여 그것이 지니는 비중이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거나 혹은 시기나 지역에 따른 다른 사건들과의 연관 관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거들을 나열적ㆍ평면적 서술을 지양하고 그것들의 내재적 연관 관계를 계기적으로 파악하여 하나의 사건이 전체의 구조에서 지니는 의미와 비중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노동 운동은 노동자가 처한 직업장의 노동 조건이나 생활상태, 혹은 의식 등에 의해 직접 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 운동의 전개는 그것과 접한 관련을 가지고 영향을 미쳐온 노동자의 상태나 의식 등의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생산 과정이나 노동 조직 혹은 노동 조건 등의 노동자의 상태와 유기적인 연관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 노동자가 처한 객관적 조건을 해명하고 분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의 과정이나 경과만을 서술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 하거나 주관적ㆍ자의적 판단에 빠지기 싶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산업이나, 업종에서 생산 조직이나 노동 조건의 상태와 변화를 고려한다거나, 일정 지역에 위치한 여러 산업 부문들이나 작업장에서의 상호 연락과 관계를 주목하거나, 혹은 전국적 차원에서 노동 운동이 고양되는 국면에서 지역들 사이의 상호 호응이나 영향을 염두에 두고 노동 운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식민지에서 초과 이윤을 얻기 위한 산업 구성이나 생산 과정, 노동조직과 노동조건은 노동자들을 열악한 작업 환경과 비참한 생활 상태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켰다. 이들은 일제ㆍ자본에 의한 탄압과 감시, 민족적 차별 및 무지와 순종을 미끼로 한 갖가지 명목의 부담과 착취,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만과 폭력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식민지에서 자본 축적의 원동력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모든 비인간성과 착취가 식민지 자본주의의 성장에 내재한 조건이었다. 일제는 공정한 중재자임을 자처하면서 비도덕적이고 가혹한 축적 과정의 방조자 역할을 하였다. 국면에 따라 협박과 회유, 검거와 탄압의 양상이 되풀이 되었지만 식민 통치의 유지와 축적 과정의 방조라는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래 빼앗기고 억눌리며 분노에 찬 수많은 식민지 민중이 있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틀 안에 편입된 식민지 공업 발전의 미숙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반봉건적 농업과 관련된 농촌에서의 노동력 공금은 이러한 상태를 조성하고 악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교양이나 의식의 각성은 자본주의 성립의 초기에 식민지화의 경험 앞에서 저해되고 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노동자들은 식민주의와 자
o 경성콤그룹은 1940년 겨울에서 1941년 겨울 사이에 세차래 걸쳐 대규모로 검거되었지만, 약하나마 조직선을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요 관련자들이 탈출 또는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에는 어느 정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최고 지도자인 박헌영동무는 어디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 이위상 두 동무는 함남으로 갔다가 다시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었다“
o 1943년 자유와 독립그룹(이승엽 김일수 등) 1944년 서울지역의 공산주의자 협의회(이정윤 서중석 등)가 있었다.
사례 1) 박헌영 김단야 등 당재건운동가들의 노선(1929-32년)
(기관지) 콤뮤니스트는 무장봉기는 기예(art)이며 최후의 가장 높은 단계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객관적 상황과 주관적 준비가 성숙할 것을 요구한다. 콤뮤니스트는 승리를 위한 길은 투쟁과 조선공산당의 지도와 깃발 주위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의 광범한 대중의 혁명적 무장봉기임을 선언한다.
국내에서 조선 빨치산 부대와 결합하려는 지원자들을 재생산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만주의 지원자들과 협동할 수 있는 만주 국경지대에 빨치산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이들은 빨치산 투쟁을 반제국주의투쟁이나 농민들의 반봉건투쟁과 연결시키려 했다. 이들은 이미 1931년에 국내에서 빨치산투쟁의 서곡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앞으로 그러한 빨치산투쟁을 발전시키고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내에서 ‘혁명적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을 중심 사업으로 잡았으며, 거기에 빨치산투쟁을 결합해야 한다는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혁명적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면 공장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농촌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례 2) 1943년 ‘김종백 부대’
일제의 징병` 징용 소동이 극에 달하고 있던 1943년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백운동, 요즘 사람들이 물놀이하러 잘 가는 백운계곡에 징병` 징용을 거부한 80여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전시체제로 돌입해 최후 발악을 하고 있던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활동을 펼치기 위해 부대를 조직했다. 최고 책임지는 노동자 출신인 김종백, 조직부장은 연희전문 학생으로 김태준 선생의 지도 아래 학생운동을 해온 정준섭, 선전부장은 그의 동생 정기섭(당시 일본 대정대 재학중), 군사부장은 과거에 일본군에 몸담아 군사지식이 있는 염윤구가 맡았다.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 월간 말, 69-70쪽.
참고) 김태준; 경성콤그룹 인민전선부 담당자, 1944년 11월 중국 조선인 무장부대와 연계를 맺기 위해 연안으로 갔다. 해방후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경성대학에 복직, ‘국대안반대사건’으로 해임, 재건 공산당의 중앙위원, 문화부장, 49년 처형
Ⅳ. 연구성과
한국 사회에서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이 지니는 의미와 비중이나, 70년대 이후 이 주제에 대한 연구들에 비해 본다면 식민지시기에 대한 연구 성과는 예상외로 많지 않은 편이다. 나아가서 이 주제의 노동 운동에 집중되어왔으며, 노동자의 상태나 의식 및 일상생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 시기 노동 운동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단일한 파업 사례나 운동 조직과 같은 대표적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여왔다. ‘사건’의 전반적인 경과를 서술하는 데 치중하는 이러한 방식은 사례 자체를 개별 고립적으로 파악ㅎ여 그것이 지니는 비중이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거나 혹은 시기나 지역에 따른 다른 사건들과의 연관 관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거들을 나열적ㆍ평면적 서술을 지양하고 그것들의 내재적 연관 관계를 계기적으로 파악하여 하나의 사건이 전체의 구조에서 지니는 의미와 비중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노동 운동은 노동자가 처한 직업장의 노동 조건이나 생활상태, 혹은 의식 등에 의해 직접 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 운동의 전개는 그것과 접한 관련을 가지고 영향을 미쳐온 노동자의 상태나 의식 등의 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생산 과정이나 노동 조직 혹은 노동 조건 등의 노동자의 상태와 유기적인 연관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 노동자가 처한 객관적 조건을 해명하고 분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의 과정이나 경과만을 서술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 하거나 주관적ㆍ자의적 판단에 빠지기 싶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산업이나, 업종에서 생산 조직이나 노동 조건의 상태와 변화를 고려한다거나, 일정 지역에 위치한 여러 산업 부문들이나 작업장에서의 상호 연락과 관계를 주목하거나, 혹은 전국적 차원에서 노동 운동이 고양되는 국면에서 지역들 사이의 상호 호응이나 영향을 염두에 두고 노동 운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식민지에서 초과 이윤을 얻기 위한 산업 구성이나 생산 과정, 노동조직과 노동조건은 노동자들을 열악한 작업 환경과 비참한 생활 상태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켰다. 이들은 일제ㆍ자본에 의한 탄압과 감시, 민족적 차별 및 무지와 순종을 미끼로 한 갖가지 명목의 부담과 착취,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만과 폭력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식민지에서 자본 축적의 원동력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모든 비인간성과 착취가 식민지 자본주의의 성장에 내재한 조건이었다. 일제는 공정한 중재자임을 자처하면서 비도덕적이고 가혹한 축적 과정의 방조자 역할을 하였다. 국면에 따라 협박과 회유, 검거와 탄압의 양상이 되풀이 되었지만 식민 통치의 유지와 축적 과정의 방조라는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래 빼앗기고 억눌리며 분노에 찬 수많은 식민지 민중이 있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틀 안에 편입된 식민지 공업 발전의 미숙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반봉건적 농업과 관련된 농촌에서의 노동력 공금은 이러한 상태를 조성하고 악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교양이나 의식의 각성은 자본주의 성립의 초기에 식민지화의 경험 앞에서 저해되고 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노동자들은 식민주의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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