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고구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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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고구려1[1]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고구려 전기의 대외관계
2. 조공외교
3. 고구려 중기의 대외관계(5~6세기)
(1) 중국 남북조와의 대외관계
(2) 백제 ․ 신라와의 관계
1) 나 ∙ 제 동맹 이전
2) 나 ∙ 제 동맹 이후
4. 고구려 후기의 대외관계
(1) 6세기 후반 고구려의 국내외 정세
1) 중국의 정세변화
2) 돌궐의 정세변화
3) 삼국의 정세 변화
(2) 한강 유역의 상실
5. 고구려와 수 ․ 당과의 전쟁
(1)수나라와의 전쟁
1) 전쟁 배경
2) 전쟁 경과
(2) 당나라와의 전쟁
1) 전쟁 배경
2) 전쟁 경과
(3) 수∙당 전쟁의 결과

Ⅲ. 결론

본문내용

하지 못하였다. 내가 지금 정동(征東)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 자제의 원수(수나라 패배에 대한 보복)를 갚고, 고구려를 위해서는 부군의 수치(영류왕의 시해)를 씻으려 할 뿐이다. 또 사방이 전부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정복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아직 늙지 아니할 때 사대부의 힘을 빌어 이를 취하려 한다(『三國史記』 권 21 보장왕 31년조)
에서 볼 때,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은 수나라의 패배에 대한 보복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패권확립에 방해가 되는 고구려의 정복을 목표로 한 군사행동이다.
2) 전쟁 경과
당태종은 보장왕 3년(644) 11월에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摠管)으로 삼고 4만군을 이끌게 하고, 전함 500척의 수군은 내주(州)를 떠나 형양으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요동도행군총관인 이적(李勣)은 보병 기병6만과 항호(降胡)를 이끌게 하여 유주(幽州)에서 합세하였다. 그리고 강행본(姜行本:행군총관)과 구행암(丘行:소감)은 선발대로 가서 운재(蕓梓)와 충차(衝車)를 만들게 하였다.
645년 1월에 이적의 군대가 유주에 이르고 3월에 유성(柳城)에, 4월에 통정(通定)을 지나 현토성(玄城)에 이르렀다. 강하왕도종(江夏王道宗:대총관)이 이끄는 또 다른 군대는 신성을 골략하고 영주도독 장검(長劍)은 요하를 건너 건안성을 압박하였다. 특히 이적과 도종의 연합군은 개모성을 함락한 후, 그 여세로 요동성을 공략하였다. 고구려 서북방의 최대 요생인 요동성은 보장왕이 보낸 신성과 국내성의 보 기병의 12일간에 걸친 대반격을 펼쳤지만 끝내 함락되었다. 이어 여세를 모은 당군은 백암성을 총공격하여 무너뜨린후, 설인귀 장손무기, 우진달 등 증원부대와 함께 안시성을 공략하였다.
안시성은 북으로 요동성과 백암성이, 남으로 건안성이 지켜주는 남방통로(요하-하루-해성-봉동-안동)의 요충이다. 더구나 부근의 철생산은 안시성의 중요성을 더욱 크게 하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양국은 6월부터 9월까지 당시의 무기를 총동원하여 4개월 여의 공방전을 계속하였으나, 안시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이 전투를 지휘하던 이적이 당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는 날 남자는 전부 구덩이에 넣어 죽이자’고 한 사실에서 이 전투의 치열함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당태종은 미리 수항막(受降幕)까지 만들게 하엿으나, 끝내 퇴각하고 말았다. 申瀯植, 『高句麗千里長城의 硏究』, p. 113.
(3) 수,당 전쟁의 결과
고구려는 분명히 수, 당의 침입을 격퇴시켰으며, 그들의 동아시아제패를 저지시켰다. 이러한 전쟁을 이끈 연개소문 등의 강경파는 일단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부담은 고구려에게 많은 내부적 갈등과 부담을 강요하게 된 것이다. 연개소문의 철권정치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항할 국민적 공감대를 상실한 것이다.이후 고구려는 멸망하고, 새로운 동북아세계가 형성되었으며 그 화려했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Ⅲ. 결론
고구려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5부족 연맹체제에서 발전한 나라로서 처음부더 강하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강대국은 아니었다고 한다. 북쪽에 위치해 산지가 많았으며 척박한 환경과 북의 위협을 항상 받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의 대외관계는 아주 중요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동맹과 비동맹의 선을 확실히 구분하는 나라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 복속하고 신하의 관계를 맺는 나라에겐 동맹이란 이름으로 그 나라를 따른 위협에서 보호해주었고, 고구려에게 위협이 되거나, 영토확장에 걸림돌이 되는 나라들은 대립의 이름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멸망시키고 영토를 빼앗았다. 이러한 대외정책으로 지금에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거대한 고구려가 탄생 했다고 생각했다.
고구려사는 많은 증거들이 없다. 북한에 의해 또는 중국에 의해 쉽게 접근할수 없는 유적들과 사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중국은 지금 역사적 왜곡을 하고 있다.이 왜곡은 심각한 현실로 다가왔다. ‘서북공정’을 마치고 티벳 지역을 자기 역사인양 흡수 한후 마치 옛 동진 정책을 펼치듯 지금은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인 고구려사를 쾅수 하려는‘동북공정’을 실시하고 있다. 앞 시간에 수업시간에 알 수 있었듯이 이러한 역사적 왜곡은 몇년전부터 차차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민족 말살 정책등 중국이 다민족 국가라는 사실을 내세워 고구려또한 자기 중국의 동쪽의 소수민족일 뿐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이슈가 되지 않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최근 언론 매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크게 분노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나 조금만 빨리 그러한 점들에 관심이 있었다면 아마 이런 일들은 미연에 방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학기 개강을 하면서 처음 동북공정에 대하여 다른 전공수업시간에 듣고 난 뒤 얼마 후 큰 이슈가 되었다.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다만, 조금은 아쉬울 뿐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고구려를 조사하면서 고구려의 대외관계 부분이 정확한 증거의 의해 정립해 놓은 자료들 보다는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논문으로 되어있는 자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 선배들의 조언도 얻고 도서관에서 많은 책들을 대여해 읽어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문 이 많아 짧은 실력으로 읽어 보는데도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고 조사한 내용이 그리 광범위 할 수 가 없었던 것 같아 많은 아쉬움이 남는 과제였다. 하지만 우리 고구려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좀 더 처음 보다는 깊이 있게 관심을 가질 수 있어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硏究叢書』 01편 《고구려국가의 형성》고구려연구재단. 2004
『高句麗史Ⅰ』손영종. 과학백과사전 종합 출판사. 1995
『한국사 시민강좌 제3집』이기백. 일조각. 1991
『살아있는 한국사』이덕일. 휴머니스트. 2004
『韓國史1』《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강만길외 11명 공저. 한길사. 1994
『韓國史5』《삼국의 정치와 사회Ⅰ》. 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 1996
『韓國의 古代史』신영식. 삼영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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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04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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