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이 지녔던 내재적 한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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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초창기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이 지녔던 내재적 한계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러일전쟁의 세기 요약 - 문제의식과 관련 있는 부분
3. 일본의 초기 사회주의 수용환경과 수용과정
4.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전쟁과 식민지에 보였던 모순적인 시각
5. 나오며

본문내용

의 초창기 사회주의가 태동하던 과정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메이지유신이후, 서구를 본받아 근대화를 추구해야 했던 일본의 입장으로서는 서구의 제도 및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여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제도나 문물은 반드시 그에 기반하는 사상이 있기 마련이다. 메이지 유신이후 근대 교육과정이 재편되고 그에 따른 엘리트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서구의 사상과 철학들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근대화를 추구하던 일본에 가장 만연했던 것은 독일의 관념론이나 영국의 합리론 등과 같은 높은 수준의 담론을 다루는 철학이 아니라 사회진화론이었다. 사회진화론은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주창되었는데,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의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에도 적용시켜 우등한 민족은 생존하게 되고 열등한 민족은 도태되어 우등한 민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는 논리였다. 즉,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였던 것이다. 윤일 외 3명, “근대 일본과 한국의 사회진화론과 아나키즘 연구-고토쿠 슈스이와 신채호를 중심으로”, 「동북아문화연구」, 제14집(2008), 68쪽.
부국강병과 문명개화가 목표가 된 일본의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은 그러한 사업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근대화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반박하는 논리로서 사회진화론만한 근거는 없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을 체계화한 이는 가토 히로유키이다. 그는 사회진화론으로부터 국가유기체론을 도출하여 일본의 국가사상으로 삼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가 다른 국민의 이익이나 힘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힘을 생각하는 것은 비도덕적이거나 비합법적인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유기체인 국가의 생존을 위해 개인과 국민은 희생될 수 있으며, 그러한 국가 유기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군주중심의 일치단결된 사고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요컨대, 국가주의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위의 논문, 69쪽.
다음으로 일본의 사회주의가 수용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일본의 사회주의 역시 ‘번역된 근대’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후발 근대국가로서 압축성장과 선진 근대국가를 모방해야 했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이해는 명치유신을 전후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즉 사회전복, 인륜파괴와 같은 반체제적 사상으로서의 평가와 계급적 입장으로부터의 예방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1880년대 들어 디플레이션이 일본사회에 만연하게 되자 진보적이었던 지식인을 중심으로 혁명이나 사회개조운동을 추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가 소개된다.
1882년 5월 2일 타루이 토오키치는 아카마츠 타이스케와 일본 사회당을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서적 번역에 힘쓰게 되었다.사회주의와 관련된 초기 문헌으로는 T.More/타카하시 타츠로(高橋達郞) 번역 交際論(1877), 이노우에 츠토무(井上勤) 번역 良政府{談(1882), T.D.Woolsey/시시도 요시모토(六戶義知) 번역 古今社會黨沿革志(1882), 포세트/오오노 나오스케(大野直輔) 번역 貧困救治論(1887), 平民叢書 第 6卷 現代の社會主義(1893) 등이 있다. 김동기, “일본 근대철학의 형성과 번역”, 「시대와 철학」 제16권 1호(2005), 264쪽.
이후 1904년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는 공산당선언을 공번역하였고, 사카이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번역하였다.
무릇 번역을 통해 들어온 사상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데 첫째, 사상이 기원한 곳의 문화나 역사가 번역을 거친 곳의 문화와 역사와의 괴리이다. 수입해 받아들인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고려해야 하는데, 사상이 가진 의미나 영향력이 클 경우 현실에 사상을 변용하기 보다는 현실을 외면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 번역 자체의 문제로서 오역이나 의역의 경우 원래 사상이 가진 의미를 충실히 전달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그 사상은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거나, 단순히 지적 장식용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즉 변용과 왜곡의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4.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전쟁과 식민지에 보였던 모순적인 시각
결국 사회진화론과 번역된 근대라는 측면에서 일본의 사회주의 수용을 살펴보면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였으며, 대역사건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고토쿠 슈스이의 곡예와도 같은 사상변화도 설명이 가능하다. 자유민권사상가인 나카에 쵸민과 일본 근대의 선구자격이라 할 수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에게서 영향을 받은 그는,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에 대한 전쟁여론이 국내에 높아지자 1903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른바 비전론을 주창한다.
하지만 그 역시 사회진화론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승열패의 신화를 인정했다. 그러나 가토가 주장했던 대로 사회진화론이 국가주의에 귀착된다는 논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논고인 「진화론과 사회주의」에서 그는 “진화설이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온 세상의 생물은 생존경쟁, 우승열패, 자연도태에 의해 점점 진화해 가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상과 정의를 위한 경쟁이 가능하다고 보고, 우승열패의 논리가 전인류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윤일 외 3명, 위의 논문, 71~73쪽.
때문에 초창기 그의 비전론을 살펴보면 과연 그가 진정으로 제국주의에 반대하기 때문에 비전론을 펼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으나, 이러한 사상적시대적 배경 하에서 고토쿠가 아직까지 사회주의나 아나키즘, 그리고 제국주의를 배격해야 하는 근원적인 이유에 대해 심도 있는 이해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토쿠는 1903년 6월 18일 사회주의협회에 있었던 연설에서 일본이 오늘날 서둘러야 할 일은 러시아와 싸울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제적으로 만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즉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자본을 투자해서 그 땅의 부를 흡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막대한 전비를 외국에서 빌려 전쟁을 하면 전후에 그것을 변제해야 하는데, 혹시 전쟁에서 이겨 러시아를 만주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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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1.08
  • 저작시기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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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74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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