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무굿과 김금화에 대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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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황해도 무굿과 김금화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굿에 관해서 의논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신어머니 김금화와 신 딸 채희아의 내림굿에 관한 나의 글과 사진을 보고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 김금화 만신을 찾아갔더니 내 허락을 받아오면 응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TV를 위해 촬영에 응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굿은 민족 근대화 운동에 위배되는,
타파해야 할 미신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한라산 중산간에 있는 밭의 돌담 밑에서 굿을 하며 그 명맥을 간신히 이어갈 때였다.
그러니 불안한 김금화 만신은 방송국에서의 촬영은 물론 방영 여부까지 그 결정을 내게 미뤄버린 것이다.
김금화 만신의 생각으로는 신문사 기자인 내가 권한다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였겠지만 나로서는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가 위험에 노출될 우려가 있는지, 혹시 이미지가 나빠질 내용은 없는지 나는 그 PD와 함께 콘티를 검토해야 했다.
무조건 방송을 기피하기보다는 그런 때일수록 적극적으로 사회적인 이해를 돕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김금화 만신은 널리 알려진 큰 만신이고 내림굿을 받을 신딸 채희아는 경기여고를 나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종족무용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 나라의 춤을 배우던 중 몸에 신기가 생겨 귀국해서 내림굿을 하게 되었는데,
그 범상치 않은 상황 때문에 방송국에서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렬했다.
어쨌든 어려운 70년대를 넘기자 80년대엔 강제로 굿을 막는 분위기는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도움을 받았는지 이때의 내림굿 방송은 비록 재현한 것이었고
조금은 흥미 위주로 흐른 감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고향 그리는 설은 마음 서해안 풍어제
지금은 인천 국제공항으로 변한 영종도 옆에 용유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옹진군이었다가 인천시로 편입된 곳으로
이곳에서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서해안 풍어제라고 알려진 대동굿을 하고 있었다.
1989년 10월 화창한 가을에 나는 이 섬에서 김금화 만신이 하는 대동굿을 볼 수 있었다.
북한지방의 굿은 북한 땅에서는 이미 사라졌거나 거행되지 못하고 있다.
오직 남한으로 피난 온 실향민과 만신들 사이에서만 명맥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북한지방의 굿은 이들을 통해서 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굿은 늘 생이별한 가족들과 떠나온 고향 산천을 그리며 흐느낌 속에서 진행된다.
휴전선이 한이 되어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이야기,
언제 통일이 되어 고향땅에서 부둥켜안고 춤출 수 있게 될까 하는 한이 서린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러한 것들도 그나마 개인 굿에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들이다. 대동굿, 즉 마을굿은 이미 굿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보기가 힘들다. 때문에 인천 앞바다 용유도 덕교2리에서 있었던 대동굿은 마을굿의 본디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황해도 대동굿이었다.
지금은 국제공항 덕분에 자동차로 직접 갈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인천 월미도에서 영종도행 배를 타고 15분, 영종도에서 버스로 한 시간,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했다.
그곳은 90여 가구가 사는 조그만 어촌으로 10가구가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대부분 바다와 더불어 산다. 마을에는 크고 작은 어선 70여척이 있는데 큰 배로는 주로 꽃게잡이를 한다.
그 밖에도 해태양식을 하거나, 굴, 바지락 등을 채취하여 생활하고 있다.
근처에 을왕리 해수욕장이 있다. 마을 주민 90퍼센트 정도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인데,
절반가량은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다. 원래 함경도 사람들이 뱃길을 따라 강원도로 많이 피난 왔듯이
황해도 어민들도 서해안 뱃길을 따라 남하해서 경기도와 충청도 어촌에 많이 정착했다.
그래서 김금화 만신도 경기, 충청, 서해지방의 어촌에 불려 다니며 마을굿을 한다.
어머니를 위한 진지노귀굿
그는 황해도 연백땅에서 태어나 남동생이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뜻의 ‘넘새’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어린 시절을 외롭게 지냈다. 밑으로 남동생을 보려고 외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래서 그가 비로소 금화(錦花)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을 때 그리도 좋았다고 한다.
일곱 살 때 옹진군으로 이사 와서 열두 살 때부터 무병을 앓는다.
열일곱 살 때 당시 큰 무당이었던 외할머니 김천일에게서 내림굿을 받고 만신이 된다.
외할머니를 비롯한 몇 사람의 만신으로부터 굿 일을 배우고 배연신굿, 대동굿 등을 할 수 있게 된다.
인천으로 피난 올 때까지 옹진군 일대의 여러 섬마을을 돌아다니며 굿을 했다.
지금도 늘씬하고 고운데 한창 때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꽃 같은 색시가 굿을 한다고 인기가 대단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바삐 불려 다니며 굿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후 인천으로 피난 와서 굿을 계속하다가 지금은 서울 이문동에서 살고 있다.
1985년에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인간문화재가 된 것이다.
김금화 만신으로부터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댁에서 진지노귀를 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1985년 장례식이 끝나고 난 후인 삼우제 전날이었다.
상을 당했을 때도 연락을 안 하던 이가 삼우제날 진지노귀를 한다고 알려준 것은
진지노귀굿이 보기가 어려운 굿이기에 우리를 위해 특별히 배려해준 것이었다.
사실 진지노귀는 굿을 하는 만신이 허락해도 웬만해서는 사진을 찍기가 힘들다.
언젠가 제주의 진지노귀굿인 귀양풀이의 사진을 찍다가 너무도 슬퍼하는 가족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가 없어
도중에 나와 버린 경험도 있다. 물론 독한 마음을 먹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지만,
처음 만나는 가족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은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는 김금화 만신이 기주 입장에서 초청을 해주어서 우리는 자유롭게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혼이로다 넋이로다 무주공산 삼원혼량(혼령)
혼이라도 다녀가요
  • 가격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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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0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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