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석의<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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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구약성경 석의<해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사도 바울의 성령관 형성의 정황적 사건

Ⅲ.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의 정황적 성령이해

1. 고린도전서의 정황적 성령이해

2. 로마서의 정황적 성령이해

Ⅳ. 고전 2:6-16; 12:1-11; 롬 8:1-30의 석의를 통한 성령이해

1. 고전 2:6-16; 12:1-11의 석의

2. 롬 8:1-30의 석의

Ⅴ.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 나타난 성령의 상이성과 동일성

1. 상이성

2. 동일성

Ⅵ.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 나타난 정황적 성령이해의 종합

Ⅶ. 결 론

본문내용

. 사도 바울의 성령관 형성의 정황적 사건
바울의 성령관 형성의 정황적 사건을 고찰하기 위하여 그의 시대적인 배경들 즉 출생과 성장배경, 유대적 배경, 구약성서적 배경, 헬라문화적 배경, 체험적 배경순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바울의 출생과 성장배경이다. 바울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능통했으면서도 헬라 문화에 익숙한 디아스포라였다. 바울은 세례요한, 예수와 동시대에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난 세계는 급속한 변화와 확장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실재적으로 바울의 출생은 행 21:39; 22:3에 나타나는 누가의 보도를 통해 보면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인 다소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행 22:3의 보도를 볼 것 같으면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엄하게 교육받았다고 되어있다. 이것이 진정한 것인지는 아직 해결된 바가 없지만 예루살렘과 연관시키려는 누가의 의도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4) 빌 3:5-6에 바울은 자신의 정체를 세밀히 밝히고 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을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며 베냐민의 지파이고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다.5)
둘째로 유대적 배경이다. 바울은 그의 성령론을 표현하는데 유대전통 및 구약성서의 유형적 개념과 해석방법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의 성령론에 나타나는 독특한 양상들을 당시 유대주의적 해석에 의하여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가?6) 이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바울은 분명히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록 헬라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유대가정에서 엄격한 유대적 관습에 따라 성장하였으며, 자신의 유대적인 유산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행 22:3). 고향 다소는 소아시아의 헬라 세계와도 연결되었고 셈종족의 수리아와도 연결되는 길리기아 평원의 교통이 빈번한 중심지로, 교부 히에로니므스에 의하면 바울의 부모는 갈릴리 기샬라(Gischala)에 살다가 정복당한 후 이주했다고 한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빌 3:5)이라는 사도 바울 자신의 고백은 그의 가족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바울은 이방사람에게 편지할 때에 유대의 조상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였고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 등의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동족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는 말씀(롬 9:3)을 통해 불타는 동족애와 자신이 유대사람이라는 자각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바울이 구약을 읽을 때도 “기록되었는데…”의 관용구를 사용하며 유대 랍비들의 성서해석법을 따라 비유법을 사용한 것 등은 바울의 해석법이 얼마나 유대 교사 랍비를 닮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셋째로 바울의 사상적 배경으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구약성서적 배경이다. 바울 당시에는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고정된 70인역의 텍스트가 없었으며 70인역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상 배경의 헬라적 요소를 입증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구약을 사용한 것은 배경에 있어 유대적 본질을 제시하여 준다. 구약에 대한 사도 바울의 주석의 실체를 고찰할 때에 그의 사상적 계시요, 계명의 문서 뿐 아니라 약속의 문서로 전제하기 때문에 논증의 자료로서 사용한 것이 확실하다.
넷째로 바울은 이방적 배경 즉 헬라적 배경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또한 헬라주의적인 세계관도 매우 친숙해 있었다. 그렇다면 헬라주의에 대한 바울의 지식이 초대교회의 영적인 현상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통찰의 기반이 되었는가? 바울은 유대사람이면서도 태어난 곳이 헬라문화권이었으며 어린 시절 헬라로마의 환경이 제기하는 일체의 다양성에 노출되어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헬라세계에 대해서도 익숙하였고, 교회를 희랍로마 세계전역에 확장시키는 일이나 복음을 헬레니즘 문화와 양립할 수 있는 형대로 해석하는 데서 그의 사명을 발견하였다. 그는 헬라어에 능통하였으며 그의 문학적 은유법들은 지방의 배경보다도 도시생활을 반영한다. 바울의 사상에는 분명히 헬라적인 환경에서만 얻을 수 있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사도 바울의 헬라적 배경에 대해 학문적인 입장에서 이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녹스(W. L. Knox)이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세계를 통일하려는 알렉산더의 대업이 로마에 의해 이러나가자 세계를 향한 유대인의 진출은 훨씬 용이해졌고 대도시에는 유대인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유대인의 행동반경이 점차 예루살렘에서 멀어지자 신앙의 중심이 흩어져 있는 회당으로 옮겨졌고 종교의 지도자도 토라의 교사로 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디아스포라의 사정이 사도 바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흩어진 회당들이 바울로 하여금 세계선교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영향은 스토아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고향 다소는 이 스토아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그 당시 대단한 위력을 떨친 스토아 사상은 도덕에 대한 성실이나 인도주의적인 도량으로하여 철학전문가 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침투하였다. 스토아의 교사들이 상당히 대중과 감정이 밀착된, 소위 독설적인 설교형은 바울의 고전적 설교인 로마서 2-3장에서 동일한 유형으로 나타나며, 7-1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배반’에 관한 내용에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스토아사상은 내재론적으로 밖에서는 신을 설명할 수 없는 범신사상이었고, 자기의 힘만을 신뢰하라고 비극적인 결의를 일러주고 있으나 바울은 이를 극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자이며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로 오셨으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기독교적 승리를 확신한다. 또 한가지는 바울과 신비종교의 관계이다. 다이스만(G. A. Deissmann)은 바울의 유대주의적인 유산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기독교신앙의 핵심을 헬라의 신비주의와 관련시켜서 해석하였다. 당시의 많은 개종자들이 신비종교를 경험했으며, 이를 기독교내로 들여오기도 했으며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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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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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8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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