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않았다. 순수한 군인인 조운은 자기 일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비가 유비에게 불평을 한 즉 유비는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지금 내가 많은 것을 배우는 중이므로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도 말라”고 못을 박는다.
마침 그때 조조군이 쳐내려 온다. 북쪽 지방을 평정한 조조가 드디어 남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유비가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을 묻자 장비가 대뜸 “물보고 막으라 하면 될 거 아니요”라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동안의 불만이 터진 것이다. 유비는 “내가 지모는 공명을 믿고 무용은 그대들을 믿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꾸중을 한 다음 공명에게 지휘권을 준다. 공명은 첫 전투 지휘에서 기막히게 성공해 무장들을 놀라게 한다. 장비는 금방 승복했으나 관우는 반신반의한다. 소설 삼국지엔 공명이 관우 때문에 힘들어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관우 ·장비 ·유비와 의형제까지 맺은 특별한 사이였기 때문에 공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유비도 이들 창업동지, 특히 의형제와 공명의 관계 때문에 고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바로 유비의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데,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이들을 잘 끌고 나간다. 유비 밑에 모여든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충돌을 하면서도 유비에겐 절대적 충성을 바쳤다. 유비는 사람들의 마음속 기미(幾微)를 잘 알아 알게 모르게 배려하고 다독거렸다. 또 스스로 나설 때와 모른 척할 때를 잘 알았다.
유비는 일하는 자리와 대우하는 자리를 잘 구별해서 썼다. 유비는 충실한 가신인 미축에겐 한동안 공명보다 윗자리를 주었다. 그 대신 결코 군사를 맡기지는 않았다. 미축은 지방의 부호로서 유비가 어려울 때 전 재산을 털어 바쳤고, 누이를 유비의 후처로 주었으나 싸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렇듯 유비는 각기 재능에 따라 사람을 쓰고 전체의 조화와 화목을 세심히 배려했다.
관우는 유비 진영의 선임 장군이었다. 공명이 유비 진영을 지휘하기 위해선 관우를 승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동원된 것이 바로 화용도(華容道) 싸움이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적벽(赤壁)에서 조조군을 깨친 후 패잔병을 추격할 때다. 공명이 각 무장에게 임무를 주는데 관우에겐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관우가 왜 나에겐 임무를 안 주느냐고 하자 공명은 시침을 딱 떼고 “장군에겐 조조를 붙잡는 아주 중대한 임무를 주고 싶으나 옛날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냥 살려 보낼까봐 그런다”고 말한다. 자존심이 강한 관우가 “사사로운 정 때문에 대사를 망칠 것 같습니까”라며 항의한다. 그러면 조조를 놓치면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군령장(일종의 서약서)을 쓰겠느냐고 하자 관우는 두말없이 군령장을 바친다. 공명은 조조가 반드시 화용도를 지나갈 것이니 미리 매복해 있다가 잡으라면서 만약 화용도로 가지 않을 땐 자기가 처벌을 받겠다는 군령장을 썼다. 구진영 대표와 신입 공명의 대결이었다.
관우가 떠나고 나서 유비는 걱정이 돼 “내 아우 관우가 인정이 많아 틀림없이 조조를 그냥 보낼 텐데 어쩌면 좋으냐”고 걱정을 한다. 공명은 “천문(天文)을 보니 조조의 명운이 다하지 않아 어차피 살아갈 운세이므로 관 장군으로 하여금 옛날 은혜나 갚도록 하는 것도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고 유비를 안심시킨다.
과연 조조는 화용도로 갔는데 관우가 옛정을 못 이겨 살려 보낸다. 관우가 면목없이 돌아오자 공명은 군령장대로 목을 베라고 호통을 친다. 옆에 있던 유비가 “관우는 나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의형제이니 내 낯을 봐서 용서하라”고 청을 넣는다. 유비까지 나서니 공명은 못이기는 척 물러선다. 유비도 공명이 관우의 기를 꺾는 데 한몫 거든 것이다. 신입 공명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이다.
삼국지 정사를 보면 조조가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사로잡힐 뻔했다는 기록이 없다. 소설 삼국지에선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이 에피소드를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지에서 가장 재미있고 광채 나는 장면 중 하나다. 다른 면에서 생각하면 공명이 관우 때문에 고심한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 장면이 들어갔다고 볼 수도 있겠다.
공명은 유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외교와 행정 쪽에서 진짜 실력을 발휘한다. 유비가 장판파의 싸움에서 비참하게 깨져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공명은 노숙(魯肅)과 같이 손권에게 가서 군사동맹을 맺고 온다. 빛나는 외교적 승리다. 당시 유비의 군사는 보잘 것 없었는데 오나라에 가서 대등한 조건으로 동맹관계를 맺고 전후 기득권도 인정받고 온다.
유비의 일생을 보면 스스로 일을 하기보다 밑의 사람이 목숨 걸고 일을 하게 하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 또 밑의 사람은 유비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CEO로서 타고난 자질이다. 공명이 손권과 담판을 할 때의 일이다. 공명은 손권에게 지금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오고 있으니 항복을 하든지 맞서 싸우든지 둘 중 하나를 빨리 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같이 엉거주춤하다가는 화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비는 왜 항복하지 않느냐고 손권이 묻는다. 공명은 “조조는 한나라를 뺏으려는 역적인데 천하의 의인(義人)인 우리 주공이 어떻게 항복을 합니까. 이기고 지는 것은 하늘이 정하는 일이고, 우리 주공은 불의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못을 박는다. 손권이 졸지에 불의에 항복하는 사람이 될 판이었다. 당시 유비는 인의와 신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유비의 이런 명성은 유비 진영의 대단한 자산이었다. 공명이 나중에 유비를 위해 인재를 모을 때도 큰 도움이 됐다. 공명도 그것을 적절히 활용해 젊은 손권을 자극한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손권은 발끈하며 “내가 3대째 강동에 웅거해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어떻게 역적에게 함부로 항복할 수 있겠소” 라며 결기를 부린다. 손권 진영 안에서도 주유와 노숙이 항전을 주장해 결국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고 조조와 적벽에서 한판 싸움을 벌인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후 손권군이 조조군과 혼전을 벌이는 틈을 이용해 유비는 형주 남쪽 4개군 즉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 ·무릉(武陵)을 점령한다. 공명이 전략을 짜고 관우
마침 그때 조조군이 쳐내려 온다. 북쪽 지방을 평정한 조조가 드디어 남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유비가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을 묻자 장비가 대뜸 “물보고 막으라 하면 될 거 아니요”라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동안의 불만이 터진 것이다. 유비는 “내가 지모는 공명을 믿고 무용은 그대들을 믿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꾸중을 한 다음 공명에게 지휘권을 준다. 공명은 첫 전투 지휘에서 기막히게 성공해 무장들을 놀라게 한다. 장비는 금방 승복했으나 관우는 반신반의한다. 소설 삼국지엔 공명이 관우 때문에 힘들어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관우 ·장비 ·유비와 의형제까지 맺은 특별한 사이였기 때문에 공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유비도 이들 창업동지, 특히 의형제와 공명의 관계 때문에 고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바로 유비의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데,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이들을 잘 끌고 나간다. 유비 밑에 모여든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충돌을 하면서도 유비에겐 절대적 충성을 바쳤다. 유비는 사람들의 마음속 기미(幾微)를 잘 알아 알게 모르게 배려하고 다독거렸다. 또 스스로 나설 때와 모른 척할 때를 잘 알았다.
유비는 일하는 자리와 대우하는 자리를 잘 구별해서 썼다. 유비는 충실한 가신인 미축에겐 한동안 공명보다 윗자리를 주었다. 그 대신 결코 군사를 맡기지는 않았다. 미축은 지방의 부호로서 유비가 어려울 때 전 재산을 털어 바쳤고, 누이를 유비의 후처로 주었으나 싸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렇듯 유비는 각기 재능에 따라 사람을 쓰고 전체의 조화와 화목을 세심히 배려했다.
관우는 유비 진영의 선임 장군이었다. 공명이 유비 진영을 지휘하기 위해선 관우를 승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동원된 것이 바로 화용도(華容道) 싸움이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적벽(赤壁)에서 조조군을 깨친 후 패잔병을 추격할 때다. 공명이 각 무장에게 임무를 주는데 관우에겐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관우가 왜 나에겐 임무를 안 주느냐고 하자 공명은 시침을 딱 떼고 “장군에겐 조조를 붙잡는 아주 중대한 임무를 주고 싶으나 옛날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냥 살려 보낼까봐 그런다”고 말한다. 자존심이 강한 관우가 “사사로운 정 때문에 대사를 망칠 것 같습니까”라며 항의한다. 그러면 조조를 놓치면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군령장(일종의 서약서)을 쓰겠느냐고 하자 관우는 두말없이 군령장을 바친다. 공명은 조조가 반드시 화용도를 지나갈 것이니 미리 매복해 있다가 잡으라면서 만약 화용도로 가지 않을 땐 자기가 처벌을 받겠다는 군령장을 썼다. 구진영 대표와 신입 공명의 대결이었다.
관우가 떠나고 나서 유비는 걱정이 돼 “내 아우 관우가 인정이 많아 틀림없이 조조를 그냥 보낼 텐데 어쩌면 좋으냐”고 걱정을 한다. 공명은 “천문(天文)을 보니 조조의 명운이 다하지 않아 어차피 살아갈 운세이므로 관 장군으로 하여금 옛날 은혜나 갚도록 하는 것도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고 유비를 안심시킨다.
과연 조조는 화용도로 갔는데 관우가 옛정을 못 이겨 살려 보낸다. 관우가 면목없이 돌아오자 공명은 군령장대로 목을 베라고 호통을 친다. 옆에 있던 유비가 “관우는 나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의형제이니 내 낯을 봐서 용서하라”고 청을 넣는다. 유비까지 나서니 공명은 못이기는 척 물러선다. 유비도 공명이 관우의 기를 꺾는 데 한몫 거든 것이다. 신입 공명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것이다.
삼국지 정사를 보면 조조가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사로잡힐 뻔했다는 기록이 없다. 소설 삼국지에선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이 에피소드를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지에서 가장 재미있고 광채 나는 장면 중 하나다. 다른 면에서 생각하면 공명이 관우 때문에 고심한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 장면이 들어갔다고 볼 수도 있겠다.
공명은 유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외교와 행정 쪽에서 진짜 실력을 발휘한다. 유비가 장판파의 싸움에서 비참하게 깨져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공명은 노숙(魯肅)과 같이 손권에게 가서 군사동맹을 맺고 온다. 빛나는 외교적 승리다. 당시 유비의 군사는 보잘 것 없었는데 오나라에 가서 대등한 조건으로 동맹관계를 맺고 전후 기득권도 인정받고 온다.
유비의 일생을 보면 스스로 일을 하기보다 밑의 사람이 목숨 걸고 일을 하게 하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 또 밑의 사람은 유비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CEO로서 타고난 자질이다. 공명이 손권과 담판을 할 때의 일이다. 공명은 손권에게 지금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오고 있으니 항복을 하든지 맞서 싸우든지 둘 중 하나를 빨리 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같이 엉거주춤하다가는 화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비는 왜 항복하지 않느냐고 손권이 묻는다. 공명은 “조조는 한나라를 뺏으려는 역적인데 천하의 의인(義人)인 우리 주공이 어떻게 항복을 합니까. 이기고 지는 것은 하늘이 정하는 일이고, 우리 주공은 불의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못을 박는다. 손권이 졸지에 불의에 항복하는 사람이 될 판이었다. 당시 유비는 인의와 신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널리 소문이 나 있었다. 유비의 이런 명성은 유비 진영의 대단한 자산이었다. 공명이 나중에 유비를 위해 인재를 모을 때도 큰 도움이 됐다. 공명도 그것을 적절히 활용해 젊은 손권을 자극한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손권은 발끈하며 “내가 3대째 강동에 웅거해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어떻게 역적에게 함부로 항복할 수 있겠소” 라며 결기를 부린다. 손권 진영 안에서도 주유와 노숙이 항전을 주장해 결국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고 조조와 적벽에서 한판 싸움을 벌인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후 손권군이 조조군과 혼전을 벌이는 틈을 이용해 유비는 형주 남쪽 4개군 즉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 ·무릉(武陵)을 점령한다. 공명이 전략을 짜고 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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